찰나가 영원이 될 때 2024 0828 호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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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참조: 2024 0816 무극중앙 청년부수련회 - 찰나가 영원이 될 때
호세아 6:3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서론

사진 작가가 애타게 기다리는 찰나의 이름들

[출처:중앙일보2020.10.08]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889029
순 우리말
윤슬 : 물비늘이라고도 함. (ppt 01) 햋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을 이른다. 화창한 한낮에도 볼 수 있고, 휘영청 달 뜬 밤에도 볼 수 있고, 해가 뜨거나 지는 어스름에도 만날 수 있다. 바다에도 드리우고, 강이나 호수에도 드리운다. 물결이 잔잔해야 윤슬이 더 잘 든다. 한낮에 윤슬이 들 때 물은 은빛을 띤다. 어스름에 윤슬이 들면 물은 금빛으로 번쩍인다. 하늘색이 한가지가 아닌 것처럼 물색도 하나가 아니다.
이내 : (ppt 02) 해가 진 직후 하늘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남아 있는 20여분이 채 안되는 시간. ‘개와 늑대의 시간’ 프랑스어 표현. 개와 늑대를 구분할 수 없는 시간대. 낮도 밤도 아닌 애매모호한 경계의 시간.
볕뉘 : 볕이 누워서 볕뉘다. ‘작은 틈을 통하여 잠시 비치는 햇볕’. (ppt 03) 나무 울창한 숲에서 종종 볕뉘를 만난다. 해가 옆에서 비칠 때, 그러니까 오전이나 오후에 볕뉘가 자주 나타난다. 혹은 창문과 커텐 사이로 누워 들어오는 빛.
이 이름들, 이 시간들의 특징.
1) 기다림 : 애타게 기다려야 한다는 것. 이 시간들이 그냥 오지 않는다는 것. 기대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인내할 때 만나게 되는 순간들이다.
2) 찰나의 순간 : 대체로 짧은 시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사진하는 사람들에게 앞선 이름들보다 더 익숙한 말은, 블루아워, 골든아워, 매직아워라는 말이 있다. 해가 막 뜰 때, 막 질 때, 잠깐 나타나는 하늘의 오묘한 푸른, 붉은 빛이 나타나는 시간. 채 20-30분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영화 <라라랜드>. (ppt 04) 남녀 주인공이 그리피스 천문대에서 탭댄스 추는 장면, 무려 6분정도 되는 시퀀스인데, 원테이크.그 배경이 실제 LA 해질녘에 찍었다고 함. 며칠동안 이 특정시간에 딱 5번 촬영해서 성공한 장면이라고 함. 이 찰나의 순간이 영화라는 영원한 기록으로 남게 된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그냥 순식간에 지나가는 짧디 짧은 시간일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는 바로 그 찰나를 붙잡아 영원한 기억으로 남게 한다.

우리 인생도 찰나의 시간, 어떻게 붙잡을 것인가?

오늘 이 예배의 시간도 마찬가지이다. 매주 돌아오는 예배라고 해서, 매너리즘에 빠지면 안 된다. 우리의 인생도 하나님 보시기에 짧은 인생이다. 일주일에 길어야 2시간, 혹은 매일 새벽예배, 수요예배까지 합쳐도 15시간이다. 찰나의 순간에 무엇을 붙잡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특별히 2청년부 맡고 있음. 청년의 때 그 자체가 인생이라는 시간 속에 찰나와 같은 시간일 수 있다. 청년들은 자신들의 시간이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한다. 나도 그랬다. 그러나 이 젊은 시절은 금방 지나간다. 그리고 이 찰나의 시간을 무엇을 붙잡느냐에 따라 우리의 영원의 시간이 결정된다.
앞서 이야기 했던 것처럼, 찰나의 이름들의 특징은, 기다림순간이다. 그 찰나의 순간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 순간을 긴 기다림 끝에 만나게 될 때, 영원으로 붙잡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 우리 예배 가운데 주시는 하나님의 복음이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다. 왜 기쁜 소식인가? 우리가 여호와를 알려고 할 때, 그가 우리에게 반드시 임하여주신다고 했다. 여호와를 알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에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붙잡고, 영원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복.

본론 : 히브리어 원문 분석

문맥 이해

호세아 내용. 앞선 6장 1-2절 내용. (ppt 05)
호세아 6:1–2 (NKRV)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여호와께 돌아가자!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다. 특별히 우상숭배하는 앗수르를 의지했다. 그 왕을 찾아가서 자신들의 생명을 의탁하려고 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이스라엘이 자기 아빠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 어디 모르는 아저씨를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하나님은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을 가장 싫어하신다. 우상숭배의 죄가 이스라엘에 만연해 있을 때, 호세아 선지자가 “여호와께 돌아가자!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자! 우리의 배반 때문에 하나님의 분노와 노여움으로 지금 고통받고 있지만, 다시 돌아가면 반드시 그가 우리를 회복시켜줄 것을 믿고 돌아가자!” 라고 처절하게 외치고 있음.
부모와 자녀. 훈육. 정신차리게 하는 것이 목적. 다시 돌아오게 만드려는 것이 목적. 매가 필요할 땐, 매도 드는 법. 그럴 때 자녀는 어떻게 해야 함? 빨리 잘못했어요 빌어야 함.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마음도 이와 같았음. 하나님께서 찢으셨다는 그 표현은 하나님의 심판이 사자가 먹이를 찢는 것과 같이 고통스러웠다는 것을 이야기 함. 그 심판의 엄중함을 깨닫고, 빨리 회개의 자리로 엎드려야 함.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혼내고 찢기만 하시는 분이신가?
우리는 1절의 본문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를 찢으셨으나 /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우림 이야기. 혼났음. 그런데 다음 날 되면 아빠~ 하고 달려듬) 아무리 훈육을 받아도 자녀가 부모에게 달려드는 이유가 무엇인가? 부모가 자기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를 찢는 것처럼 느껴져도 하나님의 사랑은 그보다 더 크시며 그 상처를 치유하실 것이다. 우리가 회개의 자리에 나아가기만 하면 말이다.
이 관계가 바로 부모와 자녀의 관계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셨다. 처음에는 종의 영이 우리를 지배했다. 죄의 종노릇 할 때는 맨날 혼나기만 한다. 관계 회복을 위한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다. 종이니까.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 죄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자녀됨의 권세를 누리게 되는 것. 탕자의 비유가 바로 이 맥락이다!
탕자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고자 했다. 처음 마음은 아버지 집의 종으로라도 살기를 원했다. 아버지의 집에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께서 오냐, 너는 앞으로 내 종이다! 라고 했는가? 아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자신의 아들을 아들로서 받아주었다. 종의 신분이 아니라 아들로서, 자녀됨의 권세를 누릴 수 있게 그의 옷을 갈아입히고 금 가락지를 끼우고 다시 자신의 집에 살게 해주었다. 이제 아들은 밖에서 유리하는 부랑자의 신세도 아니고, 종의 신분도 아니고, 아들로서 아버지의 집에서 그 자녀됨의 권세와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 또한 그렇다. 하나님께서 이제는 우리가 죄의 종이 아니라 나의 아들이 되라고 하신다.
로마서 8:15 (NKRV)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그래서 우리는 고난 하에서도 버틸 힘을 얻으며, 회개하는 가운데서도 격려를 받는다. 이러한 회개의 촉구. 아빠와 아들의 관계를 회복시켜 줄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고, 이러한 문맥 이해를 가지고 3절을 보도록 하자.
(ppt 06)

알다 ידע 야다

알자. 여호와를 알아가자? 하나님을 알자라는 말이 무엇일까?
알다라는 이 단어가 히브리어로 몇가지 뉘앙스와 그 의미에 차이가 있음. 우리말로도 알다가 단순히 지식을 안다, 이해한다만 의미하지 않는 것처럼. 내가 누군가를 안다라고 할 때, 단순히 아는 것과, 그를 잘~ 아는 것은 차이가 있듯이.
그래서 이 알다는 어떤 정보를 “인지”, 지식이나 정보를 갖게 되는 것. (선악과)
어떤 지식을 알고, 관찰, 감각을 통해 획득한 “경험”
“이해함”. 나의 행위를 통해서. 주가 주신 계명을 지킴으로 하나님은 이러한 분이시구나 하는 깨달음으로서의 앎.
요한1서 2:3–4 (NKRV)
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그리고 가장 특이한 의미, 관계맺음의 앎
이 단어가 최초의 사람이었던 아담과 하와의 관계 속에서 나왔다. 부부가 서로 성관계를 맺을 때 사용하는 말이다.
창세기 4:1 “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여기서 동침하다라는 단어가 알다라는 단어를 썼다. 다시 말해서 이 알다는 단순히 지식, 경험, 인지, 정보, 이해의 차원을 넘어서는 상호 간에 깊은 관계맺음이 내포된 단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 1 서를 다시보면,
요한1서 4:6–8 (NKRV)
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한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사랑이라는 개념을 적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닌, 그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내가 그에게, 그가 나에게 영향력을 주고 받는다는 뜻이다. 단순히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현장들을 지식적으로 듣고 아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내 말씀이 되고, 내 삶 가운데 적용되고 실제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기적을 우리가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의 실제 적용점을 요한은 사랑에 두고 있다. 하나님이 사랑 그자체라고 이야기 했다. 이것에 비추어 오늘 본문 3절을 다시 보면,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하는 것은, 지식으로 안다거나, 계명 준수 여부를 떠나서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자고 강력히 요구하는 것이다. 왜?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사랑의 관계에 들어갈 때, 우리는 진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힘써 רדף 라다프

알긴 아는데 여호와를 어떻게 알자고 하고 있는가? 라다프의 의미. (ppt 07) 추적하다, 추격하다. 어떤 목표점을 가지고 추구하는 모습.
시편 23:6 (NKRV)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여기서 따르리니 동사. 라다프. 그래서 단순히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평생 나를 반드시 따라온다라는 표현은 약하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추격한다는 것. 하나님의 축복이 나를 추격하고 있다라는 것. 지금 이와 관련한 주제로 설교를 2-3주 사이에 세번 넘게 하고 있다.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 한빛교회에게 필요한 말씀이라고 확신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추격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알려고 할 때, 그냥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기 위해 끝까지 추적하듯이 알아가자는 것이다.
하나님의 무엇을 추적하자는 것일까? 이것은 앞선
호세아 5:15 “15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을 추격해야 함.
성경에서는 형통함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으로 이해함.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도 하나님이 지금 나를 떠나 돌아가신다는 표현은 너무나도 절망적인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돌아가신다고 할까? 왜 우리는 그를 쫓아야 하는가?
회개를 촉구하고 계심.
따라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자기인식은 회개라는 결심을 촉구한다. 그리고 결심은 격렬한 노력을 요구한다. 회개는 결심만 가지고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에 따르는 처절한 노력이 뒤 따른다. 그래서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는 단어가 쓰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 노력에는, 그 회개에는 확실한 응답이 예비되어 있음을 기억하라!

새벽 빛은 무엇?(ppt 08)

새벽 빛. 가장 어두운 시간이 언제인줄 아는가? 바로 여명이 밝아오기 바로 직전이다. 새벽 빛이 밝아오기 바로 직전. 그 어둠이 가장 어두운 시간이라고 한다. 그런데 새벽은 반드시 우리를 찾아온다. 작은 빛이라 생각했던 그 여명, 조금만 진짜 조금만 시간이 흐르면 붉은 태양이 우리의 온 몸을 휘감게 된다. 일출보러 가보았는가? 그 추운 새벽 밤새 기다리다가 해가 딱 떠오르기 시작하는데, 굉장히 짧음. 금방 태양이 떠올라서 온 세상을 비춘다. 그러한 큰 빛을 사모하라. 우리의 어둠을 물러나게 하는 큰 빛을 사모하라. 큰 빛이 우리에게 있어야 완전한 어둠이 제거된다. 어둠은 빛만 들어오면 제거되는 법이다. 그리고 오늘 말씀대로 그 빛이 우리에게 반드시 임하신다고 했다. 일출을 기대하면서 사모했던 것처럼 사모하고 기대하라. 오늘도 우리의 밤은 깊어져가지만, 우리의 마음을 밝히 비추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사모하라! 기대해라! 오늘 큰 빛이 우리를 찾아오실 것을 기대하라!

늦은 비는 무엇?

저는 비오는날을 별로 안 좋아함. 이스라엘에 살 때. 12월? 아무튼 비가 전날 많이 왔고, 그날은 조금씩 내리고 있었음. 아침 기도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비를 싫어하니까 얼른 얼른 가고 있는데, 인도 옆에 물이 많이 고여 있었음. 차가 와서 물을 다 튀기고 감. 그런데 나만 소리 지름. 이스라엘은 비를 좋아함. 왜? 그 땅에서 물은 생명과도 같음. 특별히 비는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생명수임.

자연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팔레스타인의 주민들에게는 ‘비’의 중요성을 다른 어느 지역에서보다 더 절실히 느끼고 있었으며, 또 때를 따라 적절히 내리는 단비를 하나님이 내리시는 큰 복으로 여겼다(신 28:12; 시 72:6–7; 84:6; 렘 5:24; 14:22; 호 6:3; 히 6:7). 그야말로 비는 그 땅의 다산과 수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런 맥락에서 비가 그치거나 장기적인 가뭄은 범죄한 자를 징벌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간주하였다(신 11:17; 왕상 8:35–36; 17:7; 렘 3:3). 삶의 자리를 흔들어놓는 지나친 큰 비 역시 인간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여겼다(창 7:4; 마 7:25–27).

계절에 따른 비의 종류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는데,

① 10월에서 11월경에 우레와 함께 내리는 가을비 곧 소나기의 일종인 ‘이른비’(시 84:6; 욜 2:23)가 있다. 이른비는 여름 건기(乾期) 동안 말랐던 땅을 부드럽게 하여 밭을 잘 갈 수 있게 하여 곡물의 씨앗을 뿌리는 파종에 큰 도움을 주는 비이다. 이 비가 충분히 내릴 때 농부들은 풍년을 예감한다(신 11:14).

② 이어서 겨울 우기(雨期, 11–3월 초순경)가 시작되는데 우기 중에서도 큰 비를 동반한 12–2월경의 ‘겨울비’(욥 37:6; 아 2:11)가 내린다. 이 비는 1년 강수량을 좌우한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여름의 건기에 대비하여 이때 물을 저장해 두기도 한다(스 10:9,13; 욥 37:6).

③ 양이 많지는 않지만 마지막 비인 3,4월경의 봄비 곧 ‘늦은비’(욥 29:23; 잠 16:15)가 있다. 이 봄비는 곡식의 결실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 비는 때를 따라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총(복)으로 여겨졌다(렘 5:24; 호 6:3).

성경 문화배경 사전 이른비와 늦은비

‘이른비’는 문자적으로 ‘물을 줌’, ‘물을 뿌림’이란 뜻으로, 겨울이 오기 직전인 가을(10월에서 11월경)에 내리는 ‘가을비’를 말한다. 여름 가뭄을 해갈시켜 곡식을 파종하는 데 요긴한 비이다. 즉, ‘이른비’를 기점으로 겨울 우기(雨期, 11–3월 초순경)가 시작되며, 이 비가 내림으로써 건기(乾期) 동안 메마르고 굳어져 있던 땅을 무르게 해주어 경작과 파종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 시기에는 때로 많은 비가 내리는 경우도 있어 ‘큰 겨울비’(스 10:9)로 불리기도 한다. 이에 비해, ‘늦은비’는 ‘봄의 작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며, 봄철(3–4월경)에 내리는 ‘봄비’로서 곡식의 결실기에 내려 수확을 풍성하게 한다. 즉, 봄과 여름에 추수하는 농작물들에 수분을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팔레스타인의 강우량은 매우 적고 제한적이며, 그 기후는 덥고 건조하다. 특히 농사에 절대 필요한 물을 적절한 시기에 내리는 비에 의존해야 하는 팔레스타인에서(신 11:11) 파종기와 결실기에 내리는 이 두 비는 농사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는 것으로, 한해의 소출을 결정 짓는다. 그런 측면에서 ‘이른비와 늦은비’는 하나님의 적절하고도 풍족한 은혜와 자기 백성을 세밀하게 돌보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성실하심을 상징한다(신 11:14; 욥 29:23; 시 84:6; 렘 5:24; 호 6:3; 욜 2:23)

(6:3. 겨울 비, 봄 비. 중동의 지중해성 기후에 따라 이스라엘은 일 년에 두 번 비가 내립니다. "겨울" 비는 12월부터 2월까지 내립니다. 10세기 게제르 달력에서 언급했듯이 이 수분은 땅을 부드럽게 하고 밀, 보리, 귀리를 쟁기질하고 파종할 수 있도록 준비합니다. "봄" 비는 3월과 4월에 내리며 기장과 채소 작물의 파종에 필요한 생명을 주는 물을 제공합니다. 이 비가 내리는 시기가 풍작과 기근의 차이를 만드는 것입니다. 야훼를 비와 연결하면 비와 다산의 신으로서 바알의 역할이 대체되고, 태양과 연결하면 정의와 관련이 있는 태양신을 대체합니다.)
Old Testament 6:1-7:16: Turning Away from Repentance and Restoration

6:3. winter rains, spring rains. Based on the Mediterranean climate of the Middle East, Israel receives its rains twice during the year. The “winter” rains fall from December to February. As noted in the tenth-century Gezer calendar, this moisture softens the earth and prepares it for plowing and sowing of wheat, barley and oats. The “spring” rains come during March and April and provide the life-giving water needed for the sowing of millet and vegetable crops. It is the timing of these rains that makes the difference between a good harvest and famine. Tying Yahweh to the rains supersedes Baal’s role as the rain and fertility god, and tying him to the sun supersedes the sun gods who were often associated with justice.

이와 같이 만물을 소성하게 하는 겨울비와 봄비처럼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힘써 알려고 하는 백성들에게 풍요로운 은총과 축복을 내리신다(레 26:4, 신 11:14).
(ppt 09) 담임목사님께서 자주 이야기하셨던 이른비와 늦은비의 은혜. 하늘만 보고 살아야 하는 우리. 하나님께서 때에 맞춰. 기다림이 길지라도. 반드시 응답하실 것. 기도는 길지라도 응답은 한순간. 우리의 인생 속에 찰나와 같은 순간적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아야 한다.

그의 나타나심은 반드시 우리에게 임한다.

오늘 이 찰나의 순간이. 이 짧은 예배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영원한 기억으로. 누군가에게는 주님과의 영원한 사귐에 초대되는 기적같은 순간이 될 것. 그래서 지난주에도 담임목사님 설교에 신자에게 예배는 생명이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일주일간의 때묻고 더러워졌던 것들이 드라이크리닝 되는 시간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예배는 그래야 된다. 그런데 그걸 내가 하는게 아니라 성령께서 해주실 것이다. 다만 기도함으로 기대하기만 하면 된다. 성령을 초청하기만 하면 된다. 내가 하려고 하니까 예배를 드리는데도 내 힘이 들어가서 힘들고 어렵고, 예배가 부담스러워지는 것이다.

결론 : 그러므로

그래서 이제야 우리는 3절의 맨 앞의 “그러므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호세아 5:15 (NKRV)
15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
아까 빛에 대한 이야기를 했음. 큰 빛을 사모하라. 우리의 어둠을 물리치는 그러한 빛. 그러니까 따스한 빛을 느끼려면, 반대로 우리가 그러한 빛이 필요하다는 자기 인식이 필요하다. 영적으로 어둡고, 추운 상태. 15절 말씀에서도 고난 받을 때에 간절히 구한다고 했다.
우리가 주 앞에서 회개의 시간을 갖고, 하나님을 힘써 아는 시간이 지루하게 지속될 수 있다. 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기도의 응답이 언제될지도 모를정도로 긴 기도제목을 갖기도 하다. 그러나 응답은 한순간이다. 주를 힘써 알아가는 시간이 어둠을 지나는 시간 같을 수 있다. 메마른 가뭄의 시간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엔 찰나와 같은 순간에 우리에게 찾아오실 것이다. 그가 우리의 어둠을 깨뜨리실 새벽 빛처럼! 그가 마른 땅을 소생시키는 이른 비와 늦은 비처럼!
그리고 우리는 그 찰나의 시간을 붙잡아 우리의 영원으로 만들어야 한다. 주께서 한번 우리에게 임하시고 우리가 그를 영접하기만 하면, 우리는 영원한 그의 사귐에 들어가게 된다. 영원한 구원의 길에 초대되는 것이다.
찰나가 영원이 될 때를 기억하라.
<결단 찬양> 여호와께 돌아가자
내 백성이 나를 떠나 돌아섰지만 내 사랑이 내 백성은 포기 못 하니 내 모든 것 내어주고 나 그들을 얻으리라
여호와께 돌아가자 우린 돌아서도 그는 변치 않네 여호와께 돌아가자 우린 넘어져도 그 사랑 영원하네
사랑은 오래 참고 자신을 내어주네 서로 사랑할 때 세상은 주 보네 사랑은 절대 지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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