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을 씻기신 주님
Notes
Transcript
할렐루야, 이 자리에 오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오늘도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은혜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가지고 나옵니다. 주님 살펴봐주시고 부족한 모습은 가꾸어 주시고 잘한 것들은 칭찬해 주옵소서.
이 시간 저녁 기도회를 드립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고 성령께서 일하시는 예배 되게 하옵소서. 예배를 통한 회복과 치유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예배를 통한 역사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섬기는 찬양팀에게 은혜의 연주를 입혀주시고 찬양하는 우리들에게 아름다운 고백이 흘러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찬양팀 찬양 합심기도
기도
하나님,
이 그림은요 루카스 크라나흐의 <비텐베르크 제단화>라는 작품입니다. 독일 사람이고,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인물입니다. 크라나흐는 루터의 설교로 많은 영감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확산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인쇄술의 발달 때문이 큰데요. 이 크라나흐가 비텐베르크에서 인쇄소를 운영했습니다. 루터가 성경 번역을 하고 책을 낼 때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설교집, 기도서, 찬송가 등을 찍어냈습니다.
성경에 들어가는 삽화도 그려서 넣는 등 루터를 돕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그림은 크라나흐와 그의 아들이 이어서 마무리했던 2대에 걸친 ‘필생의 역작’이라고 불립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품 안에 아기처럼 안겨 있는 사도 요한이 있고요.
베드로는 예수님 왼편에서 무언가 말하는 듯이 보입니다. ‘모두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다’며 맹세하는 듯한 자세를 취합니다. 그런데 식탁 가운데 자세히 보면 빵과 포도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린 양이 놓여져 있습니다.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이 그림에서 우리가 볼 중요한 부분은 예수님의 오른 편입니다. 오른 쪽에는 누가 앉아 있는지 아시나요? 주황색 옷을 입은 사람입니다. 가룟 유다입니다. 왼 손에는 돈 주머니를 숨기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팔고 받은 은 30입니다.
그리고 다리를 보면 어떻게 되어 있나요? 다리 하나가 의자 밖으로 나와 있습니다. 어디론가 갈 것처럼 왼 발 하나를 뻗어놨습니다. 바로 이 발, 예수님을 배신하고 대제사장에게, 종교지도자들에게 갈 발, 얌체 같은 발, 이 발을 예수께서 씻으셨을까요? 씻어야만 했을까요?
가룟 유다는 예수께 목숨을 바쳤던 사람입니다. 열심당 출신이어서 세상을 바꾸고 싶어하는 혁명가였습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로마와 싸워야 하고 사람들을 모아서 운동을 일으키고 예수께서 왕이 되셔서 세상을 뒤엎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늘 밑으로부터의 변화를 일으키시고 지도자들에게는 비판적이신 예수님, 늘 가난한 자들과 어울리시고 병자를 고치시며 평화의 나라를 꿈꾸시는 예수님이 유다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만든 틀 속에 예수님을 집어 넣은 것이죠. 2절에 “마귀가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라고 했을 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의 잘못을 마귀에게 핑계를 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한 것인데 악한 영에 의해 사로잡혔다든지, 사탄이 나를 죄짓게 했다는 말로 사탄이 나의 면죄부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잘못한 건 내가 잘못한 겁니다. 내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내가 잘못한 일은 내가 하나님께 회개하고 다른 이에게도 사과하는 믿음의 용사가 되어야 합니다.
어거스틴이 그랬습니다. 자신이 마니교에 빠질 때 마니교가 세상을 선과 악으로 나누고 내가 죄를 짓는 것은 선과 악이 싸워서 악이 이겻기 때문이라는 교리였습니다. 그러니 자신이 방탕하고 음란하게 살았던 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악이 나를 지배하고 죄짓게 했기 때문이라며 자기는 잘못이 없다고 안심했습니다. 그 부분에서 마니교에게 매혹됐었습니다.
물론 우리의 죄는 2차적입니다. 더 긍본적인 문제는 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악에게 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시길 구해야 하며 그 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악을 위해 자신의 힘을 사용합니다.
그런 가룟 유다의 발도 예수께서 씻으십니다. 1절에 예수께서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하십니다. ‘끝까지’라는 것은 헬라어로 τέλος ‘텔로스’인데요. ‘완전함에 이를 때까지’, ‘목적을 이룰 때까지’라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자신의 임무를 다할 때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임무였습니다. 사랑함을 이룰 때까지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자신의 지상의 목적인 사랑하는 것을 완전히 이룰 때까지 사랑함을 계속하셨습니다.
그 실천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저녁을 잡수시다가 갑자기 일어나십니다. 팔레스타인 문화에서 밥을 먹을 때는 바닥에서 비스듬히 앉아 발을 뻗고 밥을 먹었습니다. 잘 이해되지 않지만 그랬다고 합니다.
밥을 먹을 때 옆 사람의 발이 내 얼굴 가까이 왔을 것입니다. 발냄새도 났겠죠. 더럽기도 하고요. 그래서 예수께서 못 참고 일어서신 걸까요? ‘도저히 못 참겠다 발 좀 씻자’ 하시고 갑자기 발을 씻으셨을까요?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기 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 상황은 예루살렘의 호산나의 입성이 있고 난 후인데요.
예루살렘 입성하시기 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그 어머니가 왔습니다. ‘주의 나라에서 이 두 아들을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요구합니다.
굉장히 대범한 요구입니다. 이 요구를 듣고 나머지 10명의 제자들이 “두 형제에게 분개”하였다고 나옵니다. ‘네가 왜 그 자리를 차지하냐’의 소리였습니다.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아야 한다는 분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으뜸이 되려면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환호를 받으며 입성하시고 그리스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우심을 보려고 찾아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인자가 죽을 때가 됐다고 하시면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한다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한 제자들의 높은 자리 요구와 경쟁 구도의 상황과 분위기가 제자들 사이에서 고조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유명해지니가 자신들도 높아지는 것 같고 욕심이 생깁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제자들이 서로 알게 모르게 경쟁하는 모습 속에서 예수께서는 최후의 만찬을 하셔야 했습니다.
중동의 문화는 집에 들어가면 발을 씻는 것이 문화입니다. 주인이 손님의 발을 씻어주고요. 서로 발을 씻어주는 문화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의 상황을 보니 아무도 발을 씻지 않은 것 같고 씻어주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제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몸소 보여 주십니다.
밥을 먹다 말고 발도 씻지 않은 제자들을 위해, 아무도 씻어주지 않은 서로의 발을 예수께서 몸을 일으키셔서 씻겨주십니다. 일어나서, 겉옷을 벗으십니다. 겉옷을 벗는다는 것은 노예의 모습을 자처하는 것입니다. 로마시대 노예는 겉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맨 몸으로도 다녔습니다. 무기가 없다는 뜻이고, 당신을 해치지 않는다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노예로서의 자세를 갖추십니다.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직접 대야에 물을 뜨십니다. 물을 떠서 손에 부어주고 하는 일을 하는 것은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했던 일입니다. 엘리사가 엘리야 선지자 밑에서 수종들면서 했던 일을 말합니다. 수종 든다는 것은 물을 떠서 붓는 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렇게 예수께서도 노예처럼 수종들면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닦아주십니다. 그러자 경쟁과 충성의 경계에 서 있는 베드로가 자기의 몸도 씻겨달라고 합니다. 남들과 다르고 싶은 욕심입니다. 발을 씻어야 예수님과 상관이 있다면 몸까지 씻어달라고 합니다. 자신은 더 특별해지고 싶은 충성과 경쟁의 혼란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가룟 유다를 암시하면서는 깨끗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그의 발을 싯기셨고 낮은 자세로 사랑하고 섬기는 일을 끝까지 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깨끗하지 않더라도, 어떤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임무인 ‘사랑하는 일’ 그것을 끝까지 보전하셨습니다.
<걸레만큼만>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현주 작가이자 목사님이 쓰신 건데요.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걸레만큼만 깨끗했으면 좋겠네
유리창 걸레도 유리창보다 깨끗하고
마루걸레도 마루보다 깨끗하고
똥걸레도 똥보다 깨끗하고
똥을 만나면 똥보다 조금 더 깨끗하고
마루를 만나면 마루보다 조금 더 깨끗하고
유리창을 만나면 유리창보다 조금 더 깨끗한
오, 걸레만큼만,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걸레만큼만 깨끗했으면 참 좋겠다.
우리가 걸레를 더럽다고 하지만 걸레만큼 우리를 깨끗하게 만들어주는 도구가 없습니다. 유리창도 닦아주고 마루도 닦아주고 똥도 닦아주는 걸레야말로 가장 중요하고 깨끗한 것입니다. 우리가 걸레만큼만 살아도 영광입니다.
가장 낮은 위치에서 주변을 깨끗하게 섬기는 존재, 더러움을 감수하고 더러운 것들을 깨끗하게 해주는 존재, 이 걸레야말로 가장 거룩한 모습일 것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닦았던 수건만큼만 쓰임 받아도 영광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허리에 둘러지고 제자들의 발을 닦아줬떤 수건처럼 쓰이고, 다른 이들의 더러움을 닦아주는 걸레만큼만 쓰이면 좋겠습니다. 제자들처럼 서로를 향해 ‘너는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다’라며 날카로운 말을 하는 자들이 아닌,
서로의 잘못이 얼마나 큰지 더럽히는 일에 열심을 품기보다,
사람의 마음의 유리창을 닦아주는 일, 똥처럼 더러운 죄를 닦아주는 일에 열심을 내는 제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악한 일에 미련하고 선한 일에 지혜로우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걸레다”라고 여기시면서 나 자신을 정결하게 닦아가고 타자의 더러움도 주님의 이름으로 거룩하게닦으실 때 예수님께서 나를 향해 더럽다고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나를 다시 깨끗하게 씻으시며 ‘고맙다’고 하실 것입니다. 걸레 같은 섬김이 우리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합심기도
이 시간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제자가 되게 하옵소서. 으뜸이 되려하지 말고, 선생이 되려 하지 말고, 서로의 발을 씻고 더러움을 씻는 정결한 섬김이들이 되게 하옵소서.
기도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주어야 한다.”
하나님, 우리가 서로의 발을 씻겨주는 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