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로보로스의 딜레마

열왕기하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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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로보로스의 딜레마
주제: 우상숭배의 뿌리는 교만이며 그것의 끝은 자기 파멸입니다.
[서론1]
여러분, '우로보로스 딜레마'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이 사진을 보시죠.
고대 상징 중 하나인 뱀이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습니다.
이 뱀은 끊임없이 자신의 꼬리를 물며,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무한 반복 속에 갇혀 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물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 행위가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로보로스 딜레마'입니다.
반복적인 자기 파괴 행위를 의미하는 이 모습은 어리석어 보이기만 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 삶 속에서도 자주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성경에서 이러한 자기 파괴적인 행동의 전형적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 살펴볼 열왕기하 1장의 아하시야 왕의 이야기입니다.
[서론2]
오늘부터 우리가 볼 말씀은 열왕기하입니다.
열왕기상과 열왕기하는 원래 한 권의 책입니다.
단지 분량이 많아 나누어 놓은 것뿐입니다.
열왕기서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왕들의 이야기를 다룬 책입니다.
왕들이 하나님의 뜻에 어떻게 순종했는지 어떻게 거역했는지를 보여줍니다.
특히, 예언자들이 자주 등장해 왕들을 책망하고 그들의 죄를 고발합니다.
이 책은 나라가 멸망하고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후 쓰여졌습니다.
그곳에서 자신들이 왜 멸망하게 되었는지를 스스로 재평가한 기록입니다.
오늘 말씀인 열왕기하 1장은 아합왕의 아들, 아하시야 왕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아합왕 때 북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번영을 누렸습니다.
그래서 모압이라는 나라에게서 조공까지 받았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이런 아합왕은 굉장히 훌륭한 왕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합왕을 최악의 왕으로 평가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거슬러 수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죄가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그의 아들 아하시야도 아버지를 본받아 우상숭배의 길을 걷습니다.
오늘 우리는 아하시야 왕의 이야기를 통해, 그가 어떻게 우로보로스 딜레마에 빠져 반복적으로 자기 파괴적인 선택을 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본론]
1,2절입니다.
아합왕이 죽자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됩니다.
그러자 모압이 반역을 시도합니다.
더이상 북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바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북이스라엘의 힘과 영향력이 그만큼 약해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국력이 쇠약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또 있습니다.
아하시야 왕이 다락방 난간에서 추락해 크게 다친 것입니다.
전쟁터에서 싸우다 다친 것이 아닙니다.
평상시에도 잘 사용하던 난간에서 추락해 크게 다친 것입니다.
뭔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왕이 크게 다친 것은 내부적으로 나라의 큰 위기입니다.
왕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밖으로는 모압이 반역을 하고 있습니다.
안으로는 왕이 크게 다쳤습니다.
이게 현재 북이스라엘이 겪는 어려움입니다.
이러한 문제가 일어나자 아하시야왕은 어떻게 할까요?
그는 근처 블레셋의 에그론이라는 성읍으로 사람을 보냅니다.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을 통해 자신의 병을 고치려 한 것입니다.
이런 그의 판단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 역시 아버지 아합왕을 따라 우상숭배에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섬기는 신인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지 않습니다.
그는 남의 나라의 신인 바알세붑을 찾습니다.
그렇다고해서 그가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북이스라엘의 문제는 하나님과 우상을 함께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형식적으로는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른 신들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면 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 삶을 보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우상숭배라고 부릅니다.
아하시야왕이 찾는 바알세붑은 원래 이름이 바알세불입니다.
그런데 바알세붑이라고 바꿔 적었습니다.
바알세불은 ‘높은 곳의 주인’이라는 좋은 의미인데 바알세붑이 되면서 ‘파리의 왕’이라는 의미로 바뀌게 됩니다.
그가 믿는 신이 더럽고 귀찮은 파리들의 왕일 뿐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조롱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북이스라엘의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알수 있습니다.
왜 모압이 반역을 하고 아하시야가 왜 하필 난간에서 떨어져 크게 다치게 되었는지 알게 됩니다.
모압이 힘이 갑자기 세져서가 아닙니다.
아하시야가 기댄 난간이 갑자기 약해져서가 아닙니다.
바로 우상숭배의 죄를 지으며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하신 것입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른 존재나 사물을 숭배하는 행위입니다.
물리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마음 속에서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모든 것이 우상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상숭배를 죄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게 경고하셨습니다.
이러한 우상숭배의 뿌리에는 인간의 교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람이 높아지면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대신 자신의 능력을 의지합니다.
또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해줄 다른 존재를 의지하려고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자리를 자신이나 다른 대상으로 대체합니다.
그래서 우상숭배는 결국 인간의 교만이 낳은 결과물입니다.
교만과 우상숭배는 서로를 강화시켜 악순환을 만듭니다.
교만은 우상숭배로 이어지고, 우상숭배는 교만을 더욱 부추깁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이 교만해져 우상숭배에 깊이 빠졌을 때 그들의 힘은 약화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틈을 타 모압이 반역을 일으킨 것입니다.
아하시야 왕이 난간에서 떨어져 크게 다친 것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높아진 그를 아래로 떨어뜨려 그의 교만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 삶에도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십니다.
우리가 교만해질 때, 하나님은 우리를 낮추시기 위해 어려운 경험들을 허락하십니다.
이는 직장에서 겪는 어려움일 수도 있습니다.
관계에서 겪는 갈등일수도 있습니다.
건강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험들은 우리의 삶을 불편하고 당혹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높아진 부분이 어디인지, 영적으로 약해진 부분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제 헬스 트레이너는 제가 허리가 아픈 이유를 말해주었습니다.
그는 우리 몸에 통증이 생기는 이유는 그 부분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약한 점은 어디일까요?
사탄은 우리의 영적 약점, 특히 교만을 노립니다.
교만해지면 스스로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에서 낮아지는 시간을 경험할때 스스로를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겸손히 낮추고, 우리의 약점을 돌아봐야 합니다.
그러나 아하시야왕은 안타깝게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죄를 그대로 따라합니다.
아버지 아합처럼 우상숭배에 빠져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좋은 의원들을 찾아가도 자신의 병을 고칠수 없습니다.
못 고치니까 이제는 자신이 섬기던 우상의 본거지까지 사람을 보낸 것입니다.
그러나 원인을 제대로 진단하지 못하기에 제대로된 치료도 할수 없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 엘리야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엘리야는 에그론으로 가는 사람들을 막아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합니다.
두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이 계시는데 왜 하나님을 찾지 않고 우상을 찾느냐는 것입니다.
둘째, 결국 병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그는 죽고 말 것이라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 말을 듣자 사람들은 왕에게 돌아가 엘리야의 말을 전달합니다.
그들이 엘리야의 말을 무시하지 않고 돌아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엘리야의 말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왕에게 전달한 것입니다.
왕의 메신저가 어느 순간 하나님의 메신저로 바뀌게된 것입니다.
그럼 왕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왕은 분노합니다.
자신에게 이런 저주를 퍼부은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합니다.
왕은 사절단이 그의 외모를 설명해주자 단번에 그가 엘리야임을 알아봅니다.
엘리야의 생김새가 매우 독특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털이 많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있습니다.
아하시야는 그렇지 않아도 엘리야를 매우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아합왕과 계속 마찰을 겪던 예언자가 바로 엘리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한 엘리야가 자기 가문이 멸망할 것을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9절입니다.
아하시야는 군사 50명을 보내 엘리야를 체포하려 합니다.
어명이라면서 엘리야에게 산 꼭대기에서 내려오라고 명령합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늘에서 불이 내려 그들을 모두 태워버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늘의 불이 곧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전에 엘리야가 바알예언자 400명과 갈멜산에서 대결할때도 하늘에서 불이 내렸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왜 하늘의 불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일까요?
그 당시 사람들은 불을 우상 바알이 보내주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바알은 기후와 관련된 신으로서 풍요를 주는 신입니다.
별명이 번개의 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늘에서 내리는 불을 내려 바알의 무능함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자신들이 숭배하는 신의 상징인 불을 오히려 숭배하는 자들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결국 자신들이 숭배하는 신에게 스스로 파멸된 셈입니다.
이는 스스로를 파괴하는 뱀 우로보로스와 같은 이치입니다.
이러한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우상이 결국 스스로를 망하게 하는 것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현대사회에서 우리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성공이 우리의 우상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공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몰아붙입니다.
그 과정에서 피로와 번아웃에 시달립니다.
끊임없는 무한 경쟁 속에서 완전히 소모되어 탈진할때까지 자신을 착취합니다.
이는 마치 우로보로스처럼 자기 자신을 물어뜯고 파괴하는 과정과 다를바 없습니다.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우상의 실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를 금지하시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상숭배가 결국 우리를 망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하시야 왕은 또다시 군사 50명씩을 보냅니다.
그러자 또다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군사 50명이 타 죽습니다.
그럼 이쯤에서 그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아차렸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일에 개입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았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는 더 화가 나서 세번째로 50명의 군사를 엘리야에게 보냅니다.
이제까지 100명의 군사를 잃었지만, 아하시야 왕은 여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힘과 권력을 의지하는게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의 고집과 영적 무지가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는 또다시 50명의 군사를 엘리야에게 보냅니다.
지독한 집착이자 지독한 어리석음입니다.
앞선 사건들을 알았을 군사들은 명령을 수행하면서도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의 명령이기에 거절할 수 없기에 그들은 엘리야를 만나러 갑니다.
이전의 군사들처럼 그들도 처음에는 왕의 명령을 전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 오십부장은 다르게 행동합니다.
그는 엘리야 앞에서 무릎을 꿇습니다.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병사들의 목숨도 살려달라고 애원합니다.
이는 그가 단순히 왕의 명령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이 일에 하나님의 개입이 있음을 분명히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아하시야 왕이 깨닫지 못한 것을 그는 깨달은 것입니다.
자신과 부하들의 생명이 왕의 손이 아닌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분별한 것입니다.
그는 엘리야에게 산에서 내려오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엘리야가 있는 곳으로 올라가서 겸손히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래서 그와 그의 군사들은 살아남을수 있게 됩니다.
그의 영적 분별력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춘 겸손이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생명을 살린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그와 함께 산에서 내려가라고 하십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와 함께 내려가 왕 앞에 섭니다.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우상을 찾은 것 때문에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벌써 세 번째 동일한 경고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하시야는 여전히 엘리야의 말을 무시합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지 않습니다.
결국 회개하지 않고 자신의 병을 고치지 못하고 죽고 맙니다.
그렇게 그는 침상에서 끝내 내려오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자세히 보면 반복해서 등장하는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내려오다' 입니다.
왕의 명령은 엘리야에게 산에서 내려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병에서 회복되어 침상에서 내려오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어느 것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엘리야에게 내려오라고 명령했던 백명의 군사들은 모두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었습니다.
왕 자신은 결국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사실 왕이 내려오라고 요구해야 했던 대상은 엘리야가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그가 침상에서 내려오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교만을 내려놓고 겸손해졌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높아진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았고, 결국 자신의 침상에서도 내려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교만이 가져오는 비극적 결말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은 죄라고 하면 단순히 도덕적, 윤리적 죄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모든 죄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밀어낸 것입니다.
그 뿌리는 교만에 있습니다.
교만이 낳은 대표적인 열매가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숭배의 뿌리에는 언제나 '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나의 우상을 놓은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아하시야 왕은 겨우 2년을 통치하고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는 난간에서 추락해 병을 앓다가 회개할 기회를 놓친 채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가 이런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의 교만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세 번의 기회를 무시했고, 결국 자신을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그의 교만이 그를 우상숭배로 이끌었고, 그 결과는 자기파멸이었습니다.
이처럼 우상숭배의 끝은 언제나 자기파멸입니다.
우로보로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신을 계속 물어뜯어 파멸로 이끄는 것처럼, 교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이 교만한지 잘 모릅니다.
그러다가 결국 자기 파멸로 치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하시야왕도 이와 같은 딜레마에 빠져 끊임없이 자신의 힘과 우상을 의지하다가 비참한 인생의 끝을 맞이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의 삶을 돌아봐야 합니다.
내 삶에서 내가 진정으로 의지하고 있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나는 어떤 상황에서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종종 성공, 돈, 인간관계와 같은 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며 우상으로 삼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우상숭배의 끝은 언제나 자기파멸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할 때, 우리는 결국 스스로를 망하게 할 뿐입니다.
우리의 높아진 마음에서 내려와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낮아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말씀 속에서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하나님을 다시 하나님 자리에 모셔야 합니다.
우리 모두 스스로 파멸을 자초하는 우로보로스의 딜레마에 빠지지 않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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