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나는 너한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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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Transcript
(연인끼리 대화)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기도하시다가
문득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부르니?”
예수님께서 이 질문을 하신 의도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질문 앞에
제자들이 이렇게 대답했어요.
“누군가는 세례요한, 엘리야,
혹은 옛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
살아났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이 대답을 모르고
제자들에게 물어보신 것은 아닙니다.
이미 답을 알고 계셨으나
빌드업을 하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진짜 질문이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질문에 담겨진
진정한 뜻을 쭉 풀어서
문장으로 만들어보면 이렇습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위대한 예언자라고 여겨지는 사람들보다도 그 말씀에 힘과 권위가 넘쳐났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기적도 그들에게 보여줬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전히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그냥 예언자 중 한 사람 정도, 혹은 예언자 중 위대했던 예언자가 부활한 것으로 오해한다. 그렇다면, 나의 제자들인 너희들은 나와 가장 가까이서 그 모든 것을 더욱 깊게 경험하고 보았을 것인데,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니?”
“너희들에게 있어서 나는 어떤 존재니?”
그때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Luke 9:20 NKSV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Χριστός)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뜻으로 히브리어 ‘마쉬아흐’(מָשִׁיחַ, 메시야)의 헬라어 음역이다.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건,
거룩하게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당시에 기름부음은
특별한 명예, 특별한 지위를
가진 자들이 받는 것이었습니다.
왕, 제사장, 족장 등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지위를 받아
일반인들과는 구별된 자임을
드러내는 것이 기름부음 받은 자였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왕이나 제사장, 족장 같은
명예를 받은 분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왕이자 선지자이자 제사장으로써
기름부음 받은 분이셨습니다.
베드로가 한 대답이
굉장히 센스있는 대답이고,
어찌보면 정답이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이 이상합니다.
21절 말씀 읽어볼까요?
Luke 9:21 NKSV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엄중히 경고하셔서, 이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명하시고,
예수님께서 쑥쓰러우셨을까요?
아니면 베드로가 틀린 대답을 한 걸까요?
둘 다 아닙니다.
예수님이 쑥쓰러워서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도 아니고,
베드로의 대답이 틀린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어디 가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던 이유가 있었어요.
다윗왕 이후 시대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메시아는
아주 이상적인 훌륭한 성군이자
온 일유가 기다리고 기다리는
국가를 살릴 유일한 구세주로써의
의미가 굉장히 강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이분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하는 순간,
사람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왕으로써
받아들일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욱이 큰 문제는
제자들도 예수님을 정치적인 왕,
이 세상에 군립하며
국가를 살릴 구세주로써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 증거로 저번에 말씀을 나눴었죠.
마가복음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을 찾아왔었던 이야기 기억하세요?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했을때,
제자들이 모두 분노했죠.
이미 열 두 제자 모두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왕위에 오르는 그 순간에
한 자리씩 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열 두 제자 모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꼐서는
오늘 본문말씀 뒷구절부터
예수님이 이 땅에 어떤 왕으로써 오셨는지,
어떤 구세주로써 오셨는지 아주 상세하게 말씀해주십니다.
너무너무 중요한 말씀이어서
여러분과 제가 한 절씩 번갈아가면서
천천히 그 의미를 생각하며 함께 읽어봤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읽어볼까요?
Luke 9:21–23 NKSV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엄중히 경고하셔서, 이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명하시고, 말씀하셨다.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서, 사흗날에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사람들에게 군림하며,
이 세상을 정치적으로 구원할 왕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영혼을 회복시키고 구원하시는
사랑의 왕으로써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협성대학교 명예교수이신
황현숙 교수님께서 쓰신 책에
이런 말이 있었어요.
인간은 누구나
이 사회를 성숙시켜나가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인류는 자신들이 살아가는
사회를 아름답게 만들어가기 위해
수천년에 걸쳐서
다양한 사상과 가치관, 제도나 패러다임을
제시해왔다.
그러나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은
인간에게 있는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있는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
그것을 제도로써, 가치관과 패러다임을 전환함으로써
해결하려고 하니까 수천년을 걸쳐도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는 본질적인 문제는
성경에서 말하는대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삶을 살아가고자 할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고자 할 때 해결될 수 있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세상이 옳다고 말하는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대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며 살아야 한다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은 무엇일까요?
23절과 24절 말씀 읽어볼까요?
Luke 9:23–24 NKSV
그리고 예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세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야 하는
유일한 길,
그 첫 번째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과 자신의 성취를 위해
달려나가는 삶을
철저하게 거부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부정한다는 건
인생의 우선순위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 세상 가운데에서
나를 드러내고 싶어서
내가 원하는 것들을 이루며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위해
나의 삶을 거부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날마다’ 십자가를 져야한다는 것입니다.
매일매일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이뤄가기 위해
기꺼이 목숨조차 아까워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나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
참된 사랑이라는 겁니다.
목숨을 일부러 내줄 필요는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낼 수만 있다면,
필요하다면 목숨조차 아까워 하지 않는 것,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방금 말씀드렸던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걸 말합니다.
나의 이익과 성취에 기반한 삶을
철저하게 거부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내기 위해
나의 뜻을 거부하고 매일매일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자로써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의 망가져버린 영혼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본을 보이셨어요.
다 알려주셨습니다.
우리 사회가 왜 병들어 있는지,
우리 삶 속에 아픔과 죄가
왜 이렇게 만연해 있는지,
그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어요.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정치적인 제도를
개혁하기 위해서 오신 왕이 아닙니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것을
올바르게 가르치고자 오신
도덕선생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공부한
위대한 신학자로써 오신 것도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영원한 죽음의 굴레로부터
회복시켜주실
하나 뿐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여러분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어떤 존재인가요?
누군가에게는 예수님이
친구 같을 수 있습니다.
언제든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위로해주시고
나의 마음을 만져주시는 분.
또 누군가에게는 예수님이
그냥 신화 속 인물 정도,
전래동화 속 인물 정도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또 누군가에게는 예수님이
위대한 4대 성인 중 한 명
공자, 소크라테스, 고타마 싯타르타(부처)와 같이
엄청나게 위대했던 사람 중 한 명 정도로
와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예수님의 친구 같은 모습,
전래동화 속 인물 같은 모습,
위대한 4대 성인 중 한 명의 모습,
무엇이 되었든 예수님의 극히 일부분의 모습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실
구세주이십니다.
영원한 죽음의 굴레에서부터
영원한 생명의 굴레로
우리를 옮겨주실,
그를 통해 이 세상을 살리실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모든 인류의 운명은
예수님과의 어떤 관계를
맺고 있냐에 달려 있다.
이 세상의 운명과 모든 인류의 궁극적인 운명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문제가 정말 너무 많지만,
요새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심각한 문제 한 가지를 예를 들어봅시다.
딥페이크
가짜 합성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기술입니다.
요새는 이 기술을 이용해
누군가의 사진을 이용해서
성적으로 문란한 영상을 만들어
범죄의 도구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누군가의 삶을 망가뜨리는
상당히 그릇된 삶의 태도입니다.
극단적인 예시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문제가
사회 안에서 만연한 이유는
자신을 버리지 못해서입니다.
성적인 욕망이 되었든,
명예에 대한 욕망이든,
돈에 대한 욕망이든,
결국에는 이 모든 것이
나 자신을 버리지 못해서,
나의 욕망을 버리지 못해서
벌어지는 일들인 것이죠.
만약에 진정으로
예수님을 나의 영혼의 구원자로 인정한다면,
예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맺어져 있다면
내가 가진 욕망으로
나의 것을 이루기 위해서
나를 부정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강제로 부정시켜버리는
그런 추악한 짓들을
감히 저지를 수 없습니다.
모든 건 예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이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 이외에도
우리 청소년들은 친구들과
정말 많이 갈등하죠?
갈등이 생기는 이유도
우리가 예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세워져있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예수님을 닮아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애를 쓴다면
그것이 갈등을 가장 지혜롭게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친구들하고 갈등이 생겼을때,
그 문제로 예수님께 기도하며
예수님의 마음을 주시길 기도하기보다는
내가 억울한 것, 나의 마음상태가
흐트러지지 않기 위해서
상대방의 잘못을 찾죠.
이것이 사실 자기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를, 그리고 세상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하라,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서로 희생하고 헌신하며 사랑하라,
나를 따라오너라.
그것이 바로 너희 자신을 얻는 길이다.
너희 자신을 빼앗기지 않고 싶다면,
너희들의 삶이 회복되기를 소망한다면,
나의 유익을 위한, 나를 위한 것을 내려놓아라.
그것이 너희 자신을 얻는 길이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모든 인류의 운명은
예수님과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인류가 가진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사회적인 제도로써,
사상이나 가치관으로써 해결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예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를
뿌리부터 뜯어내어 고쳐주실
우리의 영혼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의 질문 앞에 서야 합니다.
“너희들에게 나는 어떤 의미니? 존재니?”
그때 우리가 가진 모든 마음을 다해서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구원자이십니다.
어그러지고 비뚤어질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에
유일한 소망이자 유일한 길이 되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주님을 본 받아서 저도 예수님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살겠습니다.
서로를 아낌없이 사랑하겠습니다. 목숨을 내걸고서라도 사랑하겠습니다.”
물론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항상 조용한 곳에서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자신이 드러나는 삶이 아닌,
자신의 유익과 성취가 드러나는 삶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그 사랑이 드러나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항상 모든 문제 앞에서
내 생각과 내 감정대로 대처하면
나의 유익을 위해서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모든 문제 앞에서 기도부터 함으로써
나 자신을 내려놓고,
서로를 사랑하는 희생과 헌신으로 십자가를 지기를 소망하며,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을 품기를 소망해야합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살아가야할 유일한 이유입니다.
예수님의 질문 앞에 날마다 섭시다.
모든 순간마다 예수님의 질문 앞에 서길 소망합니다.
너희에게 나는 어떤 존재이니?
그 질문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으로
대답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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