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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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위증하지 않는 것은 복음을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이다.
언론인들 사이에서 중요하게 오가는 말이 있습니다. “언론인은 사실과 진실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사실과 진실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사실은 ‘현상’입니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 서술하면 됩니다. 반면 진실은 어떨까요? 일반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는 진실의 정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 ‘사실과 진술이 일치할 때’ 진실이라고 합니다. 즉 진실은 사실을 설명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진실은 물론 객관적 사실을 기반하지만, 사실보다 주관성이 많이 개입됩니다.
천동설을 진실이라고 믿던 시대가 지나고 우린 지동설이 진실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아이작 뉴턴은 중력을 통해 물체가 떨어지는 원리의 “진실”을 밝혀냈습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물체가 떨어지는 원리는 중력이 아니라 시공간의 곡률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또 언제 뒤집힐지 모릅니다. 이처럼 진실은 시대와 패러다임에 따라 변할 수 있습니다.
진실만 가변적일까요? 사실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이제 문과 차례입니다. 역사학자들은 일관되게, 진실은 고사하고 ‘사실’을 완벽하게 밝히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파악하는 역사적인 사료들은 우연에 의해 남겨진 사료들이거나, 선대가 취사선택하여 남긴 사료들입니다. 우리가 접하는 사료가 제한적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유명한 말이 등장했습니다. E. H. 카에 의하면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입니다. 현재의 상황에 따라 과거의 사실들이 달라진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역사를 보는 사람은 역사적 사실에만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설명하려고 하기 때문이죠. 여기에 그 사람의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순간 사실에 대한 객관성을 잃게 됩니다. 사실은 언제나 설명되기 때문에 진실과 얽혀있습니다.
좀더 피부에 와닿는 설명이 있습니다. 같은 한국어를 사용하는데 말이 안통하는 경우가 있죠? 어떤 아내가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서 잠시 아이를 보고 있어달라고 남편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아이를 봤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제게 “왜 아이를 보고만 있어?”라고 물어보는 겁니다. 그래서 남편이 “아이를 보래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내가 어이가 없어서 웃습니다. 제 이야기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그냥 보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 나름대로 아이 옆에서 충분히 놀아줬는데 – 저에겐 사실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 아내가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던 거예요. 이런 비슷한 경험은 여러분도 충분히 있으실 겁니다.
왜 같은 언어를 해도 말이 안통할까요? 인간에게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주관이 개입됩니다. 노자가 이런 말을 했죠.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 도를 도라고 하는 순간 도가 아니고, 이름을 이름이라고 하는 순간 이름이 아닙니다. 말을 하는 순간 객관적인 세계는 왜곡됩니다. 단어에 대한 이해가 사람마다 미묘하게 다르기 때문에 발화자의 의도를 “완벽”하게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소통은 어떻게 할까요? 단지 사회적으로 합의된 규칙과 정의를 통해서 소통하는 것이죠. 또는 정황(context)을 통해서 이해합니다. 이처럼 진실은 고상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가장 세속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인류사를 흩어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은, 인간은 객관적인 사실을 파악할 수도, 파악하더라도 우리의 죄악된 본성이 사실을 “왜곡”하여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진실을 잃어버렸습니다. 거짓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신앙이겠습니까? 여러분의 신앙은 삶에서 객관적인 “사실”로 온전히 드러나나요? 하나님 나라의 사실들을 목격하고 계신가요? 그 사실을 진술하는 사람을 ‘증인’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은, 과연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증인’의 개념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 오늘 말씀 제9계명입니다.
제9계명은 법정이라는 특수한 상황 안에서 이해하셔야 합니다. 당시에는 과학수사도, CCTV도 없었기 때문에, 오직 두 명 이상의 증인의 증언에 의존하여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증인은 그 사건을 직접 목격한 사람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가령 살인이나 간음과 같이 사형을 다투는 중범죄에 대한 재판이라면 증인의 증언 한 마디에 사람의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겁니다. 얼마나 중대한 자리인지 상상이 되시죠? 그래서 위증하면 그 죗값이 무거워서 그 증인이 사형에 처합니다.
그래서 증인의 자리는 내가 사건을 직접 목격한 증인이더라도 쉽게 나서기 매우 부담스러운 자리였습니다. 만일 내가 너무 긴장해서 기억이 왜곡되어서 위증을 하고 나중에 발각된다면 내가 죽게 되었으니까요. 혹여 다른 증인과 이견이 발생하면 위증으로 의심받게 되겠죠.
피고인을 살리기 위해 위증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법적 효력이 발생하기 위해선 다른 증인의 목숨도 걸어야 했으니까요. 반면에 정죄하기 위해서 위증하는 경우는 빈번했습니다. 아니 뗀 굴뚝에 연기나지 않는다고, 소문이 무성하면 그것은 과장되었을지라도 대부분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겠죠. 그래서 비방하는 소문만 듣고 위증하는 경우는 많았습니다. 그 소문이 사실이더라도 내가 그 사건을 직접 목격하지 않으면 위증에 해당되고, 발각되면 사형에 처합니다. 왜 위증하러 나오겠습니까? 피고인을 어떻게든 사형에 처하게 만들고 싶어서 나오는 겁니다. 판결권은 오직 하나님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서 정죄하고 판단하는 겁니다. 즉 자기 의를 위해 주장하는 것이죠. 이게 거짓 증거입니다.
그래서 제9계명은 기본적으로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고 자기 의를 주장하지 말고 할 수 있는 한 원수일지라도 이웃, 특히 피고인의 평판을 보호하라”는 명령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공의는 오직 하나님께 있으니 우리에게는 이웃과의 관계를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성경에서는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예수님께서 이러한 이웃의 모습으로 계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최대한, 언제나,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피고인과 같이 초라한 모습의 예수님을 보호하고 예수님을 높이기 위해 증언하는 증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31절 이하에는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옵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보았다고 증언한 사람은 양일까요, 염소일까요? 염소입니다. 양은 “내가 언제 주님이 옥에 갇히셨을 때 대접했습니까?”(37) 염소는 “내가 언제 주님이 옥에 갇히셨을 때 대접하지 않았습니까?”(44)라고 질문하죠. 하지만 예수님은 염소를 향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염소는 피고인에게 선행을 베풀었지만 자신이 하나님께 잘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염소와 예수님이 동일한 상황을 놓고 서로 다른 진실을 설명합니다. 염소의 위증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훼손시켰고 결국 영원한 심판을 받습니다.
여러분, 모든 사람은 마지막 날에 양과 염소의 법정 앞에 섭니다. 그때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으로 서야 합니다. 증인은 반드시 목격한 사실에 대하여 증언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삶에 드러난 “사실”을 예수님과 동일하게 인식하고 있을까요? 염소처럼, 사실은 예수님을 섬기지 않았는데 예수님을 섬겼다고 고백하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하나님 나라의 “사실들”을 경험하지 못하면서, 매주 주기도문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이루어졌다고 고백하지는 않으신가요? 예수님을 보지 못했는데, 예수님을 본 증인처럼 살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그러면 우리는 마지막 날 천국의 법정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가 ‘위증죄’를 선고받고 영원한 사형에 처하게 될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는 어쩔 수 없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일까요? 이러한 거짓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유일한 진실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5:31절로 가볼까요?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참되다”라 헬라어로 “알레테이아”, 즉 “진실”입니다. 서두에 언급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에서 차용한 용어입니다. 어떤 의미였죠? “사실과 진술이 일치하는 것”이 진실(알레테이아)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이 진실이 아니다. 거짓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기억하십시오. 내 자신을 위한 것은 진실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사실일지라도요. 이것이 위증(거짓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진실은 이것입니다. 32절입니다.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 무엇이 진실이냐면, 예수님을 위한 하나님의 증언입니다. 하나님의 증언만이 진실입니다. 이건 이렇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거하시면, 우리를 증언하시는 하나님의 증언만이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타락했기 때문에, 인류의 역사가 증명했듯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진술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애초에 진실된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보시고 우리를 증인이라고 증언하시면 우리는 진실된 증인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실된 증인으로서 거듭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증언을 알아야겠죠. 이걸 아주 명확하게 표현하는 성경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예수님이 증언하시는 이것들이 무엇일까요? 이건 계시록의 배경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20장 4절을 볼까요?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 사도 요한이 본 겁니다 –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예수를 증언하는 증인들이 나타납니다. 예수를 증언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면 예수를 증언한 것 때문에 목 베임 당한 자들입니다. 이것이 참된 증인입니다. 계시록이 기록된 시기는 전무후무한 기독교 박해가 이루어진 AD 95년 경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벌거벗은 채로 맹수들의 밥이 되었습니다. 불로 태워서 그리스 신들에게 제물로 바치기도 합니다. 끊는 물에 산 채로 집어 넣기도 했습니다. 목을 베고 공중에 걸어 놓기도 했습니다. 내 동역자들이, 집사님들이, 목사님들이 죽어나갑니다. 가족을 인질삼아 지하교회의 위치를 누설하게 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교회들이 와해됩니다. 자신들의 위치를 누설했다며 서로 원망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신앙생활하는 것이 너무나 외롭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위증’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이 고민했을지 상상이 되세요? 신앙생활이 정말 가치가 있는 것일까? 내 목숨을 내놓을만큼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이게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숨보다 소중한 일인가? 이런 합리적인 생각들로 가득 찼을 겁니다. 어디에 하나님 나라가 보이나요? 믿음 때문에 죽어야 하는 현실 뿐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유일한 진실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 십자가의 길, 고난 받는 삶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증언하시는 내용입니다. 여기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진실된 증인된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더 이상 위증하지 않고 예수님을 시인하도록 용기를 주시고 위로해 주시기 위해서 계시록의 환상을 요한에게 주셨습니다. 너희가 예수를 믿어야 하는 이유, 예수를 부인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 일인지, 예수 그리스도가 도대체 어떤 분이신지, 이러한 소망을 통해서 위로하고 계십니다.
“로마가 승리한 것 같지? 하지만 너희가 승리했어. 악한 세력은 이미 결박당해 있단다. 너희를 박해하는 세력은 이미 내가 심판을 했어. 그리고 내가 너희를 위한 상급을 예비해 놓았어. 하나님 나라는 이미 완성되어 있단다. 너희가 죽는다고 하나님 나라가 늦게 오는 것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렴. 너희는 이미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고 있어. 너희가 더 눈물 흘리지 않도록 내가 속히 갈게.”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소망입니다. 이것 때문에 복음이 복음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위증하지 않는 힘입니다. 이미 나를 위한 하나님 나라가 예비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어떠한 시험이나 역경도 성령의 능력으로 이길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복음의 결론입니다.
복음을 위해 희생하는 삶이 없다면 복음은 진실이 아닌 위증이 됩니다. 그냥 하나의 철학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실들”을 경험하지 못하고 계신가요? 그래서 우리가 위증과 위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은혜가 보이지 않고, 오히려 박해가 심해진다면, 역설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사실들을 목격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거기서 세상에 편승하면 위증이 되는 것이요, 그러한 외로움 속에서도 믿음으로 분투하고 계시다면 예수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본래 외로운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저와 여러분이 위증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날마다 복음의 소망으로 우리를 말씀을 통해 위로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미 세상에 승리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위증으로 인해 십자가에 못박히셨지만 그것이 곧 승리의 상징이 되었던 것처럼, 세상의 위증으로 인해 우리의 믿음이 핍박받고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참된 진실된 증인으로 살아가게 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원더교회 교사 여러분, 에베소서 5장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우리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진술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늘 위증합니다. 우리의 믿음에 대하여는 더욱 더 위증하며 살아갑니다. 우리의 믿음의 많은 부분을 세상과 타협하며 삽니다. 하지만 예수님에 대하여 세 번 위증한 베드로가 부활의 소망을 경험하고 복음을 위해 고난 받는 삶으로 거듭난 것처럼, 오직 복음의 빛 아래 거할 때에만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여기시는 진실, 곧 복음을 위해 고난 받는 삶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세상에서 홀로 험난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를 위로하시고 상급을 예비하신 복음의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 은혜가 복음을 위하여 희생하는 삶으로 거듭나게 합니다. 그럴 때 주께서 우리의 신앙을 증언하십니다. 우리의 목 베임을, 우리의 핍박 당하는 삶을 예수에 대한 증언으로 여기십니다.
나를 위해서 살았던 모든 위증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진정한 이웃되시는 예수님을 위해 고난 받고 헌신하는 삶으로 거듭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