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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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은 누구신가? 시편 기자는 ‘우리의 피난처’, ‘힘’, ‘큰 도움’ 이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2-3절에 ‘그렇기 때문에’ 이러저러한 환난 속에서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이 시편은 ‘신뢰’를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신뢰는 개인의 믿음을 넘어 믿음의 공동체가 함께 부르고 반응한다. 노래는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힘이 있다. 그래서 많은 철학자, 문학가들은 ‘함께 부를 노래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자주한다. 마치 우리가 ‘아리랑’ 한 소절만 들어도 말할 수 없는 동질감을 교감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각자의 믿음의 분량으로 보인다. 일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함께’ 하도록 하시고 함께 나누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각자가 하나님을 통해 누린 ‘신뢰’를 고백하고 더 풍성하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어려움이 닥칠 때 용기를 얻고 ‘그러하신 하나님’을 의지 할 수 있다. 우리가 자주 부르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웅장한 찬송가도 이 시편 말씀을 기초로 구성된 것이다.
‘하나님의 계심’은 무엇인가? 만물이 하나님을 향한다. 그래서 ‘성소를 기쁘게’한다. 성이 흔들리지 않는다(5)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만물은 상호 내주라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마치 꿀벌이 꽃가루를 날라 주고 꽃은 화려함으로 꿀벌을 유혹하듯 한다. 비록 사자가 사냥을 하는 공포의 존재이나 장난 삼아 죽이거나 나중을 위해 쌓아 두지 않는 ‘딱 자기만의 생존’이다. 이 세계 모두가 완전한 회복을 꿈꾸며 최소한의 상호 내주를 지키며 살아가지만 사람만이 역행한다. ‘피난처’, ‘힘’, ‘큰 도움’이라 말하지만 내일을 위해 오늘을 허비한다. 미래를 향한 꿈으로 오늘 감사의 마음을 놓친다. 마치 ‘너희를 위해 부모가 이렇게까지 수고하는 거다’라고 말하지만 ‘누가 그러랬어 나와 함께 있어 달라는게 그렇게 어려워’라고 동문서답하듯 하지만 얼마나 큰 갈등인지 우리는 안다.
‘만군의 여호와’이신 하나님은 우리와 관계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와 함께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이시다. 그렇게 ‘임마누엘’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인생은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것 같다. 잔잔한 바다에 바람조차 없다면 배는 최고의 평안을 누리지만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다. 거친 파도는 목적지를 벗어나 생각지 못한 곳으로 보내기도 하고 이로 인해 심하게 부서진 배는 어디라도 잠시 머물러야 하는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배는’ 부두에 정박시켜 구경하며 아름다움을 뽐내기 위해 만들었는가? 사람을 싣고 물건을 싣고 거친 파도가 와도 목적지를 향해 가도록 만들었는가? 당연한 질문이라도 엄마의 품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아이의 손짓처럼 무엇인가를 부여잡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늘을 부여잡고, 내 실력을 부여잡고, 떠드는 세상이 더 힘 있어 보인다(6) 그래서 우리는 그 소리에 현혹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이 하신 일을 노래하지 않는다면 세상 흔들리는 소식에 두려워하고 여전히 오늘의 시간을 허비하며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으라는 꿈으로 살지만’ 할 뿐이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와서’ 라고 요구한다. 듣는 것 만으로, 아는 것으로 안 된다. ‘와서’ 경험해야 한다. 마치 교향곡을 유튜브로 듣는 것보다 콘서트 홀에서 듣는다고 생각해보라 그 차이는 말로 할 수 없는 것처럼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라고 시편 기자는 자신있게 우리를 초청한다.
다시 하나님은 누구신가? ‘그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9) 지금 세계는 2개의 전쟁을 겪고 있다. 누구도 전쟁을 끝내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전쟁은 짐승으로 변하는 과정이 아니라 악마를 만나는 곳이다. 세계의 지도자들이 나서서 전쟁을 멈추려는 시도는 실패하고 있다. 시편 기자는 이런 속에서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발한다. 앞선 시편에서 기자는 ‘하나님은 왕이시다’라고 했다. 46편에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드러내신다. ‘내가’ 그렇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기도자에게 드러내신다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다시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고 하신다.
우리는 삶에서 절대적 안전을 원한다. 그런 이면에는 무엇을 하든지, 위험한 곳에서 즐거더라도,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가더라도 안전을 원한다. 약자로 안전을 바라는 마음보다는 안전함을 보장 받아 누리고자 하는 마음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가’라고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 됨’을 아는 것은 지식에만 있지 않다. 거친 바다에서 파고를 타고 넘는 키를 붙잡은 선장의 손끝에 전해지는 전율에 있다. 기도하고 바라는 마음은 이루어지심을 믿는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자신이 만든 성으로 하나님을 초청하려고 한다. 그러나 ‘내가’라고 음성을 발하시는 곳으로 신자는 찾아 나서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너희는 가만이 있어’라는 소리를 들을 때 우리의 두려움은 사라지고 안전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