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2장21-40절 (목) 구원의 빛을 본 시므온과 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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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누가복음 2장 21-40절
찬송가 85장 ‘구주를 생각만 해도’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영유아기 시절 모습은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나마 누가복음에는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님과 함께 겪은 몇 가지 사건들이 짧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그 본문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아기 예수님을 위해 어떤 사람들을 통해 일하셨는지 또 그 의미는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할례와 정결예식(21-24절)
마리아와 요셉은 경건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한 순종으로 나아가는 자들이었습니다.
(21-24) 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이 태어나신지 팔 일이 되자 율법의 명령대로 할례를 행하고 천사가 전해준 ‘예수’ 곧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의 이름을 짓습니다. 또한 출산 후 40일이 되어 정결예식을 행하는 날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제사를 드립니다. 무엇하나 어그러지거나 지체함이 없이 신속하고 정확하게 율법의 모든 요구를 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비둘기로 번제를 드린 이유는 하나님께서 어린 양을 잡을 경제적 여유가 없는 자들에게 허락하신 긍휼덕분이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첫 아이를 낳았음에도 그를 위해 어린 양 하나 잡아 하나님께 감사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우리가 만약 사정이 생겨 내 자녀를 누군가의 집에 잠시 맡겨야 하는 상황이 된다면 자녀가 고생하지 않도록 경제적으로 넉넉한 집에 보내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때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말씀에 순종하는 부부를 사용하셨습니다. 비록 그들은 하나님께 새끼 양 한 마리 드릴 수 없어 비둘기로 번제를 드리는 처지였지만 하나님을 경외하여 순종하는 그 신앙의 삶을 통해 아기 예수님이 율법에 순종해야 하는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의무를 다 할 수 있도록 돕는 귀한 하나님의 동역자로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양 한 마리보다 더한 삶의 예배였으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순종의 제사였습니다.
오늘날도 어떤 교우님들은 상황이 어려워 하나님께 충분한 헌금을 드리지 못하고 교회에 큰 기여를 하지 못한다고 스스로 자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가난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리아와 요셉의 가정에 가장 소중한 자신의 아들을 양육하는 사명을 맡기신 하나님을 기억 하십시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외적인 화려함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통해 일하고 계십니다.
시므온의 찬송(25-35절)
정결 예식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마리아와 요셉에게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25-3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이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속하여 위로해주시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특히 그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욕심과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집중하여 기민하게 순종하였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 그에 대한 설명 중에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라는 표현들은 그가 얼마나 성령 하나님의 지배아래 자신을 드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렇게 성령이 충만했던 시므온은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지시를 받았고 오늘 드디어 아기 예수님을 만나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사명을 설명하고 또 예수님의 육적인 어머니로서 그녀가 감내해야 하는 고통을 미리 고지하여 줍니다. 이로서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서 맞이하여 확증하는 사명과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님의 육적부모로서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돕는 귀한 사명을 감당합니다.
그가 29절에 예수님을 만나 처음 하는 고백을 주목해보면 그가 어떤 마음으로 그 말씀의 성취를 기다렸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라고 고백했는데 ‘주재’라는 뜻은 ‘집 주인’이라는 뜻이 담겨 있는 말로서 성전의 집 주인이시며 또한 만유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부르는 고백이고 그 뒤에 고백을 보면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얼마나 자신의 인생에 목표로 삼고 달려왔는지를 알려주는 고백입니다. 죽기 전에 메시아를 보게 하신다는 그 말씀 때문에 그는 우연히 마주치는 한 사람도 허투루 보지 않고 혹여나 자신이 메시아를 보고서 그냥 지나칠 까 긴장하며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성령 하나님의 인도함 가운데 아기 예수님을 만난 뒤에야 자신을 평안히 놓아 주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명을 완수한 자만 느끼는 홀가분함과 평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시므온은 우리가 그 사명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표적을 보여주셨음에도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했던 수많은 사람들에 비해, 시므온은 숨 쉬는 것 밖에는 할 수 없던 아기 예수님을 보고서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 아기가 메시아이심을 알아보고 찬송을 드린 것입니다.
어찌 보면 아기 예수님을 만난 그는 이제 죽음의 문턱 앞에 더 가까이 가게되었는지도 모르지만 그것보다 자신이 죽기 전에 사명을 감당했다는 사실에 더 안도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그가 생명을 잃는 것보다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더 걱정하고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오늘날 현실의 늪에 빠져 사명과 영적 기민함을 잃어버린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시므온의 헌신은 큰 도전이 됩니다. 또한 이 시대에도 시므온과 같은 영적 기민함과 생명보다 사명을 귀하게 여기는 헌신의 마음이 충만한 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일들을 이루어가실 것입니다.
시므온은 찬송을 마친 뒤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사명을 설명하면서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해 세움을 받았고’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표적이란 ‘희생 제물로 바칠 짐승을 보증해주는 표시’라는 의미로도 사용되곤 했습니다. 고로 예수님이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해 세움을 받았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희생 제물로 자신의 아들을 주신 것이며 인간들은 그 사실도 모른 채 예수님을 비방할 것이고 그 모든 것을 지켜보는 마리아의 마음은 마치 칼이 마음을 찌르는 듯 아플 것임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리아의 사명을 보게 됩니다. 동정녀로 아이를 낳으며 사랑하는 남편에게 오해를 받고 고난을 당했는데, 그 이후 받아야 할 고난은 칼로 마음을 찌르는 고통이었습니다.
훗날 마리아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앞에서 어쩌면 유일하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가장 근접한 고통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낳고 기르고 그 죽음 앞에 대면해야 했던 마리아는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명자로서 자녀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자녀를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실 때 우리는 그 길의 방해자가 됩니다. ‘내 자녀는 안 됩니다, 제가 어떻게 키운 자식인줄 아십니까?’ 이는 하나님의 뜻보다 자녀를 사랑하는 내 사욕이 더 크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로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늘 본문의 마리아는 가장 사랑하는 자녀조차 하나님의 것이며 그 자녀를 위탁받은 청지기로서의 바른 자세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합니다.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은 그 자녀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십자가의 자리, 고난의 자리로 나아가려 할 때 우리의 마음은 칼로 찌르는 것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픔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아픔이요, 마리아가 공감했던 아픔임을 기억하고 기꺼이 눈물을 삼키며 축복해 줄 수 있는 부모로 성숙해질 때 우리는 부모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지자 안나와 예수님의 성장(36-40절)
시므온이 찬송과 예언의 말씀을 전하는 사이 안나라는 선지자도 때마침 그곳에 나아와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36-38)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안나는 예측할 수 없는 궤적의 삶을 살아 왔습니다. 사랑하여 결혼했던 남편이 결혼 7년 만에 죽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죽은 이유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안나에게 큰 아픔이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안나는 그 아픔을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승화시켰습니다. 그녀는 팔십사 세가 되었음에도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겼다고 합니다. 누가는 굳이 왜 안나가 젊어서 과부가 된 사실을 기록해 놓았을까요? 이는 그 사건이 그녀의 경건과 따로 뗄 수 없는 관련을 가진 것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녀는 먼저 이 세상을 떠난 남편을 회복될 하나님의 나라에서 만나길 고대하였을 것입니다. 마치 욥이 고난을 당하고 회복될 때에 모든 재산이 2배로 회복되었지만 자녀만큼은 2배가 되지 않고 천국의 자녀의 빈 자리가 남아있던 것처럼 안나는 남편의 자리를 비워두고 그 자리를 하늘 소망으로 채워 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픔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되어 그녀로 하여금 금식의 자리로 기도의 자리로 이끄는 씨앗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부활의 소망되신 예수님을 두 눈으로 목도하며 이 아기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속량을 이루실 메시아이심을 고백하고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안나와 같은 아픔을 가진 교우님들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나보내고 그 상실의 아픔으로 오늘을 견디기 힘들어 하나님께 원망도하고 울기도하며 하루를 보내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안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그녀를 지켜주시고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해주셨던 하나님께서 오늘 상실의 아픔의 자리에 있는 교우님들과 함께 하고 계심을 신뢰 하십시다. 그 아픔은 변하여 소망이 되고 그 소망은 헛되이 사라지지 아니하고 반드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만남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어 39절에서 40절에는 예수님의 성장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39-40) 주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예수님께서 자라시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었다는 것은 육체적, 정신적, 영적 성장이 골고루 건강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마리아와 요셉이 부모로서의 수고를 기꺼이 지불하였음을 알려줍니다. 그 부모는 부족한 환경 속에서도 예수님의 성장을 위해 육체적, 정신적, 영적 필요를 채우려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모든 부모는 자녀의 성장을 위해 마리아와 요셉처럼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고 있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40절 본문을 현대어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아기는 날로 건강하고 튼튼하게 자랐으며 지혜가 뛰어났다. 하나님께서 늘 보살피신 까닭이다.’ 우리는 부모로서 자녀가 지적으로 성장하며 육체적 아름다움과 힘이 세지는 것을 보는 기쁨을 누립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주신 큰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도가 지나쳐 마치 자녀의 성장이 내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자녀가 무탈히 잘 자라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늘 보살피신 까닭입니다. 이는 반대의 경우에도 동일한 믿음의 고백이 필요 합니다. 내 자녀가 내 기대와 다르게 자라가고 일반적 기준으로 볼 때 잘 성장하지 않는 것 같고 때로 아프더라도 아주 낙심하지 말아야 함은 여전히 그 아이의 참 부모 되신 하나님께서 그 자녀를 나와 함께 보살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독박육아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과 함께하는 공동육아임을 기억하며 늘 보살피시는 하나님께 감사로 나아가십시다.
오늘 우리는 아기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기르시고 메시아이심을 확증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4명의 사람들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죽기 전 메시아를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붙들고 늘 영적 긴장감속에 살며 자신의 죽음보다 사명감당한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아기 예수님을 만나 증거 했던 시므온, 남편을 잃어버린 아픔을 하늘소망으로 채우며 금식과 기도의 자리를 지키고 생명의 주로 오신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증거 했던 안나, 가난한 환경에서 메시아로 보내주신 아들을 건강하게 키우기 위해 헌신하였던 요셉, 그렇게 애지중지 키웠던 아들이 사람들의 비방 속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했던 마리아 모두 하나님 앞에 귀한 사명자로 경주를 완주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복음증거의 사명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 삶의 아픔을 소망의 노래로 승화시킬 기도자로, 하나님께 받은 귀한 자녀를 사명자로 키울 부모로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기꺼이 낮춤과 섬김의 자리로 나아가는 주님의 사람들이 되십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서 기적을 이루어 가시는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목도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늙어서 죽음을 앞 둔 한 노인을 통해서도, 남편을 보내고 슬픔에 잠겼던 한 여인을 통해서도, 가난하여 새끼 양 한 마리조차 주님께 드릴 수 없었던 가난한 부모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일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동일한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의 나이와 아픔과 가난도 우리가 주께 받은 사명을 막을 수 없음을 기억하고 맡겨주신 사명을 위해 달려갈 수 있도록 힘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