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은총의 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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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일반은총이 하나님 나라의 증거다.
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14~16세기 경 중세신학에서 유행했던 신학적인 담론이 있었습니다. ‘신존재증명’이라는 신학 담론입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시도했던 이론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인간의 편협한 지식으로 증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어쩌면 교만한 시도일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여전히 오늘날에도 비판을 받고 있지만, 그럼에도 ‘신존재증명’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부분적인 유익이 있습니다.
신존재증명에서 크게 합의된 부분만 언급하자면 4가지로 정리됩니다. 존재론적, 우주론적, 도덕론적, 목적론적 논증으로 나뉩니다. 존재론적 논증은, “완전한 존재는 반드시 존재해야만 한다”, 우주론적 논증은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 따라서 최초의 원인이 존재한다.” 도덕론적은 “하나님이 없이는 객관적인 도덕이 성립될 수 없다”, 목적론적은 “우주는 특별한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 따라서 설계자가 우주를 디자인했다.”는 이론입니다. 이러한 변론으로 하나님을 완벽하게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나 이 이론 덕분에 오늘날에는 적어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비합리적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공헌이 있습니다.
제가 왜 이런 사변적인 내용을 말씀드릴까요? 우리는 끊임없이 신앙과 현실의 모순에 부딪힙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존재나 성품에 대해서 회의하기도 하고, 어쩌면 무신론자들보다도 더 나약하게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한탄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하나님을 증명해 보겠다고 했던 다소 교만해 보이는 중세 학자들보다 더 부끄러운 신앙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들은 적어도 이 세상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증거를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신앙은 세상에서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다가 교회로 도피해서 단순히 감정적인 위로를 받기를 원하는 초보적이고 고립적인 태도로 변질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렇게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신앙이 아니라,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증거를 누리는 신앙으로 어떻게 거듭날 수 있을지를 알아보길 원합니다.
우리가 계속 살펴보고 있는 십계명은 하나님과 현실세계가 일치된다는 것을 완벽하게 증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 자체가 그렇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고, 율법 자체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보통 십계명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을 주신 이유는 단순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이 아닙니다. 이걸 포함하지만 이걸 뛰어넘습니다. “이웃 사랑” 계명을 주신 이유는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과 현실세계가 일치된다는 것을 이스라엘에게 증거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위에만 계셔서 팔짱 끼고 계시는 아니시라는 겁니다. 너희와 함께하고 너희와 함께 일하고 너희를 위해서 모든 세상을 주관하고 있고 하나님 나라가 이땅 가운데에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거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걸 신학적인 용어로 “일반은혜”라고 합니다. 이 정도는 기억하시는 게 좋습니다.
교회 전통에서 은혜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서 설명합니다. 하나는 “특별은혜”이고, 다른 하나는 “일반은혜”입니다. ‘특별은혜’란 말 그대로 특별한 은혜, 즉 구원과 관련된 은혜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누리는 특권,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기쁨과 영생을 누리는 성도의 특권이죠. 쉽죠?
반면 ‘일반은혜’는 쉽게 말해 가뭄에 내리는 단비와도 같습니다. 비는 기독교인, 비기독교인 가리지 않죠. 불특정 다수에게 비가 내립니다. 햇빛도 신자와 불신자 상관없이 비춰주죠. 이처럼 신자와 비신자 모두가 일반적으로 누리는 은혜를 일반은혜라고 합니다. 가령 ‘도덕’도 일반은혜입니다. 기본적인 도덕규범이 없었다면 이 세상은 너무나 혼란스러웠겠죠. 의학이나 과학의 발전도 일반은혜입니다. 덕분에 사람들이 과거보다 건강한 삶을 유지하게 되었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일반은혜를 왜 주셨는지 생각해 보기 위해서는 로마서 1장 20절을 보면 됩니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께서 만물에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보여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일반은혜입니다. 일반적인 세계를 보고도 하나님의 존재의 증거를 부분적이지만 알 수 있다는 거예요. 가령, 도덕이나 윤리가 있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선과 악을 나누는 객관적인 도덕적 가치가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가령 살인이 왜 악하냐고 무신론자한테 물어보면 무신론자는 당연히 ‘살인은 나쁜 거니까’, ‘인간을 해치니까’라고 대답하겠죠. 그러면 ‘살인이 악하다고 누가 정했는데?’라고 물어본다면 대답을 버벅거립니다. 자기도 모르게 초월적인 기준에 호소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죠. 하나님이 안계시다면 히틀러가 와서 ‘난 살인은 선하다고 믿으니까 너를 죽여도 되지?’라고 주장한다면 반대할 명분이 없습니다. 이게 도덕론적 논증이거든요. 그래서 도덕을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이방인들도 알게끔 이런 식으로 만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보여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이와 같은 일반은혜를 주신 이유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들을 구원하고 싶으신 은혜와 자비를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한다면 그들이 핑계할 수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들은 분명 하나님의 신성을 보았기 때문이죠.
따라서 하나님께서 일반은혜를 주신 이유를 정리하자면 이방인들을 ‘구제’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나아가 궁핍한 이방인, 가난한 이방인이 있다면 교회의 선행을 통해 그들의 삶을 구제하기 위해서 일반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웃사랑’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계명을 잘 실천할 때 이방인들에게 본이 될 것이고 하나님 나라의 증거를 이방인들이 부분적으로나마 보게 되는 은혜가 있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도덕을 넘어 하나님 나라의 증거로 보아야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 제5계명은 일반은혜에서 가장 기본적인 규범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말씀은 ‘효도’의 의미도 있지만 이를 뛰어넘어서 “하나님 나라를 유지하기 위한, 확장하기 위한” 기본적인 계명입니다.
본문을 보시면, 한국어 성경에는 ‘부모’라고 되어 있지만, 원어에는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부모’는 호칭이 아닙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호칭이죠. 이는 ‘관계성’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즉 육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포함하여, 아버지나 어머니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공경해야 한다는 겁니다. 가령 학교에서는 스승이 아버지나 어머니 역할을 감당합니다. 국가의 제도에서는 정부가 아버지나 어머니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국가 안보와 치안을 지키는 것을 아버지에 비유한다면 복지정책은 어머니의 역할로 비유할 수 있겠죠. 그래서 베드로전서 2: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를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물론 ‘주를 위하여’라는 단서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 안에서 순종’하는 것을 ‘공경’이라는 단어로 치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경이란 히브리어로 ‘무겁게 여기다’, ‘귀담아 듣는다’라는 의미입니다. 주님 안에서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순종을 요구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이러한 계명을 주신 이유는 일반은혜의 기본이 바로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십계명을 가장 먼저 배웠던 사람들은 족장들이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남성의 6-70대 이상의 남성들이었을 거예요. 이 사람들의 부모님은 더 연로했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말을 경히 여기기가 쉬웠습니다. 이걸 고려하여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연로한 부모는 비록 힘은 없을지라도 일평생 살아온 지혜가 있습니다. 그런 부모의 말씀을 경청할 때 내 자녀도 자신을 본받고 자신을 공경하겠죠. 이 모습을 자녀의 자녀가 본받아서 이러한 선한 문화가 이어지다 보면 일반은혜가 지속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로 하나님께서 ‘네 생명이 길리라’라고 명하신 겁니다. 이는 ‘장수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서 ‘생명’은 히브리어로 ‘날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가 창세기 1장에서 천지창조 기사에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이루어진 날, 단순히 물리적인 날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구성되는 날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이 길어진다는 의미예요. 최소한의 질서,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그리고 주 안에서 국가의 제도에 최대한 순응하면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일반은혜가 천대까지 이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이 질서를 존중하는 신앙의 태도가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기여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분쟁지역에서 40년간 저널리스트로 활동한 로버트 카플란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리 잔인한 정권이라도 무질서보다 낫다” 정부가 아무리 야만적이라도 그것을 함부로 전복시키려는 시도는 더 잔인하고 무질서한 무정부상태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경고이죠. 야만적인 정부를 비판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질서가 유지되는 가운데서 변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죠.
이와 같은 본을 보인 사람들이 우리 교회사에 많습니다. 가장 영향력이 있는 종교개혁가 존 칼빈이 개신교인들을 박해하던 프랑수아 1세 왕에게 보낸 헌사가 있습니다. 개신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편지를 보냈는데, 이러한 표현이 나옵니다. “지극히 훌륭하신 폐하시여! 영광스러운 폐하이시여! 무적의 폐하이시여! 우리의 탄원에 폐하께서 귀를 기울일 마음이 있기를 원합니다!” 자신의 동료들을 죽인 왕입니다. 칼빈의 마음이 얼마나 부대꼈을지 상상이 되시나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왕을 최대한 높이는 것이죠. 이것이 신앙입니다.
믿음대로 어떻게 살까 고민들을 많이 하지만, 시작은 간단합니다. 질서와 도덕과 상식을 지키면 됩니다. 그런데 이게 너무 어렵죠. 마음에 안드는 상사를 만나면 정말 뒷담화를 너무 많이 하고 싶어지죠. 여러분, 윤리적인 차원에서 머물면 안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있다면 눈을 들어 만물을 보라는 거죠. 자연법칙대로, 도덕법칙대로, 질서대로 흘러가는 만물에 심겨놓으신 하나님의 신성을 보라는 겁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반은혜를 잘 지키고 보수하면 하나님 나라를 향유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질서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일반은혜, 하나님 나라를 부분적으로나마 맛볼 수 있는 겁니다. 이 질서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나마 형통한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이 질서가 있기 때문에 복음이 전파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 사도들과 성도들의 질서를 통해서 복음이 열방에 전파되었습니다. 부모와 스승과 권세자들을 공경하라는 도덕법칙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증거를 보여줄 수 있는 겁니다. 마음에 부대낌을 이겨내고, 내 눈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이 보여도,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하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권세자를 주님 안에서 공경한다면, 그곳에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이를 보고 돌아오도록 하나님께서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나라와 백성의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예화를 하나 하고 마치겠습니다. TMI일 수 있는데 제가 19살 때 아버지가 지병으로 작고하시고, 한참 방황하다가 하나님 잘못 만나고 회심해서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보통 사역하면 오늘처럼 정장을 입죠. 그런데 하루는 아버지 유품인 넥타이 핀을 잃어버린 겁니다. 그때 어머니가 서운해서 우시더라고요. 항상 강한 어머니이셨는데, 우시는 모습을 너무 오랜만에 봐서 당황했었습니다. 그때 혼자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왜 우셨을까. 아하, 아버지의 모습을 나에게서 보고 싶으셨던 것은 아닐까. 항상 그런 이야기 했었거든요. 저는 국에다가 밥을 잘 말아먹지 않는데, 어쩜 너희 아빠를 닮았냐, 제가 화를 잘 못내는 성격이라서 밖에서 많이 당하고 오면, 어쩜 아빠를 똑 닮았냐, 이러셨습니다. 이런 말씀들이 오버랩 되면서 넥타이핀을 하고 다니는 제 모습을 보면 아버지 닮은 모습을 보고싶으신 것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사랑하는 드림교회 교사 여러분. 부모와 자식은 닮게 되어 있습니다. 닮고 싶어합니다. 스승과 제자도 닮아갑니다. 국가와 국민은요? 알렉시 드 토크빌이라는 19세기 프랑스 정치학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유는 도덕성 없이 누릴 수 없고, 도덕성은 신앙 없이 세워질 수 없다". 정부는 국민 개개인의 수준을 반영한다고 하죠. 국민 개개인들의 신앙이 바로 서면 나라와 민족도 변화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고싶어 합니다. 이것은 질서라는 일반은혜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구조입니다. 질서가 있기 때문에 창세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져 우리에게 닿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질서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증거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도덕질서와 자연질서가 하나님 나라의 증거라는 사실을 믿고 이를 잘 보호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이방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증거인 도덕질서를 증거하시고, 아이들에게 이런 점을 잘 알려주시면서 오늘 거룩한 주일을 보내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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