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증편향의 위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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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인사말-도입]
할렐루야! 이제 무더위가 지나간 듯 아침 저녁으로 제법 선선합니다 지난주에 함꿈 대청부 여름수련회를 잘 마쳤습니다. 은혜 허락하신 하나님께 박수로 영광 올려 드리겠습니다. 지난 수련회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우리 앞뒤 좌우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합니다” 이렇게 인사로 문안하겠습니다. 말씀을 교독하여 읽겠습니다.
[서론]
오늘은 확증편향의 위험이라는 제목으로 요한복음 7장 말씀을 같이 살펴 보고자 합니다. 확증 편향의 사전적 의미는 자신의 가치관이나 기존의 신념 혹은 판단 따위와 부합하는 정보에만 주목하고 그 외의 정보는 무시하는 사고방식과 태도를 말합니다. 유사어로는 ‘불완전 근거의 오류’라고도 합니다. 이는 어떤 전제와 결과에 있어서 전제의 오류를 지적했는데 결과를 포함한 전체의 오류를 지적한 것으로 받아 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편견과 선입견이 확증 편향의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전 이찬수 목사님 설교에 보면 두 마리 견을 조심해야 한다고 들은 기억이 납니다. 우리도 조심합시다^^
창세기를 1장을 보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창조세계는 인간의 타락전까지 아름답고 완전하게 창조되었고 보존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반역, 즉,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타락으로 세상이 어긋나 버렸습 니다. 그 결과 인간에게 가장 크게 타격을 받은 것은 ‘참된 지식의 결여’ 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부분적이고 불완전하게 됩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면서 누리던 임재의 축복이 사라져 더 이상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알지를 못합니다.그러다 보니 자신에 대하여 아는 지식 또한 불완전하고 부분적 지식이 되어 버립니다. 이것이 타락의 치명적 결과입니다. 이뿐 아니라 참된 지식의 결여는 이정도에 그치지 않습니다. 흔히 죄의 길이 내리막길 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길은 갈수록 악화되어 더욱 죄 짓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죄인은 숨쉬듯이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죄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자신에 대한 지식의 결 여를 맛보게 된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르는 자리로 나아가게 되었고 심지 어 자신이 모르는 것조차 다 안다고 착각하는 자리까지 나아갑니다. 이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자리에 선다는 것입니다.오늘 우리가 요한복음 7장을 통해서 살펴 볼 말씀은 완전한 지식을 소유한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불완전한 지식과 파편적이고 부분적이고 일시적이며 변질되기 쉬운 지식을 가진 사람들과의 만남입니다. 이 사람들은 참 빛이요 참 진리이신 예수님을 확증 편향된 시각과 태도로 마주합니다.
[본론]
6장에서는 주님은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참된 음료와 참된 양식이다. 나를 먹고 마시는 자는 내가 그 안에서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그리고 요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결과 요6:66 말씀처럼 “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합니다. 그후로 오늘 본문 요한복음 7장에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다니시며 사역을 하시다 초막절 명절을 맞이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초막절은 7일간 지키는 이스라엘3대명절로 40년 광야 생활을 기억하고 이 땅에서의 삶이 나그네의 삶임을 돌아갈 본향이 있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한 명절입니다. 이때에는 이스라엘의 모든 성인 남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 갑니다. 여기서 예수의 형제들이 등장합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형제들은 모두 하나님의 사역에 부정적인 영향으로 보여집니다. 오늘 7장도 그렇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에게 명절에 유대로 올라가라고 종용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으므로 유대에서 불필요한 마찰을 가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여기서 자신의 때는 십자가를 지시고 인류를 구속하는 구속언약의 실현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육신의 형제들은 예수님을 자신을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관종으로 생각했고 그렇다면 명절에 사람들이 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이 좋겠다는 은밀한 제안을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통한 자기 욕망을 투사하고 있습니다.
확증편향의 위험 첫번째는 자기 욕망의 투사입니다. 유명인의 덕을 보려는 은밀한 욕망입니다. 여러분 유명인 친구, 동창이 있으면 어떻습니까? 은근 자랑하지 않습니까? 그와 친분이 있으면 나도 동격이 된 것 같은 심리적 투사가 생깁니다. 부끄럽지만 저도 제벌 총수의 후배와 연예인등 학벌과 통해 연관된 사람들을 자랑하고 다녔던 적이 있었습니다. 일부는 실제로 만나서 짧게 교류를 나눈 적도 있지만 대부분은 큰 상관이 없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이런 관계는 과장되어 부풀려 전달되는 특징을 가집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투사된 욕망을 받아 주시지 않습니다. 형제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의 형제들입니다. 우리는 이들과 다른 가요? 왜 예수님은 초막절에 형제들만 올려 보내셨는 가요? 예루살렘에서는 5장에서 살펴 보았듯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유대인들이 혈안이 되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자신의 형제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들만 먼저 올려 보낸 면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때가 아직 되지 않았는데 자기 형제들의 손에 팔리는 고초를 당할 필요도 없고 예수님이 어디 있는지 말하라는 유대인들의 고문에 형제들이 배반할 필요도 없습니다.
확증편향의 위험 두번째는 미워하고 화내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살인이라고 특별히 말씀하시지요!, 화내는 사람이 범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본문 요7: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하나님은 악한 것을 악하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악은 자신을 악하다고 한 사람을 미워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우리를 사랑하고 미워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떤신가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빛처럼 살아 가시나요? 그럼 세상이 여러분을 반드시 미워할 것입니다. 요15:18-18말씀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고자 한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는 4계명 ‘안식일에 대한 율법을 어기는 문제입니다. 5장에 보면 예수님이 38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쳐 주십니다. 이 일이 유대인들에게는 용납하기 어렵기도 하지만 그보다 모세의 제자라는 자부심으로 뭉친 바리새인들과 종교 기득권자들에게 너희가 악하고 율법을 잘 못 오해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이 더욱 화근이 되었습니다. 율법을 생명같이 여기고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잘 지킨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에게(실제로는 잘 지키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 주님은 두려워하여 말을 왜 곡하여 돌리거나 피해가시지 않습니다. 7장 본문 21-2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웃긴 것이 아들을 낳으면 8일안에 할례를 받는 모세의 율법을 철저히 지켰는데 반드시 안식일이 한 번 걸리게 됩니다. 이때는 안식일에도 할례를 해도 된다는 예외 조항을 적용합니다. 그런데 안식일에 긴 시간 병으로 고통 받는 백성들을 고쳐 주신 일로 예수님을 정죄하는 것이 과연 율법의 정신과 공의에 합당하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주님의 말씀에 아무 답변도 못합니다. 이때 유대인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반드시 죽여야 자신들의 악함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증편향이 굳어집니다. 그때부터 그들은 프레임을 만들어 의인을 죄인으로 만 들어 버립니다.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7장 20절에 그들이 예수님에게 어떤 프레임을 덮어 씌웠 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 까” 기득권을 가진 자들은 언제나 자신에게 도전하는 자들을 프레임을 씌워서 처결합니다. 안타깝지만 교회나 세상이나 매한가지 입니다. 내로남불의 끝판 왕입니다. 교회 예배 출석을 절대 기준으로 삼고 그날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시간을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너무도 귀한 마음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생명을 구하는 일이 있다면 예배에 나오다가도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예배 출석을 절대시하면 그 정신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제가 부끄러운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는데 제 과거를 이야기하자면 부끄러운 일 밖에 없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 예배출석을 자녀들에게 강조하고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일이 있거 나 여행을 가거나 할 때 온라인 예배를 드리면 된다고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 내로남 불의 모습속에 자녀들은 무엇을 배울까요? 예배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을 소중히 지키라는 저의 말이겠습니까? 나의 사정을 따라 편법으로 예배 드리는 저의 행동일까요? 두말 할 것 없이 후자 입니다. 이것을 타인이 저에게 지적하면 아마도 저는 죽어도 인정하지 않고 매우 화를 낼 겁니다. 그리고 혹 이렇게 욕할지도 모릅니다. 사탄의 자식이라고~^^
확증 편향의 위험 세번째는 두려워 하는 마음을 주는 것입니다. 두려워 하는 마음은 현실을 왜곡하기 쉽고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 합니다. 자기 합리화는 왜곡된 인지 부조화를 말하는데요! 여러분 잘 아시듯이 ‘여우의 신포도’ 비유와 같은 것입니다.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을 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인지하여 자기 욕망의 좌절을 달래는 것입니다. 오늘 7장은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거의 모든 인간 군상들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형제들, 유대인들과 예루살렘 사람들, 대제사장과 그 가솔들, 그리고 무리와 니고데모까지 각각 등장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대척점에 있는 악한 사람들이라면 그 옆에 예루살렘 사람들과 무리가 나오는데 이들은 유대인들을 조롱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의 악한 행실을 부추깁니다. 그리고 유대인들과 종교 지도자 들에게 두려움을 심어 줍니다. 가만히 있으면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이 무너질 것 같은 생각 을 심어 줍니다. 그래서 7:31-32절은 “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예수에 대하여 무리가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아랫 사람들을 보내니”,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무리의 반응에 자신들의 종교적인 권위와 기득권 을 상실 당할 두려움을 느끼고 즉각적으로 행동에 돌입한 것입니다.
확정편향의 위험 네번째는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면서도 강력한 것인데 그것은 바로 편견과 지적 오만입니다. 공자 논어의 위정17편에 보면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든다 하는 것 이것이 곧 아는 것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늘 기억하는 공자의 몇 안되는 말씀인데요~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무엇을 아는지? 무엇을 모르는지를 모르는 것이 인간의 한계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모든것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공부를 하고 알면 알수록 자신이 부족함을 알게 됩니다. 성경을 공부하면 할수록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됩니다. 대부분의 유명한 성경학자들 조차도 성경의 한 부분을 공부할 뿐입니다. 루터의 전집만 해도 책이 450권입니다. 칼빈은 더 많습니다. 그것을 다 읽고 루터를 말하고 칼빈을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일부분을 알고 배우면서 그것을 일반화하는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그 일반화는 조금 알고 있는 지식으로 전체를 알고 있는 지식으로 대체해 버리는 인지부조화 입니다. 확정 편향입니다. 자신이 잘 알고 있다는 편견입니다. 전문가라는 편견입니다.
과학자들은 관찰 실험, 추론을 통해 입증된 것 만을 사실로 인정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추론과 실험설계의 오류는 절대 인정하지 않습니다. 모든 과학적 방법론은 샘플 연구입니다. 그 결과를 가지고 일반화 시킵니다. 그 과학적 방법론을 사용하면 일반화의 오류도 용서가 됩니다. 그래서 또 다른 실험을 통해 다른 결과가 나오면 앞의 진리가 뒤집어 집니다. 과학자들은 이것을 과학의 진보라고 말하지만 진리가 상황에 따라서 바뀌는 문제에 대한 질문에는 어떠한 답도 내놓지 못합니다. 우리가 모른다고 하면 문제되지 않을 것들이 안다고 하여 문제되는 것들로 세상은 가득합니다. 주님이 요9:41에서 맹인과 바리새인에게 가르침을 주시면서 특별히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날때부터 소경된 자를 주님이 고쳐 주신 후에 바리새인들에게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우리의 지식은, 아니 세상의 과학을 비롯한 모든 지식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조금 아는 것을 가지고 모든 것을 해석하고 재단하려는 오류를 품고 있습 니다. 고전8:2에서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이런 속담도 있습니다. “어설픈 사람이 생사람 잡는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 요한복음 7장 25-27절에 보면, 예루살렘 사람들이 권세자들을 비판하면서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어디에서 오는지 모르게 온다고 했는데 이 사람 예수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기에 그리스도가 아니다” 고 말합니다. 이 말이 맞습니까? 그러면 구약 에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들은 무엇인가요? 창3:15 (여인의 후손), 신18:15(모세가 네 형제 중에 나와 같은 선지자), 사11:1‘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미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예수님을 갈릴리 출신으로 거기서 태어난 줄로 예루살렘사람들은 알고 있지만 마태복음에 보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자신의 출신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종교의 중심지이고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용인이나 수원에 대한 부심이 있습니까? 분당우리교회 출신이라는 속마음이 있다면 스스로 경계하셔야 합니다. 요7:52을 보면 어떤 가요?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이들은 심지어 지역감정과 더불어 편견이 묻어나는 말을 서슴치 않고 합니다. 예루살렘 출신은 옳고 훌륭하며 선지자가 나올만 하지만 가난한 갈릴리 에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도 차별하는 나사렛에서 대부분의 삶을 보내셨습니다. 그분은 신적 능력으로 불치병을 고치시고 오병이어로 성인 남자 오천명을 먹이시고 12바구니를 남기셨으며 38년된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 모든 것을 목격하고 그분의 가르침, 로고스 이신 말씀 당신의 말을 듣고 경탄한 자들이 갈릴리에서 선지자가 날 수 없다고 모든 것을 부정하고 귀를 닫고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스스로 모든 것을 알고 내가 선과 악을 판결하고 무엇이 진리인지 분별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이 되려고 하고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곳에는 구원이 머물 곳이 없습니다.
확증편향의 가장 큰 위험은 그곳에는 복음도 구원도 말씀도 머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7장의 예수님의 형제들, 유대인들, 종교지도자들, 예루살렘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받지 못했습니다.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조금 드림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 아버지가 올 해 90이십니다. 그 나이에 매우 건강하신 편이시고요~그런데 건강염려증이 있으시고 이 것이 정신적인 문제로 이어져 발작이 일어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맨탈이 붕괴가 됩니다. 그런 죽음의 공포속에서 심장에 위급할 때 드시는 약이 있는데 그것을 드십니다. 이 약은 심장에 문제가 있을 때 구급약입니다. 평소에 먹으면 오히려 건강에 해롭습니다. 그래서 그 약은 부작용의 위험이 있으니 의사가 먹으면 안된다고 말씀을 드려도 전혀 듣지 않으십니다. 위급하면 그 약을 먹어야 한다는 확증 편향에 굳어진 마음을 누구도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독 일지라도 기어이 마시고야 맙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여러분은 아직 청년의 때입니다. 모 든 일에 나이 든 기성세대보다 마음을 열고 살아가는 미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올 때 믿음으로 그대로 받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취사 선택하여 믿고 있지는 않으세요? 자기 욕망 을 투사하고, 미워하고 분노하면서 두려워 하고, 오만과 지적 오만으로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생 각하지는 않는지요? 내로남불과 ‘l’m ok , your not ok’ 의 태도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 렇다면 여러분은 확증 편향의 위험 가운데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런 확증편향의 모습은 죄성 깊은 우리에게는 언제나 도사리는 위험입니다.
[결론]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큰소리로 서서 외치십니다. 드러내지 않고 행하시길 좋아하시는 주님이 이례적으로 서서 외칩니다. 요7:37-38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 말씀이 7장을 통해 주님이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 입니다. 우리가 확증편향의 위험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자신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목마른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른가요? 우리의 처지를 제대로 안다면 우리는 목마른 자이고 의에 주린 자입니다. 자기 인생의 주인은 자신이고 마음 가는 대로 살라는 이 자아중심의 세계관의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문제입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한 은혜를 얻기 전에는 누구도 타는 목마름과 같은 이 시대의 자아 숭배의 욕망과 갈증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내가 예수를 모태에서부터 믿었는데~ 내가 교회를 언제부터 다녔는데 하면서 교회와 신앙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안다는 생각도 위험 하지만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도 모르는 영적 무지상태에 있는 것도 위험합니다. 전자는 내가 안다고 생각하여 아무것도 안하고 후자는 그냥 무지한 것이 문제라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안에 이런 신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복음을 모르고 예수를 모르고 십자 가를 모르고 자기부인을 모르고 그냥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훈련을 열심히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냥 훈련만 받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서 자기부인의 삶으로 변화 되길 바랍니다. 제자훈련을 받고 리더훈련을 받아도 자기부인의 삶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훈련의 유익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훈련없이 자기부인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나요? 그것은 제가 보기에 지적 오만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목마른 자로 예수 그리스도 앞 으로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오라고 하십니다. 믿는 자는 그 배에 생수의 강, 성령이 충만하게 채워진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흘러 넘쳐서 이웃에게 흘러야 합니다. 내가 채워지지 않고는 우리 이웃을, 주변을 채울 수가 없는 것이 영적 세계의 원리입니다. 오늘 갈급한 마음으로 예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의 영이신 성령으로 충만함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찬양팀 나오시고요!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형제들, 유대인들, 예루살렘 사람들 ,무리들처럼 죄로 인하여 마음이 병들고 상하여 진리를 진리로 받아 들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부분을 전체로 덮고, 분노를 선함으로 가장하고, 온갖 편견과 오만으로 확증편향의 삶을 살아가는 메마른 영혼들입니다. 예수님 앞으로 믿음으로 나아갑시다. 그러면 그분의 우리에게 생수의 강을 우리 안에 넘치도록 부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고치시고 자유하게 하시고 부흥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찬양 하겠습니다. 마음이 상한자를 고치시는 주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