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지 아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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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러분, 3절을 보시면 나오미가 룻에게 조언을 하죠.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보아스 그가 누울 때에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고 합니다.
즉 어두운 야밤에 남자가 자고 있는 이불 밑으로 들어가서 너도 함께 자라는 겁니다. 이러한 나오미의 조언을 오늘날 우리의 관점으로 보면 어떻습니까? 너무나 당황스럽고, 너무나 문란하고 불순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이 당시의 문화와 관점으로 보면 어떻게 해석이 됩니까? 1) 며느리 룻이 시어머니인 나오미의 말에 철저히 순종하고 있는 겁니다.
2) 룻이 보아스에게 대단히 정중하고 겸손하게 청혼하고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2:11절을 보십시오. 룻의 남편이 죽은 후에, 룻이 나오미에게 어떻게 행했는지, 어떻게 섬겨왔는지, 보아스는 이미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죠.
그리고 오늘 본문 11절을 보시면, 보아스가 룻에게 말하기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관점으로 볼 때, 비록 룻이 이방여인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지역과 사회에서 상당히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룻이 나오미의 조언대로 순종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런 생각과 분별도 없이 그저 막무가내로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 그 율법에 대해서 정확한 이해와 분별의 과정을 거친 후에 나온 순종입니다. 왜냐하면 나오미의 조언을 잘 살펴보면,
나오미는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으로 조언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그 율법을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룻이 나오미의 조언대로 순종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과 같은 거죠.
다시 말하자면 지금 룻은 자신과 나오미의 인생에 기업 무를 자인 보아스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 알고 있는 것을 겸손한 마음으로 인정하게 되는데, 바로 그것이 나오미의 조언대로 순종하는 그 모습에 담겨져 있는 거죠.
어떤 면에서 보면 룻이 불의한 이방 여인으로 충분히 고발을 당할 수 있는 그 위험성이 있지만, 이것을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 또는 약속된 말씀을 근거해서, 하나님께 나아가 그 제도대로, 또는 그 말씀대로 이루어주실 것을 요구하는 겁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룻은 보아스의 발치에 눕는 거죠.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정확한 이해와 분별을 했다면, 그 말씀이 정말로 그러하다고 겸손한 마음으로 인정까지 했다면,
이후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말씀을 근거해서 과감하고 적극적인 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 나아가 그 말씀대로 이루어주실 것을 요구하는 모습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날 많은 성도들이 너무나 수동적이고 동시에 모험과 위험이 없는 안전한 신앙생활을 추구하는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자발적적인 모험을 떠나야 합니다. 때로는 스스로의 도전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과감하고 적극적인 믿음이 요구됩니다.
오늘날 기독 청년들에게 가장 큰 유혹이 무엇입니까?
안전이 보장되고 분명한 결과가 보이는 그러한 길로만 가고 싶은 거죠.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인생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안전이 보장되지 않아도, 손에 잡히는 결과가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그것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분별이 되면,
그 말씀이 인도하는 길로 마치 들판에 있는 그 야생동물들처럼, 과감한 도전과 믿음으로 힘껏 뛰어 드는 그 연습과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청년 때부터 신앙의 야성을 키워가야 합니다. 동물원에서 자라난 호랑이를 보십시오. 어떻습니까? 야성이 없습니다. 침체된 모습으로 항상 누워만 있죠.
이렇게 야성이 없는 호랑이는 진짜 호랑이가 아닙니다. 우리도 동일합니다. 여기에 모인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리려면 신앙의 야성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나오미의 조언대로 과감하게 순종하는 룻이 그 야성을 보여주고 있는 거죠. 사랑하는 여러분, 한번 상상을 해보세요. 늦은 저녁 식나에 보아스가 타작마당에 누워서 깊은 잠이 들었습니다.
깊은 잠을 자다가 이리저리 몸부림을 치는데, 발치 쪽에서 뭔가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게 뭐지? 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쳐다보는데, 풀어진 머리카락과 하얀 옷을 입은 한 여인 있는 딱 앉아 있는 거죠.
와... 보아스가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8절을 보세요. 보아스가 놀랬잖아요. 상당히 놀랬을 겁니다. 이어서 9절을 보시면 보아스가 룻에게 “네가 누구냐?”고 하죠.
이때 보아스는 차분하고 침착하게 말하는 걸까요? 아니면 깜짝 놀라서 당황스럽게 말하는 걸까요? 본문의 분위기를 볼 때 당황스럽게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죠.
계속해서 9절을 보시면 룻은 어떻게 대답하고 있습니까?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고 합니다.
여기서 “옷자락”이라고 할 때, 번역이 된 겁니다. 원어에서는 “날개”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2:12절을 보십시오.
보아스가 이삭을 줍는 룻을 처음 만났을 때, 어떤 말을 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날개”라는 단어가 나오죠. 3:9절에 있는 날개와 2:12절에 있는 날개는 같은 날개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제가 해석하는 관점은 2:12절에서 보아스가 말한 축복을 룻이 기억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룻은 보아스가 말했던 축복과 유사한 말을
3:9절에서 할 수 있었다는 거죠.
다시 말하자면 룻이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할 때는 2:12절과 3:9절을 서로 연결된 의미에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두 구절을 연결된 의미에서 해석을 하면 이런 거죠.
“하나님께서는 무익한 저를 그의 날개 아래로 인도하셔서 보호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 보호하심은 당신의 옷자락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저는 이것을 확신합니다. 이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당신의 발치에 눕는 자리까지 왔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당신의 옷자락으로 덮어주십시오”
룻은 보아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다시 9절을 보시면, 확신이 가득한 룻이 보아스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기업을 무를 자이기 때문입니다”고 하죠.
풀어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나와 나의 가정을 다시 회복시켜줄 수 있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보아스 당신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 말씀을 근거해서,
또한 그 말씀을 확신해서,
보아스 당신에게 청혼하고 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발치에 누워 있는 룻을 보아스가 처음 발견했을 때, 너무나 놀라서 상당히 당혹스럽겠죠. 이어서 룻의 청혼을 듣는 순간 보아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너무나 행복하고 기뻤을 겁니다. 비록 어두운 밤에 찾아와서 깜짝 놀라게 했지만, 그 룻을 보면서 너무나 사랑스럽고 귀하게 보였을 겁니다.
왜냐하면 룻은 아직 젊기 때문에 얼마든지 젊은 남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룻은 그렇게 하지 않죠. 오히려 하나님의 율법, 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보아스와 결혼하기를 더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룻이 이렇게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보아스에게 가진 것이 많고 또한 좋은 조건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의 만족과 욕심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룻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과 죽은 남편의 가문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 이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룻이 보아스에게 보여준 모든 모습은 매우 신앙적인 모습입니다. 보아스가 룻의 신앙적인 모습을 볼 때, 얼마나 기특하고 사랑스럽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 분위기가 계속 이 분위기로 가면 좋겠지만, 12절을 보십시오.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친척이라고 해서 아무나 기억을 무를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친척부터 기업을 무를 자가 될 수 있는 그 우선권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관점으로 볼 때, 룻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서 지금여기까지 왔습니다. 하지만 큰 산과 같은 문제를 만나게 된 거죠.
룻은 이 문제를 넘어서야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그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룻이 이 문제 앞에서 “아... 안 되겠구나...”하고 돌아서면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은혜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까?
어느 누구든지 문제가 없는 인생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한다고 해서 인생에 아무런 문제가 없나요? 말씀대로 순종하면 항상 형통과 평안만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도, 때로는 룻처럼 인생의 어려움과 문제를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어려움과 문제를 만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어려움과 문제를 회피하거나, 조급함으로 이해 편법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해서는 신앙의 거룩함과 야성이 자라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때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하는 방법대로 그 어려움과 문제를 해결해 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12절을 보십시오. 보아스가 룻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습니까?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율법과 규정 또는 그 말씀에 따르면,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룻과 결혼할 수 있다는 겁니다. 즉 너무나 사랑스러운 룻이 다른 남자에게 빼앗길 위험이 있는 거죠.
입장을 바꿔서 생각을 해보세요.
마음이 조급해지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인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인 그 율법의 방법보다 인간적인 방법과 편법을 사용하고 싶은 그 욕구가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또는 그 율법의 방법을 회피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이러한 욕구대로 따라간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절대로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하는 그 방법대로 가야만 경험할 수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13절을 보십시오. 보아스가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지면 그 사람의 뜻을 따를 것이고, 만약에 그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을 때는 반드시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지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에 담긴 보아스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인간적인 방법과 편법과 회피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이 제시하는 방법대로 그 모든 절차를 밟아가겠다는 겁니다. 율법의 방법대로 그 모든 절차를 통과하기 전까지는 룻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4:1절부터 보시면,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때,
보아스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기업 무를 자의 우선권이 있는 사람과 성읍에 있는 장로들을 불러 모아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의 방법대로 그 모든 절차를 밟아가게 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14-15절을 보십시오. 룻이 새벽까지 보아스의 발치에 누웠다가 집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보아스는 보리 여섯 되를 주게 됩니다.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자신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거부할 때, 다음 순서인 자신이 반드시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지겠다는 그 약속을 보증하는 의미로서 보리 여섯 되를 준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오미가 룻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또 보아스로부터 보리 여섯 되를 받아 온 것을 보면서, 어떤 말을 하고 있습니까?
18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시어머니가 이르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하루 전만 해도 “보아스의 발치에 누워 있어라”했던 나오미가 이제는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과 최선은 여기까지고 이제 하나님이 일하시는 그 때를 기다리자는 겁니다. 즉 룻과 나오미도 인간적인 방법과 편법은 사용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분별을 하고, 그래서 과감한 믿음과 순종으로 나아갔는데, 마치 이 룻과 나오미처럼 우리의 입장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조급해지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조급함을 버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실지 그것을 사모하고 기대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확신한다면, 그 말씀이 이루어질 때까지, 또한 하나님이 일하시는 때가 올 때까지 마치 룻과 나오미처럼 인내와 오래 참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생생한 간섭과 일하심을 경험하길 원합니다. 그런데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끈질긴 기다림이 없다는 겁니다.
마치 기도하고 나서 눈을 뜨면, 그 즉시 응답이 나타나야 하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죠. 신앙생활은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나 자신이 깨어지고 부서져서 그 말씀으로 정복을 당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떠한 편법이 아닌 말씀의 방법대로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백성으로 변화되어 가는 거죠. 이러한 역사가 가장 많이 나타는 때가 언제입니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볼 때,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은, 결코 시간 낭비를 하는 것이 아니죠.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신 그 말씀대로 반드시 이루어 가실 줄 믿습니다. 우리 함께 말씀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하길 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분별하셨다면, 내 인생에서 하나님이 어떤 놀라운 일을 행하실지 간절하게 사모하며 기대하십시오.
어떠한 편법을 사용하지 말고, 어떠한 회피도 하지 말고, 말씀이 제시하는 방법으로 끝까지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십시오.
뿐만 아니라 그 기다림을 통해서 나의 믿음과 순종을 과감하게 발휘하는 기회로 삼으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신실하게 이루어져 가는 그 은혜의 경험을 마치 두 눈으로 보는 것처럼 아주 생생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은혜의 경험이
저와 여러분에게 가득히 넘쳐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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