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를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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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러분,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을 잃었습니다. 풍족하게 들어갔던 모압에서 다 잃고 비어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 상황에서 나오미는 무슨 소식을 듣게 됩니까?
오늘 본문 앞에 있는 6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나오미가 베들레헴이 있는 유다 땅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또 어떤 일이 생기게 됩니까?
나오미의 두 며느리 오르바와 룻이 따르던 중에 오르바마저도 잃게 됩니다. 나오미가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다시 돌아갈 때, 유일하게 하나 얻어서 가는 것은 며느리 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먼저 집중적으로 살펴볼 것은, 나오미의 상태입니다. 지금 나오미는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영적으로 아주 둔감한 상태에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지금 나오미가 처한 상황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죠. 베들레헴 땅에 흉년이 들었을 때,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모압 땅으로 가서 정착하게 됩니다.
하지만 또 다른 어려움을 만나서 결국에는 베들레헴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데, 이때 동네 사람들은 대부분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금의환향입니다. “우와~ 그때 흉년이 들었을 때, 모압으로 갔다가 돌아온 나오미네! 아주 멋지게 성공했네! 출세했네! 참 부럽다!!”이러한 말을 들을 수 있는 그 정도가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거죠.
좋은 곳에 취업해서, 좋은 옷 입고, 좋은 차 타고, 선물을 양손에 가득히 들고 돌아오는 거죠.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오미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보기에 가장 비참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다른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그 베들레헴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셔서 먹을 양식을 주시는 땅. 그 땅에 나오미가 도착했을 때, 자기 입술로 쏱아져 나오는 말들이 어떤 말들입니까?
동네 사람들이 “이이가 나오미냐?” 하니깐. 20절에서 나오미는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어서 21절에서는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오미의 이름은 “희락” 또는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마라는 무엇입니까? “괴로움”, “쓰라림”, “실패”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나오미의 이름에서 나오는, 즉 하나님의 축복으로 나오는 기쁨과 감격을 다 잃어버리고, 이제는 괴로움과 쓰라림과 실패만 남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잃고 이방 여인 하나만 데리고 온 자신을 가리켜서,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즉 자신을 가리켜서 슬픔과 고통과 불행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면에서 보면, 나오미가 처한 상황과 입장이 충분히 이해됩니다.
이방 땅에서 약 10년 동안 모진 고난과 아픔을 당하고, 그래서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 때, 다 잃고 너무나 비참하고 초라한 자신을 보면서, 또한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서, 멈출 수 없는 눈물이 쏟아지는 상황.
나오미의 이러한 상황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이러한 상황이 되면 대부분이 똑같은 모습을 가지게 될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오미는 모압에서 10년 동안 살았던 삶을 크게 4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20절을 보시면, 첫째로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했다...” 이어서 21절을 보시면 둘째로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다....”
셋째로 “나를 징벌하셨다...” 넷째로 “나를 괴롭게 하셨다....” / 나오미가 모압에 정착해서 10년 동안 살아왔던 삶을 이 4가지로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19절에서 동네 사람들이 “이이가 나오미냐?”할 때, 정말 나오미인지 궁금해서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그런 것이 아니죠.
대부분이 수군거림이 있었을 겁니다. “어쩌다가 저렇게 남편이 죽고, 자식들마저도 다 죽었는가? 혹시 저 이방 여인과 결혼해서 그런게 아닌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해서 저주 받은 것은 아닌가?...”
이러한 수군거림으로 돌아오는 나오미에게 많은 상처를 줬을 수도 있겠죠. 그래서 나오미는 자신 안에 있는 아픔과 눈물과 괴로움이 훨씬 더 커지게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러한 관점으로 볼 때, 나오미가 자신을 가리켜서 기쁨이 아닌 괴로움으로 부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정당해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면, 나오미가 영적으로 참 둔감하고 어리석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나오미의 삶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을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사람은 슬픔과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슬픔과 고통에서 떠나려고 하지만, 지난 과거에 받았던 상처와 경험으로 인해, 여전히 못 떠나고 있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돌보시고 먹이시는 그 약속의 땅에 들어와도 이 나오미처럼 여전히 과거에 매여서 자신의 슬픔과 연민으로부터 전혀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보심으로 잃었던 베들레헴의 위상과 위용을 다시 회복되었지만, 그것을 전혀 누리지 못하는, 그래서 여전히 마라의 상태로 머무는 그러한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지금까지 사역하면서 참 안타까운 것은, 신앙생활을 그렇게 열심히 하면서도 여전히 과거에 매여서 자신을 향한 슬픔과 연민에 빠져있다는 겁니다.
이러한 사람의 특징은, 평소에는 만들어진 미소와 긍정적인 모습으로 노력하지만, 누군가로부터 과거에 받았던 상처와 아픔에 찔림을 받게 되면 자신 스스로가 누를 수 없는 폭발적인 공격과 방어 기질이 나오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오미가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때, 룻도 함께 따라오게 됩니다. 하지만 나오미는 함께 따라온 룻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슬픔과 연민에 빠져 있을 뿐입니다. 20절에서 21절까지를 보십시오. “나를” 또는 “내가”라는 단어가 총 몇 번 나옵니까? 약 8번 정도 나옵니다.
지금 나오미는 자신의 슬픔과 연민에 아주 깊이 빠져서 함께 따라온 룻은 자신의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는 거죠.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게 됩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경험하게 되는 많은 슬픔과 괴로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러한 슬픔과 괴로움만 바라보게 되면,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어떻게 됩니까?
슬픔과 괴로움을 싫어하면서도 그 슬픔과 괴로움에 빠질려고 하는 그 경향성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내 곁에 아무리 귀하고 소중한 것이 있어도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라의 삶을 뛰어넘지 못하는
나약함과 한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오미를 따라온 룻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저 시어머니를 향한 연민으로 따라온 사람이 아닙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과 신앙을 갖춘 사람입니다. 룻은 그 고백과 신앙으로 나오미를 따라온 겁니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볼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늘 하시는 말씀이 있죠. 그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금 룻이 그 말씀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그 고백과 신앙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또 한 가지는 룻의 희생입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자식도 없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르바처럼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면 얼마든지 새롭게 출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룻은 어떤 선택을 합니까? 이방 여인의 며느리로서 나오미를 따라가게 됩니다. 이것은 나오미를 따르면서 겪게 될 모든 대가와 희생과 수고를 감당하겠다는 그 결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하지만 나오미는 어떻습니까?
이러한 룻이 자신의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을 가리켜서 괴로움이라고 부르는 그 나오미의 삶을 변화시키고 회복시키는 통로,
하니님의 축복을 흘러보내는 통로, 뿐만 아니라 일곱 아들보다 더 귀한 며느리라고 불리던 사람, 바로 그 사람이 룻입니다.
좀 더 넓은 의미로는 사사시대에 왕이 없고,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의 소견대로 행하고, 그래서 끝없이 타락하고 어두워져 가는 그 시대적 아픔과 고통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고백과 신앙으로 등장하는 마치 반짝이는 보석과 같은 그러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나오미의 눈에는 이러한 룻이 전혀 보이지 않는 거죠.
사랑하는 여러분, 나오미는 혼자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빈손으로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모압에서 10년 동안 지내면서 내 삶은 완전히 망했다. 완전히 끝났다고 하는 그 순간에 마치 그것이 아니라고 증명하는, 나오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열매인 룻을 바로 곁에 두고도 보지 못하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이방인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열어 보이는 사람이 룻입니다. 이러한 룻을 데리고 온 통로가 나오미입니다.
하지만 나오미는 믿음의 눈을 뜨지 못하고 자신을 마라라 부르고 또한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헛살아온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지금 나오미는 모압에서 아주 크게 출세하고, 그래서 많은 재물과 명예를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
이것보다 더 소중한 룻이 함께 있다는 겁니다. 지금 나오미는 믿음의 눈을 열어서 함께 있는 그 룻을 보아야 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나오미는 마라를 뛰어넘게 되는 거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나의 슬픔과 나의 연민과 나의 열등감에 매이게 되면, 지금 나오미와 같은 똑같은 실망과 좌절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오미가 원망과 불평이 섞인 말들을 쏟아낸 것처럼, 우리도 똑같이 그 말들을 쏟아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고 나타내는 그 룻이 마치 우리 곁에 없는 것처럼, 불신앙적인 생각과 판단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합니까?
22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나오미가 자신의 슬픔과 연민에만 빠져있을 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명하는 룻이 함께 있어도 전혀 보지 못하고 있을 때, 심지어 동네 사람들조차도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그 나오미에게만 관심을 갖고 있을 때,
오늘 이 말씀은 그 나오미가 룻과 함께 돌아왔다는 것에 모든 초점과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오미는 슬픔과 고통의 초점으로 자신의 문제를 바라보고 있지만, 그래서 더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나오미를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오미의 모든 문제를 룻의 초점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자면 룻은 시어머니인 나오미에게 먹을 양식을 갖다 줄 뿐만 아니라, 보아스와 결혼해서 잃어버린 나오미의 기쁨을 다시 회복시켜 줍니다.
더 나아가서 왕이 없어서 백성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 그래서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너무나 심각하게 타락하고 부패한 그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의 참된 왕을 보내어 주시고,
또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그 가문으로 오셔서 온 열방을 향해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게 하는 그 귀한 도구로 쓰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초점으로 나오미의 문제를 바라보면서 일하고 계셨던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오미의 눈에는 룻이 보이지 않습니다.
동네 사람들도 이방 여인인 룻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22절을 보시면 하나님은 그러한 룻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계십니다.
22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여기 자세히 보시면 나오미가 룻과 함께 돌아왔다고 합니다. 나오미는 약속의 땅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룻은 약속의 땅에 처음 들어왔습니다.
그렇다면 나오미가 돌아왔다는 말에 왜 룻도 함께 포함시키고 있습니까? 룻이 비록 이방 여인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왔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의미를 이방여인 룻에게 나오미와 동일하게 부여하셔서 일을 행하시죠.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곁에 있던 나오미도, 주변에 있던 동네 사람들도 아무도 룻에게 어떠한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룻에게 의미를 부여하셔서 놀라운 일을 행하시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즉 가장 연약하고 가장 불행한 룻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
우리의 생각과 전혀 다른 방법으로,
전혀 생각하지 못한 사람을 통해서 일을 행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사람들이 주목할 만큼 눈에 띄고 화려한 일들이 일어나야만, 어떤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그 착각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바로 내 옆에 있는 룻 또는 하나님의 축복이 흘러가고 있는 통로를 전혀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신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믿음의 눈을 열고, 내 옆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흘러 보내고 있는 룻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작고 초라해도,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어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화려한 방법이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의미를 부여하시고 개입하신다면, 얼마든지 놀라운 일들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 옆에 분들과 이렇게 인사를 해봅시다. “당신은 나의 룻입니다. 당신은 축복의 통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을 흘러 보내는 통로가 지금 내 옆에 있어도 나의 슬픔과 연민과 열등감에 빠져 있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라의 삶을 뛰어 넘을 수가 없게 됩니다. 우리가 완전히 실패하고 망한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곁에 룻을 붙여 주신다는 것과 그 룻을 통해서 다시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
이것을 꼭 믿으시길 바랍니다. 계속해서 22절을 보십시오. 나오미가 룻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언제 돌아오게 됩니까?
“보리 추수 시작할 때”라고 합니다. 나오미와 룻에게 가장 큰 변화가 언제 찾아오게 됩니까? 보리 추수가 시작되어서, 룻이 이삭을 주울 때입니다.
룻이 이삭을 줍다가 또 무엇을 줍게 됩니까? 남편을 줍게 됩니다. 그리고 가정을 꾸리면서 놀라운 회복과 변화, 그리고 온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펼쳐가게 됩니다.
이 모든 일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사람들이 주목할 만한 화려한 방법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삭을 줍는 작은 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번 상상을 해보십시오. 남편과 두 아들과 며느리 한 사람을 잃었습니다. 가진 것도 잃었습니다. 완전히 실패하고 망해버렸습니다.
그런데 곁에 있던 며느리 하나가 이삭을 줍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서 모든 것이 회복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므로 제가 여러분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들이 알아 줄만한 화려하고 멋진 일이 내 삶에 나타나지 않아도, 화려하고 멋진 간증이 내게 없어도, 실망하고 좌절하거나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우리는 내 삶에 일어나는 작은 일들을 통해서, 또한 내 곁에 있는 작은 사람들을 통해서 얼마든지 하나님이 놀라운 일을 행하실 수 있다는 그 믿음과 기대와 설렘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매여 있던 마라를 넘어서는 유일한 방법이요 신자의 삶입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한 가지 질문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에 오자마자 풍성한 은혜를 바로 막 부어주시면 좋을 텐데, 하나님은 왜 나오미가 모든 고백을 쏟아내게 한 후에야 은혜와 축복을 부어주시는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완전히 빈손으로 있다가 하나님의 공급을 경험하기 전에, 넘어지고 실패해보기 전에, 마음의 쓰라림으로 하나님 앞에서 모든 고백을 쏟아내기 전에는,
하나님을 향한 살아있는 찬양이 나올 수 없습니다. 눈물의 기도가 나올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섬길 수도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하나님은 나오미에게 은혜를 바로 부어주시지 않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고통과 괴로움이 가득한 모압 땅으로부터 떠난 사람들입니다. 고통과 괴로움이 가득한 그 마라로부터 떠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풍성함이 있고, 영원한 돌봄을 받는 그 약속의 땅으로 옮겨진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모습과 자격에 어울리지 않는 그 약속의 땅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영원한 보살핌과 참된 기쁨이 있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모압의 땅에 있었던 과거에 매여서 여전히 자신을 마라라고 부릅니다. 이미 약속의 땅으로 건너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모압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약속의 땅으로 옮겨진 우리가, 마라를 뛰어 넘지 못해서, 과거에 매여서, 여전히 아픔과 슬픔과 괴로움에 매여 있는 것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마치 나오미처럼 우리가 알든지 모르든지 간에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인도하시며 보살피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과 안식을 반드시 완성시키시고, 또한 영원한 보살핌과 참된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저와 여러분 삶에서 이루어지기를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