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만드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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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러분,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 400년 넘게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그 결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 어떤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는지 잊어가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 곁에서 우상을 섬기는 그 애굽 백성들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각과 먹는 것과 신앙이 애굽 백성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 결과로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 버려서 애굽 백성화 되어가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해서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광야에서 무엇을 배우게 됩니까?
그동안 잊고 있었던 여호와 하나님을 배워가게 됩니다. 또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 정체성도 함께 배워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애굽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복 받기 위해서, 내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섬깁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을 섬기는 세상 모든 사람의 공통점입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에서 하나님을 제대로 배워가기 전까지는 나에게 복 주시는 하나님, 나를 만족시키시는 하나님, 나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 이렇게만 이해하게 됩니다.
사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는 것이 더 편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하다가 조금만 힘들면 다시 애굽으로 가고 싶어 하는 거죠.
우리가 이러한 관점으로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모세를 따라 출애굽을 했겠습니까?
한번 상상을 해보십시오. 애굽의 신들은 우상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참 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애굽 땅에 10가지의 재앙도 내리셨습니다. 그것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저 하나님만 따라가면 노예생활에서 해방하겠다! 앞으로 잘 먹고 잘 살 수 있겠다! 우리 따라 가보자!” 이러한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던져 놓으신 미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미끼에 딱 걸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홍해라는 바다의 문을 걸어 잠그시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는 애굽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막으십니다. 이때부터 하나님께서는 광야라는 학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씩 하나씩 가르쳐 가십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광야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게 됩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는구나...”, “애굽에서 나올 때부터 그 주최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구나...”,
“우리가 지금여기까지 살아서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때문이구나.... 하나님이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고 지키시는구나...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이구나...”
이러한 것들을 배워가는 거죠.
하지만 이렇게 배워가는 과정에서 조금만 힘들고 어려우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반응하게 됩니까? 마치 불량학생들처럼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배움을 거부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거부하고 불순종한 증거물을 담아 놓은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언약궤입니다. 언약궤 안에는 무엇이 담겨져 있습니까?
만나가 담긴 항아리, 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판,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 이 세 가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불순종했던 증거물입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기뻐하고 즐거워했지만, 당장에 먹고 사는 일이 어려우니깐,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평하게 됩니다. 마치 배부르게 잘 먹고 잘 살면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충분하게 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배부를 때나 궁핍할 때나 똑같이 불순종을 합니다.
그래서 언약궤에 담긴 이 만나는 그들의 원망과 불순종을 고발하는 증거물이 됩니다. 또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십계명이 적힌 두 돌판을 주셨습니다. 모세는 그 십계명을 받아서 백성들에게 갔더니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됩니까?
이미 우상을 섬기면서 십계명을 어기고 있었습니다. 화가 난 모세는 첫 번째 두 돌판을 그 우상을 향해 던져서 깨트리게 됩니다.
이어서 모세는 두 번째 두 돌판을 다시 받아오게 되는데, 바로 이 두 번째 두 돌판이 언약궤에 넣게 되죠. 이것도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긴 죄를 고발하는 증거물이 됩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고라의 자손이 모세의 권위에 반항합니다. 그런데 그 반항의 동기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죠. 이때 하나님께서는 각 지파별로 대표자의 지팡이를 가지고 나아오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지팡이들 중에서 아론의 지팡이에만 싹이 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싹난 아론의 지팡이를 언약궤 안에 넣는 것은 백성들의 패역함을 고발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이러한 관점으로 볼 때, 만나가 담긴 항아리, 십계명을 기록한 두 번째 두 돌판, 또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과 불순종과 패역함을 고발하는 그 증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참 은혜로운 것은, 언약궤의 덮개 또는 뚜껑입니다. 이 덮개의 이름을 속죄소라고 하죠. 다시 말하자면 언약궤 안에는 백성들의 죄를 고발하는 증거물이 있습니다.
하지만 속죄소가 그 모든 것을 덮어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속죄소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임재하심, 그래서 백성들의 모든 흠과 허물을 덮어주시는 그 은혜와 긍휼과 사랑이 부어지는 장소를 상징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게 됩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끊임없이 희생되고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정말 말도 안 듣고, 맨날 사고만 치는 그런 아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를 끝까지 품고 가는 것은, 부모의 사랑이 희생될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아이는 부모로부터 버림받을 수밖에 없어요. 자기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와 같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해서 요단강 앞에 서기까지 그들은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그러한 죄인들입니다. 아무런 자격과 조건이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함께 오늘 본문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
즉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말겠다는 그 언약을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지켜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렇게 못난 백성이라도 신실하게 언약을 지키시고, 그들을 결단코 버리시지 않는 사랑.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계속해서 희생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죽어야 마땅한 죄인 중에 죄인입니다. 어디에 내놓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 국가대표급 죄인들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오늘날 우리나 똑같은 죄인들입니다. 이러한 우리가 죄와 죽음과 저주로부터 벗어나고, 그래서 오늘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에게 그만한 자격과 조건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내가 똑똑하고 잘났기 때문에? 아닙니다. 섬김과 봉사로 많은 업적을 쌓았기 때문에? 아닙니다. 오직 단 한 가지! 약속된 말씀을 근거한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끊임없이 희생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1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대로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발을 담그니깐,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됩니까?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양쪽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이어서 17절을 보십시오. 백성들이 요단강을 다 건널 때까지 어떤 땅이었다고 합니까? 마른 땅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원망과 불평과 불순종을 집약해서 넣은 곳이 언약궤입니다. 동시에 이 언약궤를 덮는 속죄소가 그 모든 것을 가려주고 덮어주고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이 언약궤를 매고 요단강에 발을 담그니깐,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됩니까?
빠지면 죽을 수밖에 없는 그 요단강에서 마른 땅으로 걸어갈 수 있는, 약속의 땅으로 건너갈 수 있는, 그 영광스러운 길이 열리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그래서 마치 요단강처럼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이 쪼개지고 갈라졌을 때,
죄인인 우리가 약속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서 하나님과 함께 화목과 영생을 누릴 수 있는, 그 영광스러운 길이 열리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요14:6절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아멘이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요단강 안으로 들어가는 것, 즉 물속으로 들어가는 길은 죽음과 저주의 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죽음과 저주의 길 앞에서 살 길을 열어주시죠.
이 길은 누구에게만 허락됩니까?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그 백성들에게만 허락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나지 않은 사람은, 그 살 길을 찾지 못하도록 막아놓으신 겁니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십자가의 길은 마치 요단강처럼 죽음과 저주의 길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십자가의 길을 너무나 하찮게 여기고 조롱합니다. 나를 망하고 죽게 만드는 길로 여깁니다. 그 결과로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의 길보다 더 넓고 화려한 길을 찾아다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그 믿음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저주와 죽음을 상징하는 십자가의 길, 너무나 좁고 협착한 십자가의 길.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절대로 건널 수 없는 길.
그 길을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으로 보게 됩니다.
십자가의 길을 믿음으로 보니깐 어떻게 달라집니까?
저주와 죽음을 상징하는 그 십자가의 길이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에서 영생을 누리는 길로 아주 선명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십자가의 길을 걷는 우리가 너무나 어리석고 무식하게 보일지라도, 우리는 전혀 부끄럽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10절을 보십시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향하고 있는 약속의 땅 또는 가나안 땅에는 가나안 족속들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면 곧바로 평안과 안식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평안과 안식을 얻기 위해 아주 치열한 전쟁을 해야 합니다.
이것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자면, 이러 거죠. 아담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후에 우리를 포함한 모든 사람은 원래 어둠의 나라에 속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중에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빛의 나라로 옮겨지게 됩니다. 우리가 빛의 나라로 옮겨지게 된 이때부터 어떤 일이 생기게 됩니까?
내 안에서 숨어 있는 가나안 원주민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어둠을 좋아하는 나의 옛 사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내 안에서 아주 치열한 영적인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영적인 전쟁에 입문하는 것이 신앙생활이죠.
우리가 이러한 관점으로 볼 때, 신앙생활을 잘 한다는 것은,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과 싸우고 다투고 시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옛사람과 아주 치열하게 싸우는 겁니다.
내 안에 있는 옛 사람과 싸워 이기는 것. 바로 이것이 신앙생활을 잘 하는 거죠. 사랑하는 여러분, 내 안에 있는 옛 사람과 싸워서 이기면 어떻게 됩니까?
아주 잠시 동안은 평안과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반복적으로 하다가 끝마치게 되면, 영원하고도 참된 그 평안과 안식만 있는 약속된 하나님의 나라로 가게 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에 계시사...”라고 하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에 계신 증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시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들에게 평안과 안식을 주시는 거죠.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게 됩니까?
내 안에 있는 가나안 족속 즉 죄악된 본성를 따르는 그 옛 사람과 싸워서 이기는 것은, 내 힘과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십자가 능력으로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영적인 전쟁을 치열하게 하는 사람은, 나의 무익함과 무능함을 깨닫고 주님 앞에 나아와 간절하게 도움을 구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는 우리가 가야할 죽음과 저주의 길 또는 십자가의 길을 대신 가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살 길까지도 열어주셨습니다. 그 살길을 힘차게 달려갈 수 있도록, 믿음도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나 자신을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십자가의 길에 믿음으로 확 밀어 넣는 겁니다. 그래서 날마다 나를 부인하고, 날마다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께서 가신 길을 끝까지 완주하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영원한 살길을 열어주신 주님께 날마다 감사하며 찬양하는 겁니다.
(4절 찬송)
4절만
주님께서는 아무런 자격과 조건도 없는 무익한 우리를 위해, 영원한 살길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바로 그 길이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뒤를 따라서 그 십자가의 길을 믿음으로 완주하고, 그래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그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