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음 16: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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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은 진리로 인도하신다 / 예수가 거하시는 삶은
지난 이야기를 잠시 타이틀로 정리해볼까요? 1) 떠나지만 영광의 사건이고 끝까지 사랑하는 것 2)내가 곧 길.진리.생명이다. 3)떠나지만 보혜사를 주겠다 4)나는 참 포도나무다. 5)세상이 나를 미워했고 너희도 미워할 것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6)보혜사로 말미암아 너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미움의 대상이 될까하는 내용인데/ 예전에 제사를 드리는 집안에서 예수를 믿으면 제사를 거부하죠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애미 애비도 못 알아 본다고 했습니다. 더 옛날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니 육신의 아버지도 아버지 하나님도 아버지 이렇게 되다보니 촌수가 꼬여 예수 믿는 것들은 위, 아래도 모르는 것들이라고 할 때도 있었습니다. 미움이라는 감정은 시대마다 드러나는 모양을 달랐지만 여전히 감정이 드러났습니다.
요즘은 어떨가요? 제사도 잘 안지내고 각자의 종교도 존중해야 한다는 이유로 표면적으로 드러내 활동합니다. 일부 유튜버는 이슈화 해서 조회수를 늘리기 위해 대놓고 반대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없다. 내가 이렇게 까지 까부는데 왜 가만히 있느냐. 그러니 하나님은 없다는 논리입니다. 또한 의식 있다는 이들도 그리스도인들이 세금을 내지 않는다. 욕심이 더하다는 윤리적인 면을 부각하며 미워합니다. 물론 일부 반성하고 고쳐야 할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보면 그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28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바울의 이 말씀이 얼마나 적절한 표현입니까? ‘그 상실한 마음대로’ 그래서 그들은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리스도인들끼리 즐겁게 지내는 모습이 싫습니다. 아이들도 자기끼로 놀고 있으면 괜스레 훼방을 놓는 모습을 좀좀 보지 않습니까?
우리도 그래서 ‘실족하기 쉽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세상에 같이 살고 같은 눈과 귀를 갖고 있어 동일하게 보고 듣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머리 속에서 걸러내고, 올바로 보고자 하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실족하기 때문입니다. 실족한다는 것은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2절에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즉 쫓아낸다는 의미입니다. 앞서 9장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면’ 이라고 했죠.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자가 예수에 의해 눈이 띄어졌고 그런 사실로 인해 예수를 주로 시인했습니다. 당시 분위기가 바로 출교 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쫓겨남을 경험해본 사람은 이것이 얼마나 치욕스럽고 먹고 살기 막막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그들 스스로 말하기를 ‘하나님 섬기는 일’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같은 공동체에서 자신을 향해 출교하는 등 박해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그렇다해도 주변에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이렇듯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는 이들이 행하는 거짓된 행동 즉 위선에 치를 떨고 있고 그런 이들과 같은 무리에 있는 것을 매우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인간적인 판단으로 말해봐야 서로간에 입장만 확인할 뿐입니다. 그럴 때 4절 ‘기억나게 하려 함’이라고 한 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함께 보낸 시간을 통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떠나는 상황에 대한 제자들의 이해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근심’함으로 인해서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던 것입니다.
마음에 근심이 작동하면 우리의 시야는 좁아 집니다. 두려운 마음이 자신을 삼킨다는 것을 계속해서 자신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며 자신을 좀 먹는 것이죠. 대표적으로 우울증이 그러합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묻는 자가 없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도 그럴 때가 얼마나 많습니다. 혼자서 생각하고 생각하다보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기 속으로만 깊이 들어가는 경험 있습니다. 6절에 ‘마음에 근심이 가득’한 것 상태입니다. 다시 예수님은 말합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야 보혜사가 너희에게 올 것이며 그가 와서 ‘죄’, ‘의’,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부분이 어렵다고 느끼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늘 이야기하시고 보여 주셨던 것이고 그걸 ‘증언’한다고 했던 내용의 정리입니다. 간단하게 살펴보면
. 죄에 대하여 즉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기적을 보이셨고 아버지의 일을 말하였지만 오히려 신성모독으로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3:18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이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할 때 ‘예수 믿지 않으면 죄인이야’라고 하면 설득력이 없겠죠. 그래서 우리가 성경의 말씀을 자세히 알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 의에 대하여라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한다라고 하셨는데 예수를 본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빌립은 예수를 보았지만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역시 ‘예수를 믿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본다라고 말할 때 의미는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신다는 확인입니다. 예를들어, 학교에 간 아이가 숙제한 것을 가지고 오지 못해서 엄마에게 부탁을 했는데 학교에서 보니 저기에서 엄마가 오고 있다면 무엇이 해결되는 것입니까? 엄마와의 관계도 중요하고 엄마라는 사실도 중요하겠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숙제’를 가져 오는 것이잖아요. 엄마가 와서 숙제는 가져오지 않고 ‘사랑한다’라고 하든지 ‘네가 한 말을 잘 몰라서 알아보려고 왔어’라고 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예수님을 보는 순간 ‘아 약속이 지켜졌구나’하는 것을 안다. 즉 의롭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엄마 고마워’라고 하는 관계는 ‘숙제를 가져다 줘서’, ‘엄마가 나를 사랑해서’가 고마운 이유인 것이죠. 이제 눈에 보이셨던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현실은 다시 하나님의 아들로써 영광 받으심과 하신 말씀을 이루시는 또 다른 의로움을 보혜사를 통해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즉 심판에 대하여라는 것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심판에 대한 분명한 선언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앞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의로움 이셨듯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임금에 대한 심판도 분명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생각에 이런 것이 뭐 중요하다고 예수께서 떠나심과 보혜사의 오심이 더 낫다고 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가 자녀에게 더 나은 것을 해주려고 할 때 자녀들은 대부분 지금이 더 좋다고 그럽니다. 하지만 자녀에게 더 좋은 것이 무엇인지는 부모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자녀의 앞길을 부모의 뜻대로 하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더 좋은 것을 주신다는 의미이죠. 마태복음 7:9–11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우리는 세상을 의지하고 세상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 훨씬 좋다고 생각합니다. 돈이 주는 편안함, 가진 것이 없는 것에 비해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기회 등을 말입니다. 예수를 따라온 삶을 가룟 유다처럼 포기합니다. 민수기 14:1–3 “1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2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부모를 따라 나선 아이들이 조금만 힘들면 집에 편하게 있는데 왜 나오자고 했냐며 덥다. 힘들다 하는 건 귀여울 정도입니다. 분명 현실이 힘든 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모진말을 하고 원망을 한다면 특히 교회 공동체가 그럴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예수 믿었는데 왜 이렇게 힘드냐고 불편하는 일이 과연 옳은 일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죠. 이럴 때 세상 임금은 달고 단 사탕을 아이에게 주듯 합니다. 마치 스마트폰을 줘야 울지 않는 아이들에게 어디서나 스마트폰을 줄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죠. 걸국 가족들의 식사는 각자의 모니터에 얼굴을 들이대고 누구와 밥을 먹는지 잊은 채 살고 있는지 오래전입니다. 그래도 약속한 대로 길을 가면서 스마트 폰에 빠져 있지는 않을거야 하는 부모의 일방적 믿음으로 밥 먹을 땐 그저 애교에 불과한 것이죠.
아무튼 죄. 의, 심판은 이미 예수께서 행하셨던 일이자, 말씀이자 보여주셨던 것을 이제 성령께서 다시 우리를 예수가 없는 세상에서 ‘인도하여 주신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없는 말을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겠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사람들은 관심이 없습니다. 아마도 우리 대부분이 그러할 것입니다. 그건 마치 당장 내 앞에 떨어진 급한 일들이나 먹고 사는데 급한 것들에 온통 집중하는 것이죠. 그러다 힘들면 가수 서영은이 부른 노래처럼 ‘힘이 들땐 하늘을 봐 나는 항상 혼자가 아니야’라는 식의 자기 위로만을 되네이는 것이죠. 막상 어려움이 닥치면 어떤 선택이 옳은 선택인지 앞을 볼 수 없고 주저 앉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는 길이 많습니다. 때론 계획되로 되지만 그보단 계획대로 되지 않는 길이 더 많습니다. 무엇보다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나이가 들어 주변에 사람들이 걸어간 길들을 보니 옳은 길인지 그저 자기만 살기 위한 길인지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한낯 인생의 길이 아니라 예수로 인해 펼쳐진 하나님 나라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입니다. 15절에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아들은 아버지의 길을 알았고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그 길을 가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무작정 따르기만 했지 어떠한 길인지는 묻지도 않았습니다. 어느 광고처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은 제자들과의 분리만을 의미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예수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뿔뿔히 흩어지게 됩니다. 마태복음 26:31 “31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16절에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알고 있는 우리는 알고 있지만 지금 제자들은 ‘나를 보지 못하겠고’ 즉 이미 예수를 팔러간 가룟 유다에 의해 예수께서 체포되시고 끌려가 대제사장과 빌라도에게 오가며 결국 십자가에 죽는 현실이 앞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최근 어느 지역에서 건물에 불이 났고 투숙한 젊은 여성이 부모에게 상황을 전달하면서 자신이 죽으면 장례를 하지 말고 자신의 일기장을 모두 태우라고 했다고 합니다.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사회적인 시스템이 아직도 여기에 머물러 있구나 싶었습니다. 길을 걸으며 핸드폰을 보느라 고개를 숙이고 앞을 보지 않는 좀비같은 모습이라고 스몸비족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위해 횡단보다에는 파란색과 빨간색이 들어오는 블록을 설치할 정도의 나라이지만 이태원 참사나 오송 지하차도 그리고 아리셀 전지 공장의 참사가 있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그런 아픔을 생각하며 그 여성은 왜 그런 말을 남겼을까요? 물어보나 마나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할 부모님 때문이죠. 세월호 참사는 아이들이 전화로 당시의 상황을 즐기기도 하면서 웃고 넘길 정도로 통화했던 기록들이 많이 남겨졌습니다. 그후 우리나라는 참사의 트라우마로 그런 상황에서 죽을 수 있다는 사실로 인해 살아남을 가능성보다는 오히려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세상으로 바뀌었습니다. 부모의 눈물을 자신의 죽음보다 더 걱정하는 상황이죠.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부모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남겨진 부모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장례식을 치루지 말 것과 자신의 일기장을 태워 줄’것을 유언으로 남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처참한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유언처럼 남기는 자리입니다. 그런 충격으로 제자들은 대부분 흩어집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갈릴리에 먼저 오셔서 흩어진 제자들을 다시 모으시고 40일을 함께 계시다가 말 그대로 멋지게 구름을 타고 승천을 하시고 이런 장면을 500여 형제가 동시에 목격합니다. 그렇다면 굳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왜 이렇게도 길게 헤어짐을 앞두고 말씀을 하시겠는가 하는 것이죠. 그 이유가 제자이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계약의 관계는 사랑이 없습니다. 스위치를 켜면 불이 들어오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관계는 잠시의 헤어짐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드리워질 근심과 이로인한 두려움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눈 앞에서 잠시 보이지 않을 엄마는 아기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며 안심시키지 않습니까? ‘응 엄마 여기있어’, ‘엄마 멀리 간거 아니야’ 그렇게 아이에게 까꿍 놀이를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한 공간안에 있다는 훈련을 하는 이유가 잠시라도 아이의 불안은 아이 전체에 영향을 주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장하는 아이에게 반드시 까꿍 놀이가 필요하듯 불과 3일의 헤어짐 일지라도 십자가를 지시고 모진 채찍으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죽어서도 땅에 발을 닿지 않게 하는 십자가 형의 처참함 너머의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쩌면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에 응답하고 계시지 않는다 말할 때를 경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께서 그저 감정의 동요로 괜찮다, 괜찮다 하시는 것이 아니라 깨닫게 하시고 이유를 알게 하실 때를 기억할 것입니다. 나를 위한 그 사랑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지나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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