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하지 않은 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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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렘 48:10-13
제목: 평안하지 않은 평안
주제: 평안하지 않은 평안이 하나님 나라의 증거이다.
목적: 세상에 휘둘리지 말고 믿음으로 살도록
제가 전-전 교회에서 청년부 사역을 했었습니다. 100여 명의 성도가 다니는 작은 교회였어요. 그때 청년들이랑 가장 많이 했던 게 뭐였냐면, 볼링이었어요. 예배 끝나고 차 마셨다가 항상 볼링하러 갔죠.
저한테 청년들이 자주 물어봤던 게 뭔지 아세요? “전도사님, 이거 맞아요?”예요. 어디서 뭘 듣고 와서 저한테 물어봐요. “누가 이렇게 말하던데 맞아요?”, “누가 성경을 이렇게 해석하던데 맞아요?”, “누가 교회를 이렇게 비판하던데 맞아요?” 제가 가장 난감했던 질문이 뭐였냐면, “전도사님, 우리 담임목사님이 이렇게 설교하셨는데 맞아요?” 전 어떻게 답했을까요?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비단 이 교회만의 현상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더라고요.
제가 아내한테 청년들의 이런 현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제 아내가 뭐라고 했냐면, “여보, 보통 사람들이 청년들 보면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청년들은 터치를 받고싶어해요. 청년들은 누군가가 기준을 제시하기를 원해요. 차라리 맞다고, 틀리다고 확실히 말해주기를 원해요.”라고 했어요. 왜냐, 너무 쉽게 휘둘리기 때문이죠. <기준이 없는 시대>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우리는 사실 약간의 통제를 받고싶어 합니다. 자유를 박탈하는 강압적인 통제를 말하는 게 아니죠.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는 어떤 기준, 방법, 지식 또는 멘토를 원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게 없으니 우리는 쉽게 휘둘립니다.
특히 우리가 쉽게 휘둘리다는 걸 방증하는 사례가 바로 인문학 열풍이죠. 사람들이 공부를 하고 생각을 깊게 하기 시작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일 수는 있지만, 그렇지 않은 측면도 많습니다. 인문학이 유행인 까닭을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하면 지나친 개인주의사회의 혼란입니다. 개인주의가 심해지면서 이 험난한 세상을 혼자서 이겨내고자 능력을 키우고 나를 방어하기 위해 인간에 대한 지식으로 무장하기 시작한 겁니다. 즉 외로운 사회의 방증인 셈이죠. MBTI 아시죠? 이것도 인문학이에요. 심리학자 칼 융의 이론에서 나온 겁니다. 그리고 사회가 혼란스럽죠.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를 들어보셨죠? 무슨 뜻이냐면, 이런 말 써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개판’이라는 뜻입니다. 기준이 없다는 것이죠. 네오막시즘, 좌파, 극우, LGBTQ, 보수, 진보, 딩크족, 욜로족, 요노족, 니트족, MZ, 모두 이런 사회의 혼란을 방증하는 현상들이에요. 이럴 땐 이게 맞는 것 같고, 저럴 땐 저게 맞는 것 같죠. 그래서 나만의 기준을 찾기 위해 인문학을 탐독하기 시작합니다. 알쓸신잡, 잡학다식, 어쩌다어른, 이런 프로그램들이 바로 이런 청년들과 어른들의 니즈를 간파하고 생겨난 프로그램들이죠.
그런데 인문학과 같은 세상 지식이 정말 우리를 휘둘리지 않게 해줄까요? 저도 인스타 육아스타그램 하지만, 정말 어떤 때는 이 말이 맞는 것 같고 어떤 때는 저 말이 맞는 것 같더군요. 육아는 정보싸움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정말 힘들어서 결국 애는 우리가 키워야 한다는 결론을 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휘둘리는 이유는 정보력이 나의 평안을 이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유튜브 쇼츠 아무 생각 없이 스크롤 내리다 보면 어느 순간 현타오죠? 그게 바로 세상 지식에 의존하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세상이 하라는대로 끌려다니는 봉신 노릇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휘둘리고 끌려다니는 삶을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모압이 이러한 역사를 보여줍니다.
모압이 어떤 나라였냐, 일단 이스라엘과 혈통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가장 가까운 나라였습니다. 이스라엘에게 가장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던 나라죠. 모압은 기회주의였습니다. 이스라엘과 동맹을 맺다가 이스라엘의 뒤통수를 빈번하게 쳤습니다.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모압은 다른 주변 국가들에게도 비슷하게 행동했는데, 특히 열강에게 편승했습니다. 이리저리 휘둘리는 그러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 1차 독자였던 바벨론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하는 겁니다. 바벨론의 삶이 너무나 평안하고 안락하느냐? 모압도 그러했다! 모압도 주변 열강을 힘입어 평안했지만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멸망했다. 너희도 하나님을 떠나 바벨론에 순응하며 산다면 망하게 될 것이다. 이런 경고가 48장의 내용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본문 11절에 나오는 ‘평안’은 긍정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11절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모압은 젊은 시절부터 평안하고 포로도 되지 아니하였으므로 마치 술이 그 찌끼 위에 있고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기지 않음 같아서 그 맛이 남아 있고 냄새가 변하지 아니하였도다
여러분, 여기서 쓰인 ‘평안’이 히브리어로 뭘까요? 우리가 잘 아는 히브리어 중에서 ‘샬롬’이라는 단어가 있지 않습니까? 이게 ‘평안’이라는 뜻인데, 여기서 ‘평안’은 ‘샬롬’이 아닙니다. ‘샤안’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샬롬’은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여기엔 어떤 의미가 있냐면, -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평화, 안전, 복지, 안보의 개념이 있습니다. 어떠한 느낌이 드나요? 국가적입니다. 넓습니다. 즉 어떤 공격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대부분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죠.
하지만 ‘샤안’은 어떠한 평안을 의미하냐면, 전혀 방해를 받고 있지 않는 상태, 조용한 상태, 자칫하다가는 안일해질 수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지만, 부정적인 의미로도 사용합니다. 그런데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할 때는 더 넓고 광범위하고 확실하게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샬롬’이라는 단어가 있기 때문에, 이 ‘샤안’이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딱 4번 사용되었습니다. 그 중에 두 번이 예레미야에 나옵니다.
샬롬과 샤안의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이냐면, 바로 공격하는 대적의 유무입니다. 나를 공격하는 대적이 있는데도 보호받고 평안하면 샬롬입니다. 또한 샬롬에는 ‘복지’라는 개념이 있다고 했죠. 복지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가난한 자, 궁핍한 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회복시키는 복지가 이루어지면서 모든 백성이 화목하게 되는 개념이 바로 샬롬입니다.
하지만 ‘샤안’은 어떨까요? 공격하는 대적이 없습니다. 방해하는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안전과 안보에 신경쓰지 않아도 됩니다. 복지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매우 안일했고 게을렀습니다.
실제로 모압 역사에서 ‘포로 상태’를 경험한 적은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리저리 휘둘리면서 이웃 열강의 봉신 노릇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포로로 잡혀가지 않았습니다. 잡혀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다윗왕국, 또는 오므리와 앗수르의 말을 잘 들었기 때문이죠. 패권이 바뀔 때마다 모압은 신의를 저버리고 항상 패권이 강한 쪽으로 붙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안보와 복지를 이웃 국가들이 지원했습니다.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안보와 복지를 책임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일에 게을렀다고 10절에 나오죠. 이것이 모압의 평안(샤안)입니다.
혹시 이렇게 고난도 없고 박해도 없지만 주변 환경에 의해 휘둘리는 평안을 바라시나요? 우리도 세상의 말을 잘 들으면 어떤 의미에서는 평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압처럼 주체적이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둘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참된 ‘평안’은 ‘샬롬’일까요, ‘샤안’일까요? 당연히 ‘샬롬’이죠.
그런데 여러분, 정말 하나님께 ‘샬롬’을 구하고 계십니까? ‘샬롬’인지, ‘샤안’인지 잘 점검해 보십시오. 나를 대적하고 방해하는 세력이 차라리 없었으면 하는 욕심이 우리 안에 있지는 않습니까? 누군가로부터, 또는 세상으로부터 내 신앙이 방해받지 않고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 않습니까? 또 어떠한 시험에도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를 경험해서 내 믿음이 요새와 같이 안정적인 상태를 우리는 줄곧 ‘샬롬’으로 생각하며 살아오지는 않았을까요? 이게 바로 샤안입니다. 즉 주체적이지 않고 누군가에 봉신 노릇만 하면서 어떠한 압제도 핍박도 고난도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죠. 이걸 성경에서는 히브리서 5:12절에 따르면 갓난아기 신앙과 같다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5장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박해 가운데 있었는데, 이들이 원했던 신앙은 이러한 박해가 없는 젖먹이 신앙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신앙이 모압처럼 “오래 되었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고난 속에서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을지, 이러한 신앙의 깊은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고생한 적이 없습니다. 번뇌하고 고민하고 고난 당한 적이 없습니다.
갓난아기 어떻습니까? 주변 환경과 자신의 어떠한 상태에 쉽게 휘둘리죠. 제가 이제 5개월 된 아들을 키우고 있습니다. 걱정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도 2-3개월까지는 밥 달라고 울면 정말 생명의 위협을 느껴서 우는 진솔함이 느껴졌는데, 지금은 울음소리가 달라졌어요. “빨리 밥 안주세요? 1분 안에 안 주시면 더 크게 울 거에요!” 이렇게 들립니다. 거의 매일 새벽마다 애기띠로 안고 재우는데, 잠들었다 싶어서 침대에 눕히면, 눈이 다시 똘망똘망해져서 아빠인 저한테 “다시 안안아 줄거에요? 이게 끝이에요?” 이런 눈빛을 보내면 아주 영악해 보이기 그지 없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주체적으로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뒤집기를 하고, 기어다니고, 아직은 못걷는데 돌 되면 걷겠죠? 이걸 우리가 뭐라고 표현합니까? “크고 있다”고 표현하죠.
저는 아들이 처음 뒤집기 했을 때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뒤집기 시도할 때 어떤지 아시나요? “끄아아아아! 으이이이이이이이!” 이런 소리를 내면서 뒤집기를 시도합니다. 한 두 시간동안, 쉬지 않고 일주일에 거쳐서, 계속 시도합니다. 아내가 그걸 폰으로 동영상으로 찍었어요! 뒤집기 성공하는 순간 아내는 “눈물이 났다”고 하더라고요.
하나님도 이러한 마음이시지 않을까요?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것을 힘들다고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믿음의 증거이고 믿음이 성장하는 증거이기에 그 십자가의 길을 걷는다면, 우리 그리스도께서도 감동하며 눈물 흘리지 않으실까요?
이게 하나님이 바라시는 샬롬입니다. 시편 4편이 이러한 번뇌와 고난 속에서 피어나는 참된 평안을 잘 나타냅니다. 1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8절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여러분, 고난 속에서, 박해 속에서, 흔들리는 믿음이라도 버리지 않고 붙잡는 것이 진정한 평안입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젖먹이 신앙으로 살아야겠습니까? 치아가 조금 아프더라도 단단한 음식을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장성하게 하시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도록 하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실은 하나님께서 모압을 심판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모압을 봉신의 상태로부터, 샤안의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이러한 ‘봉신’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종’은 ‘봉신’이 아닙니다. ‘종’은 주체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종은 임무를 수행하다가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게 바로 샤안이 아닌, 샬롬의 상태입니다.
샬롬에는 역설적으로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가 있습니다. 샬롬에는 역설적으로 우리를 공격하는 대적이 있습니다. 샬롬에는 역설적으로 불안이 있습니다. 샬롬은 평탄하지 않습니다. 마냥 평안한 것이 아닙니다. 샬롬의 상태는 어떻게 하면 신앙을 지킬 수 있을지 끊임없이 번뇌하고 고민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번뇌를 할 때마다 우리와 동일한 번뇌와 고난과 핍박을 통과하시고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믿음을 갖고 사는 것이 힘드신가요? 평안하지 않으세요? 축복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평안 가운데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지금 평안하지 않다면 그것이 평안으로 향하는 과정이에요. 왜죠? 우리의 신앙이 안정적이기만 했다면,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니다. 저와 여러분이 지금 겪고 있는 여러 문제와 고난이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요새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요새가 아닙니다. 우리는 강한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주님만이 나의 산성이시오, 주님만이 나의 요새이시라는 고백은, 바로 우리의 갈급한 심령과 궁핍한 영혼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시편 42:5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여기서 “어찌하여~”라는 표현은 “너가 어떤 이유로 낙심하고 있니?”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낙심과 불안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제가 그래서 이 말씀을 좋아합니다. 오히려 내가 그 고난을 당했다고, 그래서 대신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말씀하시며 함께 슬퍼하시며 동정하시며 위로하십니다. 두려워하는 연약한 우리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위로를 듣는 거예요. 우리가 늘 불안하기 때문에 불안하지 말라고, 내가 너와 영원히 함께한다고 우리에게 위로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드림샘 청년 여러분,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평안은 낙심과 불안이 없는 샤안이 아니라, 낙심과 불안이 있는 샬롬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살전 5:3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그런데 똑같은 해산의 고통이지만 요한복음에서 어떻게 말씀하는지 들어보세요 16:21절입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여러분, 해산의 고통은 세상에게는 평안(사안)의 결말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해산의 고통이 평안(샬롬)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혼란스러울 때마다 낙심과 불안에서 인위적으로 벗어나려고 하거나 피하지 마세요. 그리고 그걸 믿음의 증거로 붙드세요. “아, 예수님만 붙잡으라는 신호이구나!”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휘둘릴 수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을 때도 있을 거예요. 그러나 순응하지 마세요. 우리가 낙심하고 불안하기 때문에 우리의 위로가 되시는 예수님, 가치관과 세계관의 푯대인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필요로 하는 것이 진정한 평안이자 샬롬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난을 피하는 모압과 같은 갓난 아기의 신앙이 아니라 단단한 음식을 먹는 장성한 신앙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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