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마음
Notes
Transcript
로마서 7장 21-25절 / 찬436장(나 이제 주님의)/24.09.06.
<전체흐름>
서론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세상. 그 중 나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 = 나 자신
나 자신이야 말로 가장 다루기 어렵다.
본론
바울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을 발견
- 선과 악이 함께 있는 것
- 속사람은 하나님을 즐거워 함 <-> 내 지체 = 죄가 사로 잡음
바울은 곤고한 사람이라 선포함 : 순수한 신앙, 거룩함을 추구하려다 작은 점 하나가 크게 보임
- 예) 미스터 선샤인 까마귀한마리가 하늘을 망치다. 장인이 도자기를 깨뜨림
- 성화의 단계로 가려 하나 막상 자신의 육체 속에 있는 흠을 발견
- 누가 건지랴? : 이 세상의 존재는 불가능함
건지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
- 하지만 현실은 마음은 하나님을, 육신은 죄의 밥 아래 있음.
결론
타종 1회 - 오르간 반주
기도
참 좋으신 주님, 오늘 주 앞에 말씀으로 세워 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어제의 은혜의 감격 아래 다시 주의 은혜를 사모하여 이곳에 모인 우리 모두에게 성령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그리하여 주의 뜻을 깨닫고 다시 주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오늘도 인도하실 주님께 감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말씀봉독_롬 7:21-25
로마서 7:21–25 (NKRV)
21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서론
세상을 살아가는 가운데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나의 마음과 생각과는 다르게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할 때 때로는 우리는 속상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합니다.
그 중에 나와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나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나 자신이야 말로 세상의 다른 것보다 더 다루기 어렵지 않은가 싶기도 합니다.
오늘은 우리가 다루기 어려운 우리를 살펴보고, 그러한 우리를 두고 어찌 살아내야 할지 함께 고민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 곳 가운데 가득하여 우리로 하여금 깨닫고 결단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본론
먼저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은 자신이 살아가면서 한가지 현상을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그것을 오늘은 법이라 표현하고 있는데, 먼저 21절에서 23절의 말씀을 우리가 함께 읽겠습니다.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바울은 여기에서 두가지 법, 곧 현상을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잠시 여기서 제가 법을 현상이라 말하는 이유는, 현재 본문 속에서 나타나는 법은 법규와 같이 정해진 율법이라기 보다는 법칙과 같이 정해진 것처럼 동일하게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두가지 현상을 발견하였는데, 그 첫번째는 21절에 나타났듯이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단는 것입니다.
내 속에서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했는데, 그런데 다시 내 속을 들여다 보니 그 선한 마음 옆에 악도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예를들어 내가 새벽 예배를 가고자 했습니다. 하루의 시작을 하나님을 예배하고, 오늘 하루를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기로 마음 먹고 행동하기로 한 것입니다. 선한 행동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 내 속에 다른 마음을 보니, 새벽 예배를 나가는 것을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보이고, 오늘은 누가 나왔고 나오지 않았는지 정죄하려는 마음도 보이고, 막상 움직이려고 보니 귀찮아 하는 마음도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선과 악, 거룩과 부정한 것이 함께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나 유대인이자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에게 있어서 이러한 사고관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끊임 없이 겉으로도 거룩하려고 노력하였고, 심지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자들로 생각하여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도록 감옥에 잡아 넣으려고 했습니다.
그는 흑과 백으로 구분하여 명확하게 선을 따르며 선한 것으로 가득히 채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자신을 되돌아 보니 악한 마음과 선한 마음이 자신 안에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이것은 우리 안에서도 역시나 발견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또 한가지 현상을 발견하였다고 말합니다.
내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데, 도리어 내 지체는 선한 마음으로 채우려는 내 마음과 싸워 죄의 법으로 사로 잡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내 속에 선과 악이 공존하는데, 속사람은 선을, 지체 곧 육신은 악을 추구하며, 육신의 마음인 죄가 도리어 자신을 사로 잡으려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당장 우리를 돌아 보더라도 이러한 현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보통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 중 마음에 싸우기 시작하면 선한 마음이 더 밀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들어 예배하려는 마음보다 한번 쉬고 싶은 마음이 더 크게 느껴지고, 먹는 것을 가려야 하는데 먹고자 하는 마음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탐욕, 거짓, 이기심, 정욕등 대부분의 악한 것들은 우리에게 큰 힘을 지닌 것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그러면 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될까요?
그것은 여전히 우리가 육신 가운데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직 완전한 상태에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주께서 부활체로 우리에게 보이신 것처럼 우리가 육신의 장막을 벗어나 부활로 거듭날 때에 우리는 이러한 결핍속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육신을 지니고 있다면 어쩔 수 없는 결핍을 경험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당장 우리는 먹지 아니하면 아무런 힘을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흙으로부터 왔으니, 당연히 흙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마이너스 상태가 된 것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이 부분은 철학적으로 다루게 될 것 같아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결국 우리는 육신을 지닌 존재이기에, 늘 채워야 하고, 그 채우려는 과정 속에서 육신이 원하는 죄로 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봐도 그렇지만, 이러한 인생은 결국 너무 곤고하며, 끊임 없는 싸움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고 느껴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바로 24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다시말해 그는 그러한 육체에 머무는 인생은 주 앞에 이르는 그날까지 곤고한 존재일 수 밖에 없음을 고백하였습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이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로 어쩔 수 없이 인생은 답이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쉽게 비유를 하자면 도공이 도자기를 만들고 최종적으로 검수를 할 때 작은 흠 하나, 작은 실금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도자기가 아무리 잘 만들어 졌어도 무가치하다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 그리고 성도들로 하여금 거룩하게 되어지기 위해 수 없이 노력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목표는 자신을 포함해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존재가 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온전한 성화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지금처럼 그럼에도 사람은 결국 순백의 무결점 상태, 죄가 완전히 없는 상태에 이를 수 없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죄인지 죄가 아닌지 구분하지 못하며 자기 욕심에 사로잡혀 살다가 괴로움에 빠져서, 인생은 힘들다고 고백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건질 수 있느냐 외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대로 죄가 있는 상태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존재가 아니게 되기 때문입니다.
죄 없는 그 순백의 상태로 누가 만들 수 있느냐 질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25절에서 그 해답을 제시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사망의 몸에서 건지며, 모든 죄를 보혈로 덮으사 드디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존재로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삶을 되돌아 보기 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은혜 속에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혹여 우리가 자기 삶을 살다 지쳐서 인생 참 힘들다고 말하고 있는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히 살아내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가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견된 자신의 죄로 인해 고민하다, 곤고한 인생을 토로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단지 인생이 힘들다 말하는 삶은 원망과 고통에서 머물수 밖에 없지만, 자신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 고민하는 삶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 삶은 바울이 마지막으로 말한 것처럼 내 속에서 여전히 하나님의 법과 육신의 법이 함께 있어 서로가 충돌하는 것을 감당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만일 은혜를 발견하게 된다면, 이러한 충돌 속에서 우리가 육신에게 나를 내어주는 것이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 살아가는 삶으로 만들 것입니다.
결론
우리에게 다시 오늘 하루가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바로 세워 하나님을 따르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 안에 두 마음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두 마음 중 육신의 마음으로 나를 내어준다면 우리는 그 끝에서 소망을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두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자 한다면, 비록 곤고한 인생이라 할지라도, 그 끝에서 영원한 소망과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이러한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어진 하루를 은혜 가운데 잘 감당해 내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언합니다.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 육신의 마음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을 따르며 살 수 있도록.
- 진행중인 희년 부흥회 가운데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임하여질 수 있도록
함께 합심하여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참 좋으신 주님. 우리가 주님을 따르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부지중에, 때로는 더 좋아 보여서 육신의 마음에 우리의 눈길이 향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우리가 그곳에 마음을 두지 않게 하시고,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 세상을, 그리고 주어진 나의 삶을 잘 감당하게 하옵소서. 오늘도 온전히 우리를 인도해 가실 주님께 감사하며,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