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신앙고백, 샬롬
0 ratings
· 10 viewsNotes
Transcript
[서론]
목회자들끼리 비밀리에 종종 나누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처음에 가장 잘해주는 사람을 가장 조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가장 잘해주지만 나중에 그 사람이 돌변하면 가장 고통스러운 존재가 되곤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사랑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가장 힘들게 하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누구일까요?
많은 중년의 아내들이 농담처럼 남편을 그렇게 말하곤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도 가장 큰 기쁨을 주던 대상이 가장 큰 슬픔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수넴 여인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본론]
열왕기하 4장의 수넴 여인은 믿음이 깊고 부유한 사람입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를 잘 대접합니다.
그가 집에 들를 때마다 먹을 것과 쉴 곳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녀는 내면에 감추어진 큰 결핍이 있습니다.
자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자식이 없는 것은 큰 슬픔과 수치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엘리사를 통해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녀는 아들을 낳았고, 그 아이는 그녀의 가정에 큰 기쁨을 주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납니다.
아들이 어느 날 아빠가 추수하는 곳에 갔다가 “아이고 머리야!"라고 외치며 쓰러지고 맙니다.
아빠는 일꾼을 시켜 아들을 엄마에게 맡깁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결국 엄마의 무릎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처음에 기쁨을 주던 아들이, 이제는 깊은 슬픔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수넴 여인의 절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기적적으로 얻은 아들이었기에, 그 상실감은 더 깊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엘리사를 찾아가서 고통과 슬픔을 토로합니다.
28절에서 그녀는 “제가 언제 아이를 달라고 했습니까?"라며 원망합니다.
이 원망은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듯한 깊은 상실의 고통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생에서 가장 큰 고통과 상실의 순간을 떠올리게 됩니다.
저 또한 그런 순간이 있었습니다.
기쁨으로 주어진 것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다시는 되돌릴 수 없을 때, 우리는 절망 속에 빠집니다.
이처럼 죽음은 인생에서 가장 궁극적인 상실과 고통을 안겨줍니다.
유명한 기독교 저자인 맥스 루케이도는 자신의 책에서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세 가지를 언급합니다. 첫째는 허무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가 나오지 않거나, 기대만큼 성취했음에도 마음속 허무함이 남을 때, 우리는 인생의 무의미함을 느낍니다.
둘째는 실수입니다.
정확히는 실수로 인해 찾아오는 후회입니다.
삶에서 우리가 저지른 실수는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후회 속에 인생을 살아가게 만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치명적인 적은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은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며,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과 슬픔을 강요합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무력함과 절망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판왕입니다.
죽음은 인생의 허무와 후회의 궁극적인 끝이며, 누구도 이를 피할 수 없습니다.
수넴 여인에게 닥친 아들의 죽음은 그녀의 인생을 절망 속으로 몰아넣는 가장 큰 시련이었습니다.
그러나 죽음과 절망 속에서 수넴 여인이 보인 믿음의 태도는 놀랍습니다.
아들이 죽은 그 절망적인 순간, 그녀는 통곡하거나 곧바로 장례를 준비하지 않습니다.
대신, 아들의 시신을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머물던 방에 눕힙니다.
장례를 준비하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일 텐데, 왜 그녀는 그렇게 행동했을까요?
그녀는 아들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너무 나이가 많아 자식을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 이 아이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선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이 아들을 살릴 수 있는 분도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그녀의 믿음은 곧바로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수넴 여인은 남편에게 일꾼과 암나귀를 준비해달라고 요청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를 직접 찾아가기 위해서였습니다.
남편은 의아하게 생각하며 "왜 엘리사를 찾아가느냐"고 묻습니다.
보통은 초하루나 안식일에 예언자를 만나러 가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여인은 걱정 말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걱정 말라"는 말은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닙니다.
히브리어로 ‘샬롬’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개역개정에는 ‘평안을 빌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샬롬"은 평범한 인사말이 아닙니다.
샬롬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온전한 평화, 완전한 회복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단어에서도 사용된 이 "샬롬"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완전하고 충만한 평안을 의미합니다.
그녀가 엘리사에게 "샬롬"을 말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온전하게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확신의 표현입니다.
절망 속에서도 그녀는 평안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믿은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인사나 겉치레가 아니라, 죽음의 현실 속에서 드러난 믿음의 고백입니다.
한편, 남편은 아이가 죽은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
만약 수넴 여인이 남편에게 아들이 죽었다고 말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남편은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곧바로 장례 준비를 하려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수넴 여인은 아들의 죽음을 절망적인 최종 상태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아들을 다시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품고, 엘리사를 찾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수넴 여인이 하나님의 기적을 바라며 엘리사를 찾은 믿음은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줍니다.
그러나 이러한 수넴 여인의 믿음을 현대 상황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현대의 경우, 아이의 건강이 위태로울 때 즉시 병원으로 데려가는 것이 최우선이어야 합니다.
기도의 중요성을 결코 간과할 수 없지만, 의학적 치료를 무시하고 오직 기도에만 의지하는 것은 잘못된 선택일 수 있습니다.
병원과 의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치료와 회복을 허락하십니다.
따라서, 물리적 치료는 의사에게 맡기고, 목회자는 기도와 영적 격려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회복의 은혜를 함께 누리게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신앙과 의료는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자원을 균형 있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25절을 보면, 수넴 여인이 엘리사를 찾아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엘리사는 수넴 여인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 그녀가 왜 오는지 모른 채 게하시를 통해 안부를 묻습니다.
그는 그녀의 남편, 자신, 아이에 대해 '별고 없는지', '평안한지' 묻습니다.
이때 수넴 여인은 모든 것에 대해 '별일 없다'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다시 사용된 단어가 바로 **‘샬롬’**입니다.
겉으로만 보면 수넴 여인이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이가 죽었는데 어떻게 샬롬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엘리사가 자신의 상황을 알지 못하는지 시험해보고 있는 것일까요?
수넴 여인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가 "샬롬"이라고 대답한 것은 믿음의 고백입니다.
엘리사는 그녀의 상황을 전혀 모르고 물어본 것이지만, 여인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다시 살리실 것을 믿고 "샬롬"이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인사말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과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녀의 간절함은 엘리사를 만나자마자 드러납니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의 발을 붙잡고 엎드립니다.
그녀의 행동은 얼마나 절박한 심정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엘리사는 그때서야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하나님께서 그녀의 고통을 자신에게 미리 알려주지 않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엘리사에게 이 문제를 미리 알리지 않으셨을까요?
엘리사가 만약 미리 알고, "딱 보면 압니다"라고 말했다면, 하나님의 능력이 더 강하게 드러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엘리사가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미리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엘리사가 하나님께 의존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 엘리사가 모든 상황을 미리 알았다면, 그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의지하는 마음이 약해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사에게 모든 것을 알리기보다,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도록 이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엘리사가 모른다고 해서 수넴 여인의 믿음이 흔들렸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때와 방법으로 일하실 것을 믿기에 엘리사가 모든 것을 미리 알지 못해도 그녀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자신의 뜻에 따라 일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생각이 인간의 생각과 다를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사실은 또 다른 장면에서도 드러납니다.
엘리사는 처음에 게하시와 자신의 지팡이만 보내려 합니다.
수넴 여인의 자식이 이미 죽었음을 알고도 그가 직접 가지 않고 지팡이만 보내려 할까요?
아마도 엘리사는 아이가 죽지 않고 단순히 많이 아픈 상황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하는 지팡이를 보내어 회복을 기대한 것입니다.
지팡이는 하나님의 권능을 상징하는 도구로 구약에서 종종 사용됩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 지팡이를 통해 임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 엘리사는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제서야 직접 가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게 됩니다.
이는 엘리사가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 점진적으로 인도받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굉장히 힘들고 절망적인 일이 일어날 때 우리는 하나님께 묻고 싶어집니다.
“하나님, 왜 저입니까?" 이 질문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이며, 때로는 우리의 인간적인 항의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다윗도 시편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고통을 토로하며 "어찌하여"라는 질문을 여러 번 던집니다.
그러나 그 질문에서 멈추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 질문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그분의 계획과 섭리가 우리의 생각과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하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시야로는 다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한계를 넘어섭니다.
참된 믿음이란 우리가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수넴 여인도 아들의 죽음이라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그 의미를 다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엘리사를 찾아갔습니다.
하나님의 방법과 그분의 타이밍을 기다린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상황을 다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시며 그분의 계획은 언제나 우리를 향한 선한 목적을 이루십니다.
그 선하심은 결국 우리에게 샬롬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깊은 신뢰 관계를 맺는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설명되지 않고, 때로는 이해되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믿음입니다.
수넴 여인도 자신의 상황을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며 나아갑니다.
하나님께서도 결국 그녀에게 샬롬과 회복을 주십니다.
이제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집에 도착합니다.
그는 곧바로 아이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단둘이 있게 됩니다.
엘리사는 죽은 아이의 몸에 자신의 몸을 포갭니다.
하지만 한 번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잠시 심기일전한 후, 다시 한번 아이의 몸에 자신의 몸을 포갭니다.
그러자 아이의 몸에 생명이 돌아오고, 일곱 번 재채기를 한 후 깨어납니다.
죽었던 아이가 다시 살아난 순간입니다.
아이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 아이를 데려가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죽은 아이를 다시 살리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생명과 죽음의 주권자임을 이 사건을 통해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이 기적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엘리사가 두 번이나 몸을 포갠 행동 때문일까요?
아니면 어떤 특별한 주문 때문일까요?
사실 기적을 일으킨 근본적인 원동력은 수넴 여인의 간절한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는 믿음이 바로 이 기적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믿음만으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선지자 엘리사를 통해 역사하신 것입니다.
엘리사가 두 번씩이나 몸을 포갰던 행동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며 기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의 능력이 임했고, 죽은 아이는 다시 생명을 얻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이 이 사건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수넴 여인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능력을 중재한 선지자로서 쓰임받았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이루어진 기적이었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주 우리가 본 말씀의 주제가 교만이었습니다.
교만은 자신을 높이는 것이고, 아하시야 왕은 그 교만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수넴 여인을 통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겸손히 엎드려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 믿음으로 죽음을 이긴 생명을 경험했습니다.
참된 믿음은 교만이 아닌, 겸손한 자의 언어입니다.
오늘 본문을 처음 읽은 이들은 바벨론 포로기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무너지는 절망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죽음조차도 끝이 아님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도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는 끝이 아니라는 소망이 주어졌습니다.
수넴 여인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백성들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의 삶에도 절망적인 순간이 찾아옵니다.
병으로, 경제적 어려움으로, 관계의 단절로 깊은 절망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수넬 여인은 죽음 앞에서도 "샬롬"을 말했습니다.
그녀의 "샬롬"은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생명과 죽음의 주인이심을 믿는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우리는 샬롬을 소망의 언어로 사용해야 합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샬롬이 우리 안에 있다면, 우리는 죽음을 넘어선 부활의 소망을 누릴 수 있습니다.
부활은 우리가 온전한 샬롬을 경험하는 상태입니다.
오늘 본 이야기는 그 부활의 그림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완전한 부활의 샬롬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샬롬은 단지 미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평안은 우리 삶의 절망 가운데 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며 겸손히 그분께 나아갈 때, 그분의 샬롬이 우리의 마음을 채우고,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는 힘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믿음으로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교만을 버리고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과 샬롬을 주실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샬롬을 누리는 우리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