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908 설교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2 views
Notes
Transcript

더 크게 도우시는 하나님

오늘도 함께 모여 주님의 말씀을 듣는 우리 공동체 가운데 주님께서 크신 은혜로 부어주시기를 소망합니다.
다들 한주간 잘 지냈나요? 지난주에는 특별히 9월 모의고사가 있었죠? 다들 시험 치르시느라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물론 시험이란 것이 늘 그렇습니다. 마음에 들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죠.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시험의 결과와 상관없이 주님께서 여러분 곁에 계시다는 사실이겠죠.
지난주에 나눴던 것처럼, 위기의 순간 하나님은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그가 택하신 자들을 크게 도우십니다.
오늘의 말씀에서도 그것을 확인할 수가 있는데요, 오늘의 말씀에서는 여러분들이 읽으셨지만, 전쟁의 장면이 등장을 합니다.
이 전쟁이 왜 벌어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전쟁을 통해 하나님은 또 어떤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전쟁의 시작은 사실 우리가 지난주에 나누었던 말씀 첫구절로부터 시작을 합니다. 혹시 기억하시나요? 어떤 나라가 아합 왕이 죽고 난 이후 북이스라엘로부터 벗어났었죠. 그렇습니다. 바로 모압이라는 나라였어요.
오늘 본문에 앞서 등장하는 4절과 5절에 나타납니다. 원래는 새끼 양 십만, 그리고 숫양 십만 총 이십만의 양털을 바쳤었는데, 이제 그렇지 않겠다고 선언한것이죠.
우리나라로 치면 이전까지 중국에 계속 조공을 바치다가 이제는 더이상 조공 안바치겠다고 한 것과 비슷하겠죠. ‘이제 너희들의 질서에 순종하지 않고 벗어나겠어!’라고 이야기를 한 것이죠.
우리가 만약에 그렇게 하면 중국에서 어떻게 하겠어요? 바로 군사를 일으키겠죠? 마찬가지였습니다. 북이스라엘도 분명한 움직임을 보여야 했죠. 그래서 북이스라엘의 왕 여호람도 군사를 일으킵니다.
여기 등장하는 여호람이라는 왕은 지난주에 보았던 아하시야 왕의 형제입니다. 아하시야가 아파서 일찍 죽었기 때문에 형제가 이어 왕이 된 것이죠.
이 여호람 왕은 본인이 군사가 부족했는지, 혹은 분명하게 힘을 보여주려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혼자서 전쟁을 하지 않고, 다른 나라들을 불러 함께 싸우고자 합니다. 바로 남유다와 에돔을 부른 것이죠.
그렇게 에돔 왕과 남유다의 왕 여호사밧 왕이 함께하게 됩니다.
이 여호사밧 왕은 남유다에서도 몇 없는 하나님께 칭찬을 받았던 왕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경외했던 사람이라는 것이겠죠.
그런데 이 왕이 신기한 것은 분명히 하나님이 그렇게 좋아하시지 않을 것 같은데, 북이스라엘 왕들과 연합해서 전쟁을 자주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여호람과 함께 전쟁을 치르지만, 이전에는 아합 왕과도 함께 연합하여 전쟁을 치르기도 했죠. 아마도 당시에는 북이스라엘과 한 민족으로서 서로 척지지 않고 좋은 분위기 속에서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 세 나라 연합군이 모압을 향해 출발합니다. 그런데 이 연합군은 시작부터 삐걱댑니다. 9절에 보면 출발한지 칠일만에 물이 다 떨어지게 됩니다.
사실 등산을 한번 가는데도 물이 꼭 필요한데, 심지어 전쟁을 하러 떠나는 군인들이 물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절대로 이길수가 없죠.
그런데 이렇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 중간에 어떤 일이 벌어진 것 같습니다. 물을 빼돌렸다던지, 아니면 사고로 유실되었다던지, 어떤 일이 발생한 것 같아요.
뭐 원인이 어떤 것이든, 일단 중요한 것은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대한 문제가 생긴 것이죠. 전쟁은 고사하고, 칠일이나 왔는데, 돌아가는 것도 문제인거에요.
그러자 10절에서 북이스라엘의 여호람 왕이 이렇게 말합니다. 슬프다 여호와께서 우리 세 왕을 모압에 손에 넘기려 하시는구나.
갑자기 뜬금없이 하나님 탓을 하는거에요. 사실 우리 입장에서는 참 웃기죠.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도 아니고, 자기 마음대로 일을 저지른 거면서 하나님을 탓한다는게.
하지만 이 역시도 우리는 지난 말씀을 통해서 바라볼 수 있죠. 이 여호람 왕. 아하시야의 형제라고 했죠? 그럼 아하시야와 동일한 부모를 가지고 있을 거에요. 누구죠? 아합과 이세벨입니다.
그러니 여호람 역시도 하나님에 대한 미움의 감정이 있는거에요. 우리 부모가 그 하나님이라는 존재 때문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러니 뭐만 하나 잘못되면 나를 미워하는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또 우리를 괴롭히는구나 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 이렇게만 보면 사실 좀 웃긴 이야기에요. 그런데 잘 생각해봅시다. 과연 우리라고 다를까요?
물론 우리는 여호람처럼 하나님께 대한 악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는 어쩌면 여호람처럼 우리에게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하나님을 탓하고만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왜 제게 이런 일 주세요? 왜 제게 이렇게 행하세요? 왜 제가 시험 못보게 하세요? 어쩌면 하나님께는 어처구니가 없을 수도 있어요. 시험을 못본거는 그만큼 준비가 안된거지 하나님이 우리를 저주하라고 공부한 걸 없애신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이처럼 우리에게 원인이 있는 것들을 가지고서 하나님을 탓할때가 많습니다. 이 역시도 어쩌면 우리의 죄악 때문인 것이겠죠.
자 이렇게 여호람이 그의 죄악으로 하나님을 탓하는 아무 도움도 안되는 짓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한명의 왕이 있었죠? 바로 남유다의 여호사밧왕이 묻습니다. ‘여기에 하나님께 물을 수 있는 선지자가 없는가?’
그렇습니다. 여호람이 신세한탄이나 하고 있을 때,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사람답게 바로 이 위기의 순간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한 것이죠. 그리고 왕은 엘리사라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엘리사가 누구냐, 지난주까지 보았던 엘리야의 뒤를 이은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우리 큐티를 열심히 한 친구들은 엘리야의 뒤를 이은 엘리사의 스토리들을 잘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사밧은 바로 그에게 향하자고 제안했고, 모든 왕이 그를 따라 엘리사에게로 향합니다.
그렇게 왕들과 엘리사가 만나는데, 엘리사는 바로 북이스라엘 왕을 쏘아붙힙니다. ‘당신은 뭐하러 왔습니까? 당신의 부모님들이 좋아하는 선지자들에게 가시지’ 무슨 얘기에요? 하나님 말씀에 관심도 없으면서 왜 말씀을 들으러 왔냐는 이야기죠.
그러자 여호람이 또 상황에 맞지도 않게 이야기를 하죠.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이 우리를 모압에게 넘기려고 하고 있어요.’ 전형적인 피해망상 속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다시 엘리사가 이야기합니다. ‘내가 여호사밧 왕만 아니었으면 당신 보지도 않았을겁니다.’
그렇습니다. 엘리사는 다른 왕들은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택한 그의 백성 여호사밧만이 보였던 것입니다. 그가 위기의 순간 하나님을 붙잡았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시고자 하신 것이죠.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에 끼치는 소위 말하는 ‘선한 영향력’을 바라보게 됩니다. 사실 이 단어가 요즘에는 너무 쉽게 아무데나 쓰이고 있지만, 원래 교회에서 주로 쓰던 단어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의 쓰임새는 지금 쓰는 것처럼 뭐 유명인이 선행을 해서 그걸 다른 사람들도 하고 이런 때에 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뭐냐, 바로 오늘 본문의 여호사밧과 같은 경우에 쓰였던 것이죠.
여러분, 오늘 이 세 왕의 전쟁은 어떤 전쟁이었나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거룩한 전쟁이었나요? 아니었어요. 그저 자기네 나라 영향력을 잃지 않고자 했던 순전히 개인의 욕심에 의한 전쟁이었어요.
그러니 그러한 전쟁에 하나님께서 도우심의 손길을 주시지는 않았겠죠. 결국 위기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 위기는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나야 맞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세 왕의 결론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요? 여호사밧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사밧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고,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붙잡아야 함을 잘 알았습니다. 그랬기에 위기 속에서 그대로 행했고, 하나님은 그가 택한 백성을 도우십니다.
그리고 그 도우심의 손길은 그의 백성 여호사밧 뿐만이 아니라, 그와 함께했던 북이스라엘과 에돔 왕에게까지 이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한 영향력입니다. 주님께서 보내신 성도들을 통해 그 주변에게까지 주님의 사랑이 흘러나간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이 교회에서뿐 아니라 각자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올바른 삶을 살아갈 때, 주님은 반드시 그것을 통해 믿지 않는 주변의 영혼들에게까지 그 사랑을 부어주실 것이고, 그것은 또한 믿지 않는 이들에게 또다른 귀한 전도의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일상이 중요합니다. 여호사밧과 같이 다른 이들이 다 포기한 순간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고, 주님이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도우시리라는 믿음을 갖고 지난주에 보았던 것처럼 주님을 항상 붙잡는 모습이 우리 하임 공동체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이어서 계속 볼게요. 그렇게 엘리사는 세 왕 앞에서 거문고 탈 자를 부르고, 그 사람이 거문고를 타니 엘리사는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전하죠. ‘이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 너희가 바람도 보지 못하고 비도 보지 못했지만, 이 골짜기 가운데 물이 가득하게 되어서 너희와 너희 가축이 마실거야.’
믿기 힘든 이야기죠. 당장 사막 한가운데서 갑자기 물이 가득하게 될 것이라니. 그런데 엘리사는 거기에 덧붙여서 더 큰 이야기를 합니다. ‘이건 하나님 앞에 작은 일이다. 하나님은 여기에 더해 모압도 너희한테 줄거야. 저기 튼튼한 성읍을 칠 것이고 좋은 나무들을 베고, 샘을 메우고, 좋은 밭을 헐거야.’
엘리사의 이야기는 정말 놀라웠습니다. 지금 이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었죠? 당장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전쟁을 자시고 살아 돌아갈지가 문제였죠.
그런데 하나님은 마실 물을 한병씩 주겠다 이런 것도 아니고 갑자기 개천을 파라고 하셔요. 왜 개천을 파야 할까요?
그만큼 엄청난 물이 이들 가운데 나타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병 한병 채울 물이 아니라, 개천을 파야할 정도로 엄청난 물이 너희 앞에 올 것이다. 그래서 너희 모두가 마실 수 있을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사실 믿기가 힘든 이야기입니다. 물이 어디서라도 오려면 비가 오거나 해야할텐데, 그럴 낌새도 없는데 어떻게 그만큼에 물이 올 수가 있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에 하나를 더 얹으시죠. 바로 모압에 대한 승리까지 허락하십니다.
아마 어쩌면 이 왕들에게 이미 전쟁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당장 물이 더 급하지, 전쟁을 이기고 지는지는 둘째 문제였던 것이죠.
그랬기에 아마도 이 왕들은 앞선 이야기만으로도 감사하며 떠나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또 다른 것도 주신거에요. 바로 둘째문제였던 전쟁에 대한 승리.
이러한 엄청난 말씀에 이들이 어떤 반응을 했는지는 말씀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별다른 이야기 없이 바로 다음날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으로 봐서는 이판사판의 마음으로 그대로 따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목이 마른데도 굳이 개천까지 파면서 일을 더 한 것이죠.
그러자 어떤 일이 벌어졌나요? 다음날 아침 에돔쪽으로부터 물이 엄청 흘러오더니 그 판 곳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이죠.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바로 그 다음입니다. 개천에 물이 가득하게 된 것을 본 모압의 병사들이 그 물에 햇빛이 비친 것을 보고 그것이 사람의 피라고 착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아마 모압의 병사들은 이렇게 생각했겠죠. 저들이 연합을 해서 왔다더니 기어코 자기들끼리 싸웠구나. 그럼 지금이 반격할 기회다!
그렇게 많은 병사들이 방심하고 노략을 위해 쏟아져 나오자 그 즉시 이스라엘 연합군은 그들을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밭을 헐고 샘을 메우고 좋은 나무를 베기까지 하였죠.
일이 이렇게 진행되자 당황한 모압 왕은 어떻게든 전세를 역전시키려고 그나마 약한 에돔쪽으로 가고자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성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아마 양측의 분위기는 상반되었을 겁니다. 당장 목숨을 부지할지도 불확실했던 상황에서 전쟁의 승리까지 얻은 이스라엘과, 패배와 멸망 직전까지 다다른 모압의 상황. 어떤 느낌인지 감이 오실겁니다.
그러자 모압 왕은 패닉상태에서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내립니다. 자신의 아들을 데려와 인신제사를 행한 것이죠.
이 모압 왕이 행한 인신제사는 자신들이 섬기는 케모쉬를 달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들을 줄테니 지금 위기를 해결해달라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러자 당장이라도 이길 것 같았던 이스라엘은 온전한 승리를 쟁취하지 못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에게 크게 격노함이 임하매’라는 표현으로 나타났기에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모압 사람들이 왕자의 죽음으로 격노하여 더욱 거세게 저항을 한 것일수도 있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비상식적인 것을 보고 오히려 동요한 것일수도 있겠죠. 결국 모압을 향한 이 전쟁은 이렇게 결말을 맺게 됩니다.
자, 이렇게 전쟁이 마무리되었는데요, 우리는 이 전쟁을 통해 무엇을 바라볼 수가 있을까요. 바로 믿는 자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라는 것이, 우리의 생각과 상식을 뛰어넘어, 심지어는 우리가 바란것까지도 뛰어넘어 그 이상으로 도우시고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처음 이 세 왕이 엘리사에게 나아왔을 때, 정확히는 하나님 앞에 나아왔을 때를 생각해보자구요. 이들이 원한 것은 무엇인가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전쟁에서의 승리를 원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물이 없어 죽을 위기를 이겨내게 해달라는 것이 그들의 바람이었죠.
그러면 사실 하나님도 딱 물만 채워주셔도 되는 것이었어요. 그것만 해도 모든 왕들과 군사들이 하나님께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행하셨죠? 모압에 대한 승리까지도 허락하셨습니다. 그것도 아주 놀라운 방법, 물을 채우셔서 그 물을 피로 오인하게 하여 판단을 흐리도록 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늘 말씀에서의 행하심은 모든 것이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물 한방을 기대할 수 없는 곳에서 모든 개천을 채울 물을 부어주셨습니다. 그 자체가 사실 말이 안되는 것이었기에, 모압도 오판을 할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원래 저 곳이 물이 있던 곳이 아닌데, 저렇게 빨갛게 물들었다는 것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분명히 피일 수밖에 없었겠죠.
하지만 하나님은 그 상식을 넘는 채워주심에 더해 일상적이지 않은 오판까지 더해주셔서 이스라엘 백성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승리를 세 왕에게 허락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는 구한 것 이상으로 더욱 채워주신다는 것이죠.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간단하죠. 그의 백성을 사랑하시니까.
그리고 하나님은 엘리사의 입을 통해서 이 말씀을 하십니다. 18절을 읽어볼까요?
열왕기하 3:18 NKRV
이것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작은 일이라 여호와께서 모압 사람도 당신의 손에 넘기시리니
하나님께는 이 상식에 상식을 뛰어넘는 엄청난 일들이 어떻다고 하시나요? ‘작은 일’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보았을 때에는 은혜의 홍수로 넘치는 것 같은데, 하나님께는 작은 것이래요. 이건 무슨 이야기일까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크신 사랑은 이런 것들을 도우시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입니다.
그렇죠. 하나님의 사랑은 엄청나게 큽니다. 그 절정이 어디에 있어요? 바로 죄를 용서하기 위해 아들을 주시기까지 하셨잖아요. 그 크신 사랑에 비하면 이 모든 것들은 정말 작은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고민과 갈등, 무너짐과 외로움, 다 나에게 말하라. 그 작은 것들 내가 너희와 함께하겠다.
우리 이 자리에 모인 모든 하임 여러분들, 여러분들에게 있는 고민들, 아마 여러분에게는 너무나도 크게 느껴질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전체 삶을 송두리째 바꿀 것 같고, 그래서 누구에게도 말하기 어려운 고민들이 여러분들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 고민들, 주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주님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작은 일입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고 여러분들의 상식을 뛰어넘어 주님은 일하실 것입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것이 한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개천을 파는 일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엘리사의 입을 통해 하나님께서 명하셨던 것은 바로 단 한가지였습니다. 골짜기에 개천을 파는 일이죠.
그리고 분명 그 일을 이스라엘 연합군이 행했기에 골짜기에 물이 가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여러분, 한번 잘 생각해봅시다. 우리야 뒤에 물이 가득하게 올 것을 아니까 그 개천을 파는 일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스라엘 군인들 입장에서는 어땠을까요?
말그대로 삽질처럼 여겨질 수도 있어요. 가뜩이나 목말라죽겠는데, 물이 찰정도로 개천을 판다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했습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겠죠. 그리고 그렇게 개천을 파는 일들이 있었기에 그들은 그 물을, 그리고 그 승리를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것은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자격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굳센 믿음, 그리고 그 믿음으로부터 나타나는 행동이죠.
만약 이스라엘 군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면, 그래서 개천을 파지 않고 다른 행동들을 했다면 당연히 은혜를 누릴 수 없었겠죠.
하지만 마찬가지로, 믿음을 가졌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다 하시겠지라는 마음으로 개천조차도 파지 않는다면, 이스라엘 군인들은 그 은혜를 또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이는 동일합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그렇게 행하실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 믿음으로부터 감사함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저 수능 올1등급 주시리라 믿어요 라는 그 간단한 믿음 하나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에게 진짜로 1등급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거에요.
왜요? 하나님은 정의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분명 사랑이 많으셔서 오늘 말씀처럼 우리에게 더욱더욱 부어주시기 원하시지만, 그 사랑은 분명 정의롭게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 정의에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것들이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 하나님 앞에 많은 것들을 구하세요. 구하는 것 너무 좋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정말 여러분들 가운데 일하실 것을 믿는다면, 합당한 준비를 행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에게 정말 시험을 잘 볼 수 있도록 하실 것을 믿는다면, 일단 그 내용들을 머리에 넣어야죠. 그러한 준비들, 개천을 파는 일들이 있어야, 그 안에 물이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시험 컨디션이 좋도록, 순간순간 떠오르도록 하실 수가 있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일하심은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이지, 갑자기 전혀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떠오른다던가, 찍었는데 다 맞는다던가 그렇게 일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정의를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오늘 이스라엘 연합군과 모압의 전쟁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을 통해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일하심의 방식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사실 오늘의 이 말씀은 전쟁이라고 하고, 죽고 살리고 이러니까 되게 있어보이지, 사실은 이런것과 다를 바 없어요. 애들 셋이서 말 안듣는 애 손봐준다고 나갔다가 사고를 쳤는데, 그 중에 한 명이 부모님께 전화해서 도와달라고 했고, 그 부모님이 나서서 다 해결해준거에요. 그런데 사고를 해결해준것 뿐만이 아니라 생각지도 않았던 선물까지 주신거죠.
하나님은 이처럼, 사리분별 못하고 좋을대로만 하고 다니는 아이같은 우리를 부모의 사랑으로 덮어주시고 도와주십니다.
그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입니다. 그 부모를 나의 부모라고 고백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 부모를 온전히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하임 공동체 여러분들도, 우리를 돕길 바라고 기다리시는 주님께 온전히 믿고 의지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질 것을 준비하며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많은 물들을 부어주실 때, 우리는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그것들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든 하임 공동체가 그 크신 주님의 사랑을 가득가득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찬양 : 주가 일하시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