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6:1-1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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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성령은 진리로 인도하신다는 제목으로 살펴 보았는데그렇다면 어떻게 인도하시는가를 살펴 보고자 합니다.
먼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한다. - 이는 13장부터 긴 예수님의 말씀의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남겨질 제자들이 실족하게 될 것을 아셨기 때문이죠. 앞서 제자들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당하실 때 다 떠나게 됩니다. 그만큼 영향이 큰 것이죠. 그러나 시간적으로 본다면 불과 3일 후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얼마나 빠른 결정인가를 알 수 있죠. 아무튼 그렇다는 것이죠. 어떤 일이 우리를 실족하게 할가요? 대표적으로 믿었 사람에게 배신을 당할 때 가장 크게 나타납니다. 이런 배신에는 여러 상황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영향을 주는건 가족간에 일어나는 배신이 크다고 합니다.
실족한다는 일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공부를 하는 사람이 학위를 따고 졸업을 하면 어엿한 직장에 취업을 해서 성공까지는 아니라도 때가되면 집도 사고그렇게 사고 뭐 이런 것도 사회가 배신했다, 정치인에게 표를 줬더니 배신했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또는 별 일 아닌 것같은데 앞서 이야기한 배신들이 쌓이고 쌓이다 별안간 별 일 아닌 것으로 터져 나오는 것을 자주 경험하지 않습니까? 본문에서 제자들이 당할 일은 그렇게 믿었던 예수의 뜻하지 않는 십자가 죽음일수 있겠죠. 비록 3일에 부활 후 예수를 만났다 하더라도 그 후에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갔던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 의한 출교 즉 공동체에서 쫓겨나는 위협은 오히려 심해질 것이 뻔한 것이죠. 예수는 죽었는데 살아 있다고 선동하고 다니고 계속해서 성전을 출입하면서 선동하고 있다면 제자들을 죽이는 일이야 뭐 어렵겠습니까? 앞서 세례 요한의 죽음이나 이후에 일어난 스데반을 돌로쳐서 죽인 무리들의 사건이나,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죽인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사도행전 12:1 “1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사도행전 12:2–3 “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3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이렇듯 마음을 다치는 정도의 소극적인 실족도 있겠지만 제자들에게 일어날 일은 현실적이며 구체적으로 나타날 상황입니다. 그 이유가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미움’이죠. 감정의 바닥에서 시작해서 미움은 결국 주변을 파괴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랑하지 않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치 사랑해서 결혼을 하지만 사랑이 사라지자 미움으로 인한 서로를 향한 공격은 너무나 흔한 우리 주변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오히려 요즘은 미워하는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활동하고 법적인 보호를 받음으로 인해서 미움까지도 정당화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하게 접하는 미디어에 이단들이 적극적으로 홍보를 하는 경우나 기독교는 거짓 종교라고 스스로를 매우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라고 말하면서 적극적으로 혐오를 드러내는 것이죠. 그 출발이 미움입니다. 예전 자신들이 당했던 상황을 역전시켜 맹공하려는 그리고 이면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 조회수를 올려 돈이 되고 계속해서 활동하는 자금이 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왜 이런 혐오가 득세할가요? 지난 주 국가 인권 위원회에 수장이 되는 후보자의 인사 청문회에서 후보자는 ‘창조론’을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검증을 하는 사람이 ‘과학적 입증’이 안된 것을 주장하느냐며 되물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이기에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가장 중요하게 믿는 것이죠. 사도신경의 시작이 ‘나는 믿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이죠. 그런데 왜 개인의 종교나 신념을 문제 삼는가? 또는 창조론과 과학의 대립을 주장하는가? 하는 것이 논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후보자가 살아온 삶이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 방식대로 쌀 때 집을 사서 비쌀 때 팔아서 이익을 극대화하고, 편법으로 증여해 탈세하는 말 그대로 세상 사람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면서 신앙으로 ‘하나님의 창조’라고 이는 법적으로 보호받는 개인의 신앙 양심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16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공직자로 나선 후보가 보여준 2중적인 삶을 왜 세상이 모르겠습니까? 그는 교회에서 성경의 지식을 믿는 방식으로 살다보니 아무런 꺼리낌없이 세상에것 추구하며 살다가 오히려 세상의 변화를 꿈꾸며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위해 복지의 나라에서 살기를 바라는 이들에게 꼬리가 잡힌 것이죠.
비그리스도인이라도 세상을 정의롭게 만들고 그래서 시민의식을 깨워 옳은 방향으로 삶과 윤리를 개혁하려고 하는데 오히려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의 신앙은 생활과 따로 놀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니 눈에 보이지 않는 신앙이 눈에 보이는 곳에서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얼마나 챙피한 일입니까? 마태복음 5:13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딱 이 말씀입니다.
제자들 역시 그런 시간이 현실적으로 온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죠. 이것을 예수님은 4절에서 ‘기억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먼저, 기억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쉽게는 공부한 것을 다시 떠 오르는 것을 기억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기억은 각자가 살아가는 방향이다라고 보는 것이 보다 올바른 이해에 가깝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과거사로 인한 갈등을 생각해보면 내가 먹고 사는 문제와 직접 연결이 안되죠. 하지만 우리나라 모두가 살아가는 터를 움직이는 한 층 더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무엇이냐와 연결되는 것이죠. 따라서 과거에 대한 올바른 기억인 인식이 대한민국이 나아갈 방향을 알게 하듯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억 즉 올바른 인식 역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교리만 추구하면서 머리만 커져 삶이 없고 반면 윤리만 추구하다 이 정도로 살면 큰 문제가 없다는 사고로 인해 예배에 대한 온전함이 사라지고 있다고 해도 관언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그런 상황에 놓였고 예수께서는 여기에 답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할가요? 지금 당장은 예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 4절 후반부의 말씀이고 5절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간다’는 말씀은 십자가의 죽으심이 단순한 사건이 아닌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마침표이자 부활로 드러날 놀라운 과정 즉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영광받으실 사건이지만 이것이 ‘무엇인가?’를 모르는 제자들에게 반드시 기억되어져야 할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공식을 외우듯 외워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를 외우고 사람들 앞에서 신앙인의 정체성처럼 말하지만 내 삶에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풀지 못해 결국은 ‘버려진 소금,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 되어 쓸모 없이 사람들에게 밟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집에서 괜찮은 성도요, 아버지요 남편이자 성공한 학자 아니었습니까. 그런데도 쓸모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신앙의 특징은 5절에 ‘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르니 무엇을 물을지 몰랐고, 눈에 보이는 예수가 계시니 지금은 눈에 보이는 화려한 교회가 있으니 필요가 없다는 식입니다.
그렇다면 기억난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기억이라는 방식을 통하지 않으시고도 앞서 보여주신 기적과 것으로도 충분히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마치 십계명을 돌판에 새겨 주셨던 것처럼 말이죠. 먼저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답이 있습니다. 창세기 1:27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조의 원리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 성경을 읽다가 또는 설교를 듣다가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라는 표현을 들어 보신 적이 있나요? 신이 왜 인간을 기억할까요? 모세가 애굽 왕에게 하나님을 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경에 ‘스스로 계신다’ 는 의미로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함께 하신다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죠. 함께 하신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는 의미와 연결이 됩니다.
또한, 히브리서 8:10 “10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나는 것이 생각에 두고, 마음에 두는 즉 기억하는 방식으로 백성의 관계를 맺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여기에 담긴 의미가 서로 자연스럽게 도치되면서 우리 생각에 새겨져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범죄한 우리를 잊어버리지 않으시고 기억하시므로 인류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셔 구원하시는 것은 요한의 말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자 기억하신 결과이다라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도 하나님 저 기억하시죠. 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께 예배하는 이 시간도 신에게 제물을 드려 어떻게 하든 빌어서 자신의 간구를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기억되는 존재로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죠.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언약하신 백성의 원리를 따라 우리에게 기억하게 하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마지막에 점을 하나 더 찍자면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이자 자녀됨이다라고 한다면 얼마나 근사한 표현입니까?
자녀이기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기억되는 존재이자 기억 받는 존재라는 것이죠. 최근의 일본 강점기의 기억을 왜 없애려 합니까? 기억하고 가는 방향이 기억을 없애려는 이들의 방향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집요하게 바꾸려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일가요? 그들이 취하려는 이익에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예요. 그들이 만드는 자본 중심의 세상에서 자본의 노예로 부려 먹고, 기득권 아래에서 빌붙어 먹고 살 존재가 필요하기 때문이죠. 그렇게 부를 창출할 노동력이자 이익을 만들어내는 일벌, 일꾼 개미를 원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오히려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자들이 부하뇌동하고 있으니 얼마나 곡할 노릇입니까? 일제의 식민사관이 이렇게 가까이 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사참배를 외쳤던 교단들이 성명서나 잘못을 지적하는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까? 정말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이렇듯 기억은 사고의 작용으로 마음 속에 저장되고 회상되는 과정을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지시합니다. 때론 과거의 아픈 기억은 난데없이 작동하기도 한다. 이것을 트라우마라고 하죠. 자주 반복되면 특정 상황을 회피하게 되고 두려워 하게 됩니다. 제자들이 떠난 이유는 구심점인 예수께서 죽으셨다는 것도 있겠지만 그로 인해 꿈꾸었던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었고 가차없이 내려진 참혹한 현실은 그들을 두렵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돌아간 삶은 예전의 어부로 돌아 갈 수밖에 없는 것이죠. 어부의 삶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름을 받았다가 실패 앞에 결국 제자리로 돌아간 것입니다. 즉 예수와 함께했던 시간은 기억속에서 사라질 것이고 그저 둘러 앉아 한잔하며 옛날을 회상할 때 그땐 그랬다는 안주거리에 불과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제자들 각자가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가?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를 자기 동일성이라고 하는데 학자들은 이를 정체성인 아이덴티니와 여기에 개인적인 의미를 붙여 퍼스널 아이텐티티라고 말을 합니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그리스도인하면 일반적인 정체성이 있었는데 술, 담배를 하지 않거나 조금 더하면 사회적인 법을 더 적극적으로 지킨다 같은 것이고 여기에 참여하면 그리스도인 정체성이라 했지만 지금은 안그렇죠. 왜냐하면 바로 퍼스널 아이덴티니 때문입니다. 그때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정도만 지켜도 괜찮은 시대였습니다. 예전엔 회사 사무실에서 담배를 피면서 회의를 하는 시절에 믿음이 좋다는 의식보다 사회적으로 그러지 못했던 비판적 사고와 행동에 높은 점수를 줬던 것이죠. 그러다 건강이 대두되면서 이런 습관을 가진 기독교인들을 좋게 보는 사회적 분위기도 한 몫 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오히려 자기 시간을 철저하게 사용해서 운동하고 퇴근 후 공부에 투자하는 사람들을 대단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식전 기도, 술, 담배와 같은 그런게 먹히지 않는 시대가 된 것이죠. 어느 자리에 농담거리가 되어서 ‘난 평온한 사람과 살고 싶다’고 하니 ‘그럼 교회 오빠를 사궈’라는 식이 된 것이죠.
그래선지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은 어떤 면에서 세상에 상처받은 그리스도인들끼리 모여 서로 보둠에 주는모임의 성격이 큽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러다보니 ‘너도 그래, 나도 그런데’ 하면 서로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하는데 굳이 적당한 선을 지켜며 사는 상처받은 일도 없고 관심도 없는 세상에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공감대가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별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찬송이나 복음성가의 세련된 가사에 취해서 눈을 감고 손을 들고 때론 깊은 감정에 도취되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너무 이질적으로 느껴지지만 반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런 감정과 나와 같은 사람을 만날 곳이 세상천지에 없는 것도 사실인 것이죠.
이런 것들이 기독교인의 정체성이 아님에도 정체성이 되어 버렸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정체성이라는 것이 인격, 개성처럼 그 사람의 독특함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고 ‘기억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자기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결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예수의 뜻하지 않는 죽음은 가장 처참한 죽음으로 경험 될 것입니다.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시면서 사람을 고치는 기적, 5천명을 먹이는 기적의 경험이나 바다 위를 걷는 기적에 보이셨고 특히 사람을 다시 살리는 기적을 경험한 제자들의 입장에서 예수는 불사의 존재 같은 분이신데 몇시간 후에 체포와 함께 채찍으로 맞아 온 몸은 살점이 떨어져 너덜거리고 십자가 조차도 짊어 질 수 없는 가장 나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처참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고 그런 모든 광경을 제자에게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하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기억에 반드시 있어야 할 기억의 동인 보혜사를 언금하신 것이고 보혜사 오셔서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하셨던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것은 즉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이유를 알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건강을 위해서 다이어트를 하거나, 때론 어느 가사처럼 보여주기 위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이유들은 사라집니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 가는 동안 살아지지 않고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구조에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라는 변함없는 동인이 새겨진다는 것입니다.
이를 다음 시간에 살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2:22 NKRV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요한복음 15:20 NKRV
20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요한복음 16:4 NKRV
4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
요한복음 16:21 NKRV
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알게하다 기노스코 -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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