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9. 6 금요철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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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Transcript

주님을 깊이 만날 때

[기도]
도입
할렐루야!
금향로 기도회에 나오신 성도님들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우리 옆사람과 이렇게 인사합시다.
오늘도 잘 오셨습니다~
담임목사님께서는 목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이코스 월드세미나에 참여중이십니다.
그래서 오늘은 목사님께서 안계시는 관계로 제가 설교를 하게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세미나에 잘 참석하고 안전하게 오실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성경봉독]
빌립보서 3:4–9 NKRV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오늘 말씀을 보면요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자랑하지 않는데 오늘은 바울 자신이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참 이례적인 부분입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권리와 이로운 것들을 사용하지 않고 스스로 돈을 벌고
고난에 처했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 직접 말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2절에 보니까요
빌립보서 3:2 NKRV
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라고 말합니다.
이 3장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을 계속 따라다니면서 괴롭히고 방해하고 어렵게하는 대적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개’ 는 유대인들을 가리키던 말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5:26 (NKRV)
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마태복음 7:6 (NKRV)
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두 구절 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개는 유대인을 뜻했습니다.
개 사진
지금 우리 현대 시대에도 개라는 단어를 쓰거나 개라는 단어를 붙여 쓰거나 비속어를 쓸때 개라는 단어를 많이 쓰는데 우리나라는 한글 특성상 참 여러가지 다양하게 쓸 수 있습니다.
우리말 속담사전이라는 책을 보면요 우리나라 신분제도가 있을때는 미천한 출신의 사람들을 비하하는 뜻으로 쓰였다고 합니다.
속담말고 국어사전에서는 “개”는 접두사로서 세가지 뜻을 지녔는데
“야생 혹은 질이 떨어지는”, “헛되거나 쓸데없는”, “정도가 심한”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국어사전에 있는 “개”가 붙어있는 단어는 개소리, 개수작, 개고생 등 부정적인 단어로 쓰이는것을 꽤 있습니다.
로마시대에도 개라는 단어를 부정적으로 사용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게 개라는 단어를 많이 썼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더 강력한 표현으로 예수님께서 이렇게 개라는 비유를 사용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명백하게 유대인들을 지칭하기 위해서 개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또한
여기서 ‘행악자’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흔히 하던 말을 그대로 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행악자라는 것은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죠.
그런데 여기서 사도 바울은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명확한 표현으로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라고 말하고있습니다.
여기서 보면 그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들이 어떤 일들을 했는지 무슨 문제를 일으켰는지 명확하게 언급한것이 없는것을 보면 사도바울과 빌립보 교인들안에 서로 알고 있는 이야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이야기를 이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라는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나온 개와 행악자를 보고 악을 행하는 유대인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마지막 세번째 말을 보면
그들은 유대인 할례파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자기를 괴롭히고 따라다니는 유대인 할례파를 위해서 자기PR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 PR사진
요즘 말 중에 혹시 ‘자기 PR’이라고 아십니까?
Public Relations 라는 말을 줄여서 PR이라고 쓰는데 그 뜻이 ‘홍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자기PR’이라는 말은 ‘자기홍보’라는 뜻이죠.
요즘 젊은세대들 십대,이십대 그리고 30십대를 넘어서 40대까지도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유튜브를 빼놓고서는 다음세대를 논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알리고 홍보하고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서 능력자이고 자신의 능력을 알려야 먹고 살고 자신의 가치를 높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007년도에 ‘자기PR의 시대’라는 책이 나왔는데 저 책이 나왔을 때만 해도 책 내용도 그렇고 사회적인 반응들도 자기 자신을 알리는 거 좋지만 겸손해야 한다. 이런 반응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홍보와 마케팅관점으로 자기PR을 바라보고 있고 그것들이 돈이되고 먹고 살 수 있는 여러가지 방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요즘에는 스펙이라고해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줘야 취업하고 스펙이 쌓여야 먹고사는 시대에 왔습니다.
중요한 건 사도 바울이 왜 자기 pr을 했냐 이것이죠. 홍보에는 분명한 목적이 존재합니다.
자기 자신을 알리는 일에도 분명한 목적이 존재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의 분명한 목적은 자기 자신이 어떠한 사람이었는지를 알리는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를 보고 나를 본받으라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지만 예수그리스도를 따르고 본받은 나를 너희는 본받으라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4:16 (NKRV)
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사도바울은 다른 서신서에서도 이렇게 말했지만
오늘 자기자신에 대해서 말하고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빌립보서 3:17 (NKRV)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사도바울이 자기 자신을 얘기하는 이유는 할례파가 말하는 육체를 신뢰하지 못할 이유로 자신을 말하고
그리고 자신을 본받으라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이 본받으라고 말하는 것은 이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따라가는 그 모습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우리를 공격하고 우리의 신앙을 흔들고 있는 할례파를 조심하고 따라가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자신을 육체적으로 신뢰할만 하다고 하는지 한번 보겠습니다.
그 사도바울이 얘기하는 자신의 스펙은 이렇습니다.
첫째, 나는 8일만에 할례를 받았다.
사도 바울은 태어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 할례를 받는 기간을 왜 말했냐면
모든 사람이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8일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마엘의 자손은 만 13세가 되어야 할례를 받을 수 있었고 이방인의 자손은 성인이 되어서야 할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사도바울은 순수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 나는 이스라엘 족속이다.
사도 바울은 그가 선택받은 민족이고 특권을 받은 민족이라고 말하는것입니다.
셋째, 나는 베냐민 지파이다.
그 이스라엘 족속중에서도 나는 베냐민 지파출신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 당시 베냐민 지파는 명문 가문이었습니다.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의 가문이었고 중간시대때 페르시아에 끌려서 살면서 민족을 구원했던 지도자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가문이었습니다.
또한 유다지파와 함께 귀환했던 찬란했던 지파가 바로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내가 얼마나 좋고 명문 가문출신인지를 말하는 것이죠.
넷째, 나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다.
이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는 말이 무슨말이면 바울이 가지고 있는 언어학적 특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당시의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는 말은 ‘히브리말을 하는 사람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 이후로 흩어져서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는데 그 당시 1세대는 히브리말을 했겠지만 차츰 히브리말을 잊어버렸습니다. 그 당시의 주 언어인 헬라말을 사용했고 그렇게 히브리 말을 잊어버리기 시작합니다.
그 중에서 끝까지 전통을 지키고 히브리말을 가르쳐온 가문들이 있었고 그 가문에서 태어나 자란 자들이 히브리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그러한 가문에서 자신은 히브리말을 배웠고 나는 너네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고 말하는 그 히브리 말을 쓰는 히브리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나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다.
일반적으로 바리새인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민족주의자에 경건한 사람들. 그 당시 바리새인은 6천명정도로 추정하는데 바리새인들은 율법으로는 특권층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러한 바리새인이라는 것이죠. 특히나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사도 바울은 당대 최고 학자인 가말리엘이라는 학자 밑에서 직접 공부했던 사람이였습니다. 최고 학벌과 최고 지성을 자랑하는 자가 바울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그러한 자리에서 율법을 배웠기에 나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나는 교회를 핍박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율법을 배운것 뿐만 아니라 민족주의자에 경건한 사람들이었던 바리새인들처럼 교회를 핍박하러 다니는 자였습니다. 그가 그냥 단이 단신으로 교회를 핍박하고 다녔을까요? 사도바울에게는 교회를 핍박할 수 있는 권세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권세가 있어야 그리스도인들을 감옥에 넣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어떠한 위치에 있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사도 바울은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자였고 가문 또한 잘살았을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일곱째, 나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
이러한 삶을 살아오는 바울은 아마도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져있는 내용들만 봐도 사도바울은 아주 고지식하고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았던 인물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분명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며 살았던 사람일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본인이 직접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랑함이 목적이 아니다.
이 정도의 스펙이면 당대 최고의 스펙에 손꼽힐 것입니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엘리트죠. 그것도 상위 1프로 안에 들어가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이러한 스펙들을 나열한 이유를 바로
‘이것들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얘기하고 자랑하는데 이것을 말하는 목적이 이러한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라고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7 (NKRV)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라고 말하면서 다 해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왜요?
빌립보서 3:8–9 (NKRV)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많은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아니 왜요? 왜 버리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다 쓰면 되잖아요?
바보아니에요? 하나님이 사용하라고 주신건데 왜 버려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죠.
우리도 분명히 우리에게 주신것들을 가지고 살아가지않는다면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것들을 가지고 주님께서 사용하시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바울은 이러한 것들을 모두 배설물로 여기고 버린다고 말합니다.
이해가 됩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자 마자 회심하자마자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다 팔아서 기부하고 선교를 나가거나
저기 어디 허름한데 개척해서 교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처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 만남과 동시에 사역자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던 그 때
말씀을 전해주셨던 목사님의 스토리가 이러했습니다.
가문이 돈이 많았고 본인도 의사여서 돈이 많았는데 흥청망청 인생 원하는대로 즐기며 살다가
예수님 만나고 모든 것들을 다 기부하고 저기 안성이라는 촌동네로 들어가서 개척해서
어렵고 힘든 아이들 술에 쩔어살고 인생소망이 없고 본드와 같은 마약류에 절어있는 아이들
줏어다가 씻기고 가르치고 복음을 전했던 그 목사님이 이러했습니다.
우리가 대단하다고 말하는 사역자들 그리고 성도님들의 스토리를 들어보면 이러한 내용이 많습니다.
재미있는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이렇게 되었다는 것이죠.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것들이 다 나에게 해가 되었고 배설물로 여겼다는 것이죠.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고상하다”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고상하다라는 말의 뜻은 헬라어 원어에서 ‘우월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고의 가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라는 것입니다.
8절에 나오는 이 배설물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원어로
σκύβαλον ‘스쿠발론’라고 합니다.
이 스쿠발라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개에게 던져주는 음식이라는 뜻이 있는데 저급하고 더러운 음식이라는 의미입니다.
둘째는 의학용어로 소화가 끝난 후 신체로부터 축출된 음식 찌꺼기와 소화 분비액에 집합체라는 설명입니다.
다른말로 하면 똥입니다. 덩.
재미있는건 그래서 킹제임스 버전에 영어성경은 dung이라는 단어로 번역해놨습니다.
아무리 귀한 것이라고 해도 진짜를 발견하면 필요없는 배설물처럼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왜 그랬을까요?
우리가 인간적으로 왜 버리는지 이해안되는데 왜 그랬을까요?
사도바울에게는 예수님이 그만큼의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모든것을 다 버리고 따르고 쫓을.
사도바울은 다메섹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사도행전 9:1–3 (NKRV)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사도바울은 아까 우리가 나눴던 대로 어떠한 권세를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감옥에 가뒀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나온 말씀대로 사도바울은 대제사장을 통해서 권한을 얻고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다메섹으로 갑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주님을 만나죠. 환한 빛이 둘러서 사도 바울을 비추고
직접 음성을 들려주시고 사도바울의 눈을 멀게하시고 눈을 고쳐주시는 일을 사도바울에게 행하십니다.
그때에서야 사도바울이 진짜 예수님은 그리스도시구나라는 것을 깊이 깨닫고 자신의 삶을 180도 바꾼 삶을
살아갑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이 이렇게 주님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바울이 있었을까요?
아니 성경에 나온 모든 사도들이 주님 못만났다면 그들이 존재했을까요?
아주 간단하고 명확한 이 말씀을 우리는 잊고 살아갑니다.
몇주전에 제 친구랑 전화통화할 일이 있어서 통화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 친구가 그런 질문을 하는거에요.
“너는 사역자로 살아가면서 먹고사는 문제에 있어서 두려움이 없어?”
이런 질문을 하는 겁니다.
이 친구가요 제 가장 친한 친구중 한명인데 두려움이 참 많은 친구입니다.
제 가장 친한 친구들이 전부 교회 친구들인데 저를 비롯해서 전부 겁쟁이입니다.
진짜 다들 엄청난 쫄보에 겁쟁이들이에요.
그런데 제 친구도 일반 직장에 다녔지만 계속해서 선교단체에서 활동하고 선교도 지속적으로 나가다가
신학을 공부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 상황과 환경속에서 신학은 참 재미있고 배우는게 너무 즐겁지만
중도하차했습니다.
그 이후로 제가 왜 그만두었는지 이유를 묻지 않았지만 갑자기 제 친구가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제 친구가 지금 현재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가지고 있는데 사역자를 생각해볼 때 미래의 두려움이 가장 크게 보여지는 것같다는 것입니다.
우울증이라는 거 자체가 자신의 미래에 대한 아무 소망이 없을 때 삶의 의미가 별로 없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병중에 하나인데 제 친구가 그랬던것이죠.
그 친구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이런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모든게 다 해결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분을 따르게 되면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
여러분 사도바울이요 생각하고 고민하고 내려놓았겠습니까?
음… 내가 예수님 만났는데 그분이 나를 사용하신다고 하니까… 음… 어디까지 내려놓을까?
음… 일단 집은 있어야 하니까 집은 냅두고.. 음.. 어디 다닐때 돈도 필요하니까 이것까지만 드릴까?
이렇게 고민했을까요?
그리고 돈이 떨어지면 음.. 아 … 그때 그거 다 드리지 말걸. 어디서 돈을 어떻게 벌지?
이렇게 생각했을까요?
여러분 주님을 만나면 모든게 다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거 빼고 다 의미가 없어져요.
아주 단순해집니다.
제가 이 친구의 질문을 받고 나중에도 한번 곱씹어봤어요.
친구랑 여러 이야기를 했지만 나는 어떻게 이렇게 있을까?
뭐 제가 사도바울처럼 스펙이 좋은것도 아니고 주변에서는 공부도 안하고 놀기 좋아하고
사역자로서 대단한 능력도 없는데 그냥 그만둬 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꾸역꾸역 이렇게 이 길에 붙어 있게 되었을까?
힘들고 돈 없어도 어떻게 붙어있었지? 라는 생각이 드는거에요
그래서 제가 처음 주님 만날 때를 돌아보니까요.
아 이게 참 은혜가 되더라구요.
여러분 힘들 때 처음만났던 주님 은혜를 한번 뒤돌아 보세요.
제가 중3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는데요. 아까 언급했던 그 목사님이 설교할 때요.
그리고 그날 인격적으로 주님만나고 성령받고 죄 회개하고 그러고나서 주님께서 저를 부르셨을 때
그날로 저는 계속해서 이길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 수련회가 끝나고 바로 집에가서 어머니께 이러한 은혜를 나누었고 그때부터 저희 부모님에게 저는
사역자가 될거라고 선포했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굉장히 힘들어하셨어요. 어머니는 그냥 수긍하셨지만.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이길에서 흔들리고 어려움도 있고 힘든일들도 많았지만 그때마다 주님께서 저에게 은혜 주셔서 이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끝까지 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니까요 전혀 고민하지 않았어요. 저 그때 제가 하고싶었던게 있었거든요
중2때부터 공부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주님만나고 주님 부르시니까 다 포기가 되어졌어요.
아니요 애초에 포기라는 거 자체를 생각하지 않았어요. 주님께서 부르셨으니 나는 이길로 간다.
이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대학교부터는 공부 참 안하고 놀고 방황했지만 저 나름대로 어디가서 똑똑하다고 많이 듣고 자란 사람입니다. 제 동생이 저를 보면서 형은 뭘해도 잘할거야. 라고 했었어요. 저에게 그런 자신감으로 넘쳤었구요.
그런데 주님께서 부르시니까요. 앞으로 어렵고 힘들고 돈 못벌고 이러한 생각 자체를 안하고
바로 그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게 되더라는 겁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요
주님을 만났기에 자신에게 많이 주어진 것들을 다 내려놓고 배설물로 버리고 나아간거에요.
여러분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인격적으로 깊이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그렇지 못한 분이 있으시다면 주님을 만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신분들이 대부분이실텐데
여러분 주님 만날 때 모든게 해결됩니다. 주님 만날때요 모든 것들이 잊혀져요.
왜냐면요 주님 외에는 다 우선순위에서 밀리기 때문입니다. 좀 더 강하게 말하면요
주님 외에는 다 쓸데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참 이상한 말이다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어요.
그런데 진짜 주앞에 나와서 주님께 나아가면요 여러분 다 잊혀져요.
내 육신의 어려움 내 육신의 힘듬 나의 상황 나의 문제 전부 다 잊혀져요.
주 앞에 나아가서 주님 만나면요 주님밖에 안남거든요.
그래서 사도바울이요 그렇게 모든것을 해로 여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기는 이유를요 뭐라고 말하냐면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리고 뭐라고 말하냐면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
그리스도를 얻고 그 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서에요.
그분안에 있는 자로.
여러분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고자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얻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기에서 얻는 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사도바울의 궁극적인 목표가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라함이라”
여러분 우리가 요즘 현대 교회에서 교인들이 제일 많이 하려고 하는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자, 힘써 알자
호세아 6:3 (NKRV)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호세아, 6장에 나온 말씀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힘써 알려고 노력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많이 배웠듯이 여기서 알다라는 말은 그냥 지식을 배우고 아는것으로 끝나지 않고
경험하고 관계를 맺고 까지갑니다. 남녀 사이의 관계에서는 성관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라는 것이 이러한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사도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라고 말하는 것의 의미는요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려는 노력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9 (NKRV)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8:2–3 (NKRV)
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그러니까
인간의 지식의 한계와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에게는 그 버린것들이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시고 내가 그안에서 발견되어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지려고 했을까요?
마태복음 7:22–23 (NKRV)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장 말씀을 보시면요
그날에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여러 권능 행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떠나가라 라고 말하고 계시죠.
우리 자신은 주님을 잘 안다고 생각하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그렇지만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모른다”라고 하시면 멸망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요 빌립보서, 3장 12절 말씀을 통해서 끝까지 달려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3:12 (NKRV)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그러니까 사도바울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것이라는 거에요.
주님께서 나를 아시는 것. 내가 그안에 사는 것. 그와함께 하는것.
사도바울의 궁극적인 이 목표를 위해서 지금 이모든것들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좋고 아주 훌륭했던 자신의 스펙과 자신의 지위, 그리고 환경들
그것들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었던 것과
그리고 내가 그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을 얻고 그리스도안에서 계속해서 발견되어지게 하나님이 나를 아시게
하는 것이 목표라고 하고 있는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위해서 끝까지 푯대를 향하여 부름의 상을위하여
달려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 궁극적인 목표를 위해서 이 모든것이 나의 의로 난것이 아님을 강조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을 것이다
빌립보서 3:9 (NKRV)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의 행동은 믿음이고
하나님으로부터오는것이 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열심과 우리의 노력 우리의 모든 여러가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로 나오는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그것은 믿음으로 나와야 하고 그것에 대한 결과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야한다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버린다고 해서 그 댓가로 무엇을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마태복음 13:44 (NKRV)
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마태복음, 13장 44절에 보면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는 비유가 나옵니다.
그것을 다 팔아서 사는 농부 이야기입니다. 우리 어린이들이 좋아하고 누구나 좋아하는 찬양인
천국은 마치 라는 찬양의 가사가 이 말씀에 나왔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것을 다 팔아서 이것을 사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드려서 하는 모든 것이 그와 같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말씀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팔아야 살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포기할 만큼의 큰 가치, 큰 기쁨이 있다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노력을 말하는 듯하지만, 자신의 의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 인한 것임을 강조하는것입니다.
바울에게 노력이 있다면 자신을 의지하지 않으려는 노력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요
로마서 1:17 (NKRV)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힘써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
끝까지 하나님께 붙어 있으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노력과 내 생각 내 상황가운데서 하나님을 믿는것이아니라요.
이것들이 나의 의가 되고 그것들이 곧 율법으로 부터 나온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은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나 이랬던 사람인데 예수님 만나고 이렇게 변했어.
그리고 나의 궁극적인 목표는 구원받고 주님안에 거하고 주님께서 나를 아시는 거야.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날때 가능합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에게 일어난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주님을 만날 때 가능했습니다.
주님을 만날때 가능했습니다!
어떠한 방법 어떠한 헌신 어떠한 대가 이런것들이 아니라구요.
우리는 자주 우리의 율법적인 의를 들어낼 때가 많습니다.
이번에 이렇게 하고 이번에 저렇게 하고 하나님 이렇게 하시면 저에게 복을 주시려나요?
올해는 성경 몇장 읽고 얼만큼 기도하고 얼만큼 예배드리고 교회에서 봉사는 무엇을 하고
무엇을..무엇을...
여러분 우리가 교회에서 하는 모든 것들이 의미가 없지않습니다.
너무 귀하고 너무 소중하고 너무 감사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그것보다 더 가치를 둬야될게 있다는거에요
이것보다 더 큰거 없고 이것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거에요
예수님을 만나는 것보다 예수님을 경험하는것보다 더 큰 가치 더 귀한 것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중요합니다!
여러분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고 바라는 자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깊이 인격적으로 만나셨나요
한번이 끝이신가요?
우리 삶에서 굽이굽이 마다 여러 상황들마다 예수님을 깊이 만나고 체험해야 합니다.
여러분 될 수 있으면 그것이 모든 예배의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모든 예배의 시간이 예수님을 간절히 찾고 바라고 만나는 시간이 되야 합니다.
이 한번의 예배에 간절히 주님을 찾고 바라고 주님께 예배하는 시간이 되어질 때
깊이 있게 주님을 만나고 계속해서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우리가 되어질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 온전히 집중한 그 한번의 예배가 우리를 회복시키고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그런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은 그런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인격적으로 깊이 있게 경험하게 되면 변화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러기 위해선 주님을 간절히 찾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1예화
제가요 중1때 교회를 가기가 싫었어요. 학년이 바뀌면서 중학생이 되면서
너무 교회가 가기 싫은거에요.
그래서 너무 가기 싫어서 어머니께 가기 싫다고했다가 엄청 혼났어요.
그리고 교회에 와서 처음보는 전도사님을 만나고 선생님들을 만나고 형들을만나서
즐겁게 학생부에 적응하고 교회생활을 재밌게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보니까 전도사님과 선생님들이 말씀을 전하시다가 눈물을 보이시고 기도하면서
눈물을 보이시는거에요. 그래서 그게 저한텐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어느순간 하나님이 어떤분인지
궁금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 기억속에 중1 교회 부흥회부터 하나님을 찾았던것 같아요.
하나님 저도 하나님이 궁금해요. 하나님 저도 하나님 만나게 해주세요. 그렇게 중1, 중2, 중3
3년을 기도했습니다. 간절히 드릴 수 있는 그런 예배마다 생각날 때마다 부흥회나 수련회때마다.
그 3년의 시간동안 하나님을 알아가고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고 여러 부흥회와 수련회를 지나면서
중3 때 정말 깊이있게 인생에서 이것보다 더 간절히 깊게 하나님을 만났던적이 없었던 것 같을 정도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주님을 간절히 찾는자가 되십시오
잠언 8:17 (NKRV)
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잠언에 보니까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고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드리는 금향로 기도회.
그냥 보내지 마십시오. 간절히 깊이 하나님을 찾으세요.
우리의 예배를 그냥 종교 행사나 시간으로 보내지마세요.
하나님을 더 예배하고 간절히 하나님을 찾으세요.
그리고 앞으로 드리는 우리의 모든 예배에 하나님을 깊이 간절히 찾으시길 바랍니다.
간절히 찾는 자가 주를 만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 말씀을 믿고 신뢰함으로 여러분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십시요.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주님을 매 예배마다 깊이있게 만날 때, 우리는 변화될 것입니다.
삶의 걱정 어려움 힘든 여러 상황들 안에서 우리는 자유하게 될 것이구요.
그렇게 나를 붙잡았던 모든 속박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게 될것입니다.
우리 함께 찬양하며 나아갑시다.
<예수 사랑합니다>
여러분, 주님 사랑하십니까?
주님 사랑하십니까?
우리의 마음을 다해서 고백합시다
우리의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주앞에 나아갑시다
하나님이 이 시간 주님을 더 간절히 바라고 원합니다
이 시간가운데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여 한번 부르짖고 기도하시겠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삶의 주인의 자리는 누가 있습니까?
나입니까? 내가 사랑하는 무엇입니까? 재물입니까?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는 누가 우선순위를 잡고 있습니까?
계시록, 3장 15-16절에 보니까요
요한계시록 3:15–16 (NKRV)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여러분 우리의 삶의 자리에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데 예수님 만났다고 하는데
왜 나의 우리의 삶에는 예수그리스도가 안보입니까!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차지도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해서 토해버리겠다고! 차겁든지 뜨겁든지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오늘 이시간 우리의 삶의 자리를 주님께 드립시다
우리의 삶의 우선순위를 주님께 드립시다
우리 함께 찬양하고 기도합시다.
<내가 주인삼은>
우리 주여 한번 부르짖고 기도하겠습니다.
[주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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