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예레미야 3:19-4:4)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1 view
Notes
Transcript
‌‌‌‌‌‌남자들 중에는 뭔가를 만들고 고치고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동드릴로 못을 박고 각종 도구로 뭔가를 만들어내면 그렇게 성취감이 있다고 합니다. 그에 반해서 저는 소위 말하는 똥손입니다. 손재주가 하나도 없어서 손을 대는 것마다 망가질 때가 많습니다. 호기심은 많아서 어렸을 때 아버지가 거금을 들여사오신 비디오 기계가 어떻게 생겼나 한번 뜯어서 보고 싶어서 다 뜯었다가 다시 조립을 못해서 못쓰게 만든 적도 있고, 예전에 이사를 하면서 이케아에서 서랍을 하나 샀는데, 거긴 다 조립을 해야되잖아요. 호기롭게 내가 한번 해보겠다고 나섰다가 종이설명서를 붙잡고 끙끙 거리면서 조립을 다 했는데 다하고 나니 서랍이 안들어갑니다. 그 서랍이 아직도 저희 집에 있는데 볼 때마다 제 똥손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에 반해 제 아내는 손재주가 있습니다.‌새롭게 만드는 것보다 고치는 것에 더 많은 에너지가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만드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새롭게 창조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만든 의도대로 쓰임받지 못하고 고장나버린 것을 원래 의도에 맞게 다시 고치는 재창조는 걷어내야할 것들이 많기에 더 많은 대가지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고쳐서 쓰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말이 있지만 우리 하나님은 철저히 사람을 고쳐서 쓰시는 분이십니다. 창조해주신 주님의 은혜대로 살아가야 하는데 우리의 끈질긴 죄성과 악함 때문에 고장나기 일쑤인 우리들을 고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다셔야만 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배역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배역함을 고치시겠다고 하십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이 배역함에서 돌이킬 수 있을까요?‌‌‌‌‌‌‌
배역함에서 돌이키려면

1. 우리를 고치시는 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19-22)

내가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든지 너를 자녀들 중에 두며 허다한 나라들 중에 아름다운 기업인 이 귀한 땅을 네게 주리라 하였고 내가 다시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나의 아버지라 하고 나를 떠나지 말 것이니라 하였노라

19절에 보니 짧은 한 절에 ‘내가 말하기를’이란 표현이 두 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있으시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누릴 복에 대해 하나님은 이미 성경에 기록해놓으셨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그 복에만 관심이 있지 하나님의 말씀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자녀들 중에 두시고 허다한 나라들 중에 아름다운 기업인 귀한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 하셨지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떠나지 않아야 자녀로서 누릴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에 이 땅에서의 육적인 순종도 할 수 있습니다. 그 순종을 통해 우리의 기업이 아름다운 기업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소산으로 먹고 살 수 있는데 우리는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가지길 원하고 더 누리길 원합니다. 그런 우리의 죄성 때문에 점점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 것이지요. 만족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진짜 좋고 아름다워 보이는 땅이 귀한 땅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이 하나님이 주신 땅인 것을 깨닫는 것이 귀한 땅입니다. 그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사건도 허락하시고 고난도 허락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나게 해주기에 우리가 당하는 사건과 고난이 아름다운 기업인 귀한 땅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네비게이션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족속아 마치 아내가 그의 남편을 속이고 떠나감 같이 너희가 확실히 나를 속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0절, 겉으로는 예배도 잘 드리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처럼 보였지만 말씀의 가치관으로 바뀌지도 않고 거듭나지도 않으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저 종교적인 열심으로 믿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능력이 없으니 아무리 열심을 다해 섬겨도 결국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고 우리의 존재와 신분이 바뀌는 것이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여전히 이 땅에서 종노릇하고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의 노예로 하나님을 믿으니 기쁨도 없고 감격도 없는 행위로 주님을 섬길 수밖에 없습니다. 열심히 섬기는 것으로 우리의 믿음을 증명하고 싶어하지요. 믿음도 내 노력으로 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하나님께도, 또 사람에게도 인정받고 싶지만 그런 믿음은 나도 속이고 남도 속이는 믿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지 않으시지요.

소리가 헐벗은 산 위에서 들리니 곧 이스라엘 자손이 애곡하며 간구하는 것이라 그들이 그들의 길을 굽게 하며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렸음이로다

그렇게 대단한 열심으로 아무리 교양있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애곡의 소리가 헐벗은 산에서 들리게 되는 것이 헛된 열심의 믿음입니다. 결국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렸기에 그들의 길이 굽어질 수밖에 없었고 애곡과 간구의 울부짖음이 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야망은 사망으로 나타나고 사명은 생명으로 접붙여진다고 하셨는데 저는 사역을 하면서도 사명보다는 인정받고 싶고 성공하고 싶은 야망을 더욱 앞세우면서 해왔던 것 같습니다. 우리들교회에 와서 말씀을 듣고 양육을 받으면서 아, 이게 내 야망이구나를 알게 되었음에도 눈에 보이는 아름답고 귀한 땅이 포기가 되지 않아서 여전히 존재와 신분이 바뀌지 못한 채 열심만 가지고 사역을 했습니다. 그것을 스스로 대단하다고 여겼기에 저 자신도 속이고 남도 속이면서 사역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제가 그렇게 속이고 있다고 생각을 하지도 못했지요. 그러나 속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제가 저 스스로 길을 굽게 하며 하나님을 잊어버렸다고 말씀으로 지적하시면서 두번의 공황발작과 치리의 사건을 통해 어그려저 있는 저를 일깨워주셨습니다. 공황으로 숨을 못쉬게 되는 고통의 시간과 치리로 근심 가운데 있던 그 당시에는 옷을 찢고 재 위에 앉아 회개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 부르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눈물로 기도도 했습니다. 그러나 조금 괜찮아지고 상황이 좀 나아지니 이제는 그 치리를 받은 것마저 저의 사역의 면류관이 되는 것처럼 여겨지고 또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전자동으로 또다시 교만의 자리를 찾아가려는 저의 뿌리깊은 죄의 관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 저의 모습을 가장 잘 아는 것이 저의 아내이지요. 남들이 보기에는 평범하고 교양있고 재미까지 있는 사역자 가정으로 보였는지 모르겠지만 애곡과 간구하는 소리가 그 때마다 터져나왔습니다. 서로가 참 안 맞아서, 살아온 삶이 달라서 이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번에 말씀을 묵상하면서 다시 한번 THINK를 해보니 저희 가정을 굽게 했던 것도 다름아닌 목사인 저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렸던 것도 바로 목사인 저였기에 애곡의 소리가 터져나올 수밖에 없었겠다는 것이 인정이 되었습니다. 최근에도 아내가 저에게 당신은 나를 호구처럼 여기는 것 같다는 말로 소리를 낸적이 있습니다. 내가 언제 그랬냐, 나는 그런 적이 없다고 생각을 하고 당장에는 억울한 마음이 올라왔지만 돌이켜보면 제가 공황발작으로 아팠을 때도 돈 사고를 쳐서 치리를 받고 괴로워 할 때도 늘 저를 참아주고 기다려주는 것이 아내였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참 아내를 외롭게 하고 말과 행동으로 무시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이 너무 인정이 되어서 참 회개가 많이 되었습니다.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하시니라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또 저를 향해 하나님께서 배역한 자식들이라고 하십니다. 배역하다는 단어를 사전에 찾아보니 ‘은혜를 저버리고 배반하다’는 의미가 있더라구요. 은혜를 저버리고 배반하는 배역한 자들은 쫓아내고 끊어내는 것이 마땅할텐데 오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돌아오면 그 배역함을 고치시겠다고 하세요. 여기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꺾일 줄 모르는 사랑과 의지가 담겨있습니다. 돌아오기만 하면 과거의 죄악이 무엇이든 묻지 않고 용서하실 뿐 아니라 배역으로 인한 실패와 상처까지도 치료하고 회복시켜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신데 마치 자존심도 없으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에는 자존심이 필요가 없지요. 당신의 백성을 어떤 경우에도 놓거나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을 떠나고 잊어버린 죄인인 우리가 자존심을 내세우며 돌이키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이겠습니까? 죄인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존심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를 자녀로 삼으신다는 거룩한 자존감입니다. 내 것을 굽히고 들어가는 것이 수치가 아니라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에도 버티고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아 심판을 당하게 되는 것이 수치입니다. 망하고 훼파되고 무너져서라도 하나님께로 가는 사람이 가장 믿음의 사람입니다.
헛된 열심과 거짓된 믿음으로 가족들과 하나님을 속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의 어떤 배역함을 주님꼐서 고쳐주셔야 할까요? 그것을 위해 나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주님꼐로 돌아가기로 결단하십니까?
배역함에서 돌이키려면

2. 헛된 열심이 아닌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3:23-4:1)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에서 떠드는 것은 참으로 헛된 일이라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

23절, 아무리 큰 산과 작은 산에서 기도하고 떠들고 외치며 종교적인 열심을 내어도 그것은 헛된 일이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이성과 지성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신앙적인 만족감을 누리는 것도 자기 자신이 기준이 되기 때문에 우상처럼 섬기게 됩니다. 또 수가 틀리면 언제든지 내던질 수 있는 믿음입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던 제사장들이 얼마나 요란하고 복잡하고 고행을 차저하다 못해 자해까지 하면서 그들의 신을 섬겼습니까. 이단들도 얼마나 괴성을 지르며 섬기는지 모릅니다. 자기 만족으로 믿음의 수준을 결정짓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다고 고백한다면 회개도, 섬김도, 예배도 그 방법까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야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날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찾고 우리의 죄를 찾고 적용할 것을 찾는 이유지요. 그래서 큐티는 영적성장을 위한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뜻대로 살아가기 위해 날마다 살아가야하는 삶의 과정인 것이지요.

부끄러운 그것이 우리가 청년의 때로부터 우리 조상들의 산업인 양 떼와 소 떼와 아들들과 딸들을 삼켰사온즉

24절, 말씀대로 믿고 살고 누리지 못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부끄러운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부끄러운 그것이라고 번역된 단어의 뜻은 우상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겨도 우상처럼 섬길 수 있다는 것이지요. 왜 그렇게 우상처럼 섬기려고 할까요? 우리 가정의 기복적인 안정과 물질과 풍요, 평안을 위해서이지요. 예수 믿어서 잘 되었다, 성공했다, 풍성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니 그렇게 주님을 우상처럼 섬긴 것이 도리어 그 재산과 자녀들을 삼키는 것으로 결론이 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식을 우상처럼 키우기 위해서 최고의 학교를 보내고, 최고의 직장을 보내고,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는데 도리어 세상에 삼켜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치 중에 눕겠고 우리의 치욕이 우리를 덮을 것이니 이는 우리와 우리 조상들이 청년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25절, 우리의 재산과 자녀들이 삼켜진 것이 우리의 수치와 치욕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하나요? 결국 우리와 우리 조상들이 청년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했기 때문이고 우리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합니다. 자녀가 삼켜진 것이 다 부모의 범지와 불순종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문제아는 없고 문제 부모만 있다는 것이 바로 이런 데서 나오는 말입니다. 재산과 자녀가 삼켜지는 것이 너무나도 아프고 괴로운 일이지만 그 때라도 깨닫고 돌이키고 회개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고치시고 구원해주십니다. 회개는 우리의 전인격이 돌이키는 것입니다. 입으로만 회개하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아무리 고급 과외를 받아도 자기가 공부를 해야 실력이 늘지 비싼 돈 준다고 내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말씀이 살아서 숨쉬는 우리들교회에 있어도 날마다 우리가 그 말씀의 인도함을 받고 적용하고 말씀 때문에 살아나야 구원의 감격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교회 뜰만 밟는다고 대단한 믿음이 절로 생기는게 아닙니다. 수치와 치욕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서 돌이킨다는 것은 내 삶에 버려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4장 1절 말씀처럼 깨달아도 버리려면 얼마나 마음이 요동하겠습니까. 이런 것도 이제 못하냐며 서운하기도 할 것이고, 그동안 쌓아왔던 것을 내려놓는 것이 아깝기도 하고, 우상 삼았던 것을 내려놓고 살아간다는 것이 두렵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당한 나의 수치와 치욕이 내 삶의 결론이라고 여기며 회개할 것을 찾고, 그것을 고쳐주시길 말씀과 공동체에 부탁하며 갈 때 우리 삶의 구원이 임하는 역사가 찾아오게 되는 줄 믿습니다.
저는 참 먹는 것을 좋아합니다. 예전에 어떤 광고를 보니 이런 문구가 있더라구요. 여러분! 많이 먹어서 살이 찌는 게 아닙니다. 저는 그 문구를 보며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제가 그렇게 많이 먹는 편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말에서 뼈를 맞은 것처럼 아팠습니다. 여러분! 끊임없이 먹어서 살찌는 겁니다. 제가 자주 먹긴하거든요. 끊임없이 먹었던 제 삶의 결론으로 담낭을 절제하는 수술도 하고 살이 빠졌다가 다시 담낭을 주님이 창조해주셨는지 또 조금씩 잘 먹기 시작하니 금새 또 살이 쪘습니다. 이렇게 늘 넉살스럽게 이야기를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만큼 심각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번 주일설교 때 한달만 더 주시면 살을 빼보겠다고 했는데 물론 그때보다는 조금 빠지긴 했지만 살을 잘 못 빼는게 참 적용이 안되는 제 모습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처럼 먹을 것을 너무 좋아하고 조절이 안되는 게 제 작은 딸입니다. 밥을 먹어도 금새 배고픔을 느끼고 밥을 먹으면서도 밥 먹고 또 뭘 먹을까를 생각하는게 저희 둘째딸입니다. 검사를 받아보니 MC4R이라는 유전자 변이로 배부름을 느끼지 못하고 그래서 식욕조절이 어렵다는 결과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유전적인 현상이기에 저와 아내도 유전자 검사를 받았습니다. 저와 아내에게 유전 요인이 반반이 있다는 결과를 받았습니다. 이제 7살, 어린 나이인데도 지방간 판정까지 받고 너무 어리기에 약을 쓸 수도 없는 상황이라 전적으로 식이조절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고 그때부터 칼로리 계산을 하며 식단을 조절해야만 하는 긴 싸움에 들어갔습니다. 늘 배고파하는 아이와 그것을 보고 힘들어하는 아내의 씨름이 시작되었는데 저는 참 심각한게 없어서 그냥 그런가보다 하며 무심하게 대헀습니다. 저는 밖에서 식사를 하고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늘 그 힘든 시간을 아내가 오롯이 견디고 또 둘째가 견뎌야 했습니다. 문자적으로 유전자에 문제 있는 문제아빠가 맞는데 그것으로 인해 제 아내와 둘째가 삼켜지는 것 같은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보면서 뭐 그렇게까지 해야하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둘째가 삼켜지는 것 같은 진단을 받았음에도 그것을 저의 수치로 여기지도 않고 치욕으로 느끼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가끔 집에 있는 날에는 밥 문제로 짜증을 내는 딸을 보면서 제가 더 짜증을 내고 정색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먹으니까 살이 찌는거야라고 말을 해대면서 말이죠. 정작 저희 집에서 제가 제일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데 말입니다. 그런 제 모습을 보면서 아내도 많이 힘들어했습니다. 이번 주에 병원에 가서 검사를 다시 받았습니다. 아내가 수고했고 또 무엇보다 잘 참고 견뎠던 둘째 아이의 적용으로 간수치도 좋아졌고 오늘 환자 중에 최고의 어린이라고 칭찬을 받았다고 합니다. 참 감사하면서도 그에 반해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고 있는 제 모습이 오버랩되었습니다. 죄를 보는 것 같고 깨닫는 것 같지만 순종이 안되고 순종이 안되니 적용도 못하는 제 모습이 참 한심해보였습니다. 이 모든 과정들을 겪으면서 우리 가정에서 제일 적용이 안되는 사람이 목사인 나구나라는 생각이 드니 참 슬픈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제 저도 곡기를 좀 끊고 다시 운동을 시작하면서 영육간의 안녕을 위한 적용을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제가 몰래 뭔가를 먹고 있는 것을 보신다면 등짝을 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기복을 구하는 부끄러운 우상숭배와 헛된 열심으로 우리의 재물과 자녀가 삼켜진 것이 있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우리 삶의 결론임이 인정되시나요? 온전한 회개로 돌이키기 위해 버려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3. 묵은 땅을 갈고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하나님께 속해야 합니다.(4:2-4)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면 나라들이 나로 말미암아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

2절, 하나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우리의 의지만 가지고서는 안됩니다. 날마다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는 말씀묵상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함께 나누고 가면서 서로의 거룩을 견인해주는 공동체가 있어야 합니다. 나에게는 어떤 소망도 없고 날마다 주님이 도와주셔야 한다고 고백하며 가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못해 다시 부끄러운 그것, 우리 본연의 죄된 삶이 튀어나오게 됩니다. 말씀으로 변화된 삶이 있어야 그것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고 내가 만난 하나님을 통해 그들도 하나님을 주로 고백하며 자랑하게 됩니다. 이번 여름 국내와 전세계 곳곳에서 우리가 말씀으로 살아난 삶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예수 믿어서 잘 되었다고 자랑하는 고백이 아니라 내 삶의 결론으로 수치와 치욕 가운데서 내가 하나님을 만나 돌이켜 살아난 이야기를 나누니 우리 성도님들의 간증을 듣고 다시 주님을 자랑하려는 영혼과 가정과 교회가 열매로 나타났습니다. 삶으로 전하는 복음이 가장 효과적인 복음이라고 하셨는데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는 우리들교회의 양육과 목장이 빛을 발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와 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

3절, 묵은 땅을 갈라는 것은 그동안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았던 것들, 그리고 자랑해왔던 것들, 족보나 혈통, 스펙이나 외모를 자랑하지 말고 주님을 자랑하는 삶으로 갈아엎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누었던 간증과 은혜가 과거의 것이 되지 않도록 날마다 주시는 은혜로 조금만 둬도 묵은 땅이 되어버리는 우리의 마음을 갈아엎는 기경을 계속해서 해나가야 된다는 것이지요. 저는 농사를 해보진 않았지만 땅을 갈아엎는다는 것은 대단한 에너지가 들어가는 노동입니다.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가장 편한 일이지만 묵은 땅을 갈아 엎어야 옥토가 됩니다.옥토는 어떤 쓰레기, 유리조각, 오폐물도 받아내는 땅이라고 하셨어요. 내 안에 여전히 그런 것들을 가리는 것이 있고 차별하는 것이 있다면 여전히 내 마음밭이 묵은 땅이고 가시덤불이라는 말입니다.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4절, 회개를 하고 돌이킨다는 것은 스스로 할례를 행하는 고통이 따르는 일입니다. 우리의 마음 가죽을 베야 하는 것은 참 아픈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야 여호와께 속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면 마음이 아플 일이 참 많아지게 됩니다. 변하지 않는 주위의 사람들 때문에 힘들고, 고난의 사건이 끊이질 않아도 내 죄가 보이니 아픕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럼에도 사랑이 없고 변하지 않는 우리 자신의 모습 때문에 참 아픈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하지 않아서 계속 악 가운데 있으면 끌 수 없는 불과 같은 하나님의 분노 앞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깨닫고 가야 합니다.
지난 5월, 어린이날에 하나님께서 저희 가정에 셋째 아이, 아들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이제 백일이 지났는데요. 태어난 날이 주일이었는데 그 날 본문이 열왕기하 10장, 네 마음도 진실하냐의 본문이었습니다. 여호나답은 “네 마음도 진실하냐”라는 질문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고 하나님 앞에 진실하지 못했던 자신을 생각했지만, 예후는 이기고 또 이기고 있기 때문에 자신은 진실하다고 사람에게 진실함을 보이는데 만족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진실은 하나님이 100% 옳으시기에 내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저도 늘 아버지 눈치, 사람들 눈치를 보면서 정작 하나님 앞에서는 진실하지 못한 인생을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늘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헛된 열심으로 계책을 세우고, 그 계책에 의존하며 살았는데 그 열심이 헛되었기에 진실하지 못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인정이 되었습니다. 늘 우리는 말씀을 듣고 이름을 짓잖아요. 그래서 아버지 ‘다’ 자에 진실할 ‘진’자를 써서 ‘다진’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다진이가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살아가길 원하는 마음으로 지었지만 무엇보다 다진이를 볼 때마다 저 스스로에게 ‘네 마음이 진실하냐’고 물어보시는 하나님을 떠올리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벌써부터 그러지 못할 때가 많지만 아들에게도 늘 하나님 앞에 진실한 아버지로 서 있는지를 보이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나게 하는 것 같습니다.

마무리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우리의 배역함에서 돌이키려면 우리를 고치시겠다고 하시는 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헛된 열심이 아니라 회개의 자리로 날마다 나아가야 합니다. 조금만 내버려둬도 묵은 땅이 되어버리는 우리의 마음밭을 날마다 말씀과 공동체를 의지해 갈아엎고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하나님께 속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은혜를 저버린 배역함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지만 배역함으로 하나님을 떠나려고 하는 저희들입니다. 받을 복은 계수하면서도 이 땅을 사모하며 스스로 서려고 하는 교만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기는 싫어하려는 저희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늘 그렇게 하나님을 속이려고 하는 저희입니다. 그러나 그런 삶의 결론이 애곡소리가 터져나오는 굽은 길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하십니다. 이제 배역한 우리를 고치시겠다고 하시는 주님께로 돌아가 다시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시라고 고백하는 저희 모두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헛된 열심이 아니라 참된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게 하시고 우리의 재물과 자녀들이 삼켜진 수치와 치욕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불순종했던 우리의 삶의 결론임을 깨달을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날마다 진실과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 우리의 묵은 땅을 기경하게 도와주시고 말씀의 공동체와 함께 할례를 행하며 하나님께 속하는 저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레미야와 같이 눈물로 우리를 위해 애통함으로 기도하시는 담임목사님을 기억하여주시고 영육간의 강건함을 허락하여 주셔서 하시는 모든 사역 가운데 성령의 열매가 나타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특별히 10월에 있을 목회자세미나 가운데 말씀이 들려야 할 한 영혼을 보내주셔서 말씀대로 믿고 살고 누리는 복이 임할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양육과 교육부서와 청년국 가운데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셔서 살아내고 살려내는 은혜가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좌우와 남북으로 분열되어 있는 이 나라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예레미야와 느헤미야 같은 위정자를 허락하여 주셔서 이 나라를 위해 눈물로 기도를 뿌리며 무훼진 성벽을 중수할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모든 악법이 막아지고 생명을 살리는 법들이 세워질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