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죄와 싸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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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연약함, 죄와 형벌
우리의 연약함, 죄와 형벌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사랑합니다! 드림인 예배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고 싶다. 집에서 누워있는게 쉬운가? 운동하는게 쉬운가? 또 멋진 몸을 만드는 것이 쉬운가? 살찌는 게 쉬운가? 성적 올리는게 쉬운가? 떨어지는 것이 쉬운가? 친구관계나 주변 사람관계를 잘 지내는게 쉬운가? 포기하는게 쉬운가? 도미노를 쌓는게 쉬운가? 무너뜨리는게 쉬운가? 좋은 성격이나 좋은 말의 습관을 가지는게 쉬운가? 내 감정대로 하는게 쉬운가? 그렇다. 이 질문에는 공통되는 한 가지 포인트가 있다. 무언가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과 자기를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군대에 입대하면서 제일 힘든 때가 언제이겠는가? 훈련소에서 생활이 제일 힘들다. 왜인가? 진정한 군인으로 만드는 과정이기에 5주 동안 빡세게 훈련하며 전쟁터에 전투를 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좋은 사람이 되기가 힘들고 마음대로 사는게 편할까? 성경에서는 그 이유가 우리 안에 무엇이 있기 때문인가? ‘죄’가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한다. 롬3: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여기에 있는 저나 여러분을 포함한 모든 사람은 죄 아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에 대해서 본질적으로 말할 때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그 죄의 값이 그대로 죄의 DNA로 모든 인류에게 들어온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기 전에는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고 하나님의 음성도 길을 걷다가도 쉽게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범죄한 이후로는 그렇게 친밀했던 관계가 깨지고 만 것이다. 죄라는 것은 죽은 상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영혼과 육체가 죽은 상태이다. 죽은 사람이 음성을 들을 수 있는가? 옆에서 말은 한다고 해서 반응하는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게 인간의 육체와 영혼이 죽어버린 상태가 ‘죄’의 상태라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서서히 어떻게 되는가? 부패하고 썩기 마련이다. 내 안에 생명이 없으면 악취와 썩은 것들로 가득차게 된다.
그렇기에 모든 인간은 선한 것이 조금도 없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죄에 상태에 빠졌기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알 수도 찾을 수도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구원의 길로 ‘피의 제사’로 백성들의 죄를 깨끗하게 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완전한 피의 제사가 단번에 이루어지게 된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성경에서는 말한다. 그러나 죄악된 인간은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알아가자고 하면 힘들어하고 지극히 싫어한다. 그러한 마음에 선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래서 바깥에 나가서 전도하려고 하면 예수님에 대해서 전할 때 치를 떨며 싫어하거나, 듣기를 거부하는 반응도 죄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지도 영접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아담의 원죄의 영향으로 모든 인류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영혼이 되었다. 그래서 배우지 않아도 죄를 알며 범죄를 그치지 않고 죄를 좋아하는 인생이 되었다. 온몸에 독약이 퍼지듯이 구석구석 다 병들어 버린 인간은 죽음의 심판을 두려워하며 살게 되었고 소망이 사라졌다. 이렇게 전적인 타락 속에 사는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아니고는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우리를 구원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이해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공평하시다고 고백해야 한다. 우리가 아담 안에서 범죄했음을 인정해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된다. 아담의 죄로 정죄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역시 죄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죄인이라고 스스로 인정하여 구원받아 의인이라고 하나님이 여겨주시면 우리는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인가?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거듭나서 변화되었지만, 자신 안에 죄가 있었음을 고백한다. 그렇게 예수님을 만나서 신앙생활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려고 선을 행하기 원하는 바울에게 악이 함께 있었다. 그렇기에 바울의 마음 속에는 갈등과 싸움이 있다. 그리고 싸움의 결론은 죄로 기울어진다. 죄에게 늘 진다는 것이다. 이래서 바울은 이렇게 부르짖는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죄 때문에 죽어야 할 몸이다. 사망선고가 내려진 몸이다. 죄의 결과값은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구원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이다. 그러나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25절을 자세히 일어보면 이상한 여운을 남기게 된다. 마치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여전히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만, 죄악된 본성으로는 죄의 법에 복종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이 승리가 주어졌지만, 여전히 마음 속에서 싸워야할 싸움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최후 승리를 보장받는다. 그러나 이 땅에서 완전히 승리한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미” 꺾으셨다. 하지만 완전한 승리는 “아직”오지 않았다. 그 승리는 언제 오는가?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 완전한 승리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지금까지의 모든 신약의 성도들은 두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미” 승리했지만 구원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미”와 “아직”사이에 긴장이 있다. 바울은 6장에서 이미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다시 죄가 너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의(하나님의 뜻)에게 순종하라고 말한다. 죄의 세력은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하심으로 이미 꺾였다. 그러나 여전히 그 악한 세력의 힘이 남아 있다. 아직 최후의 승리가 오지 않았다. “이미”구원 받은 성도들은 완전한 승리를 바라보면서 싸워야 할 싸움이 여전히 남아 있다. 죄와 싸워야 한다. 언제까지인가?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그 은혜를 “값싼 은혜”가 되지 않게 해야 한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로 구원받고 의로운 자가 되었으니 이제는 막 살아도 된다는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것이 은혜를 하찮게 여기는 것이다.
(강대상 앞으로 간다) 마치 내가 앞에 있는 누군가가 받아야 할 무기징역의 죄를 대신해서 감옥에 갔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은 은혜를 받은 것 아니겠는가? 굳이 그렇게 할 이유도 없는데, 사랑한다는 이유로 대신 값을 치룬다고 대신해서 감옥에 들어갔는데, 또는 사형을 당했는데 똑같은 범죄를 그 사람이 저지른다고 하면 얼마나 배은망덕한 일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막 사는 모습은 마치 이와 같다.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 값과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무한한 구원의 은혜를 완전히 무시하는 배은망덕한 삶이라는 것이다. 받은 은혜를 기쁨과 감사로 갚으려고 노력하기는커녕, 잘못된 승리감과 우월주의에 빠져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살아간다. 물론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구원받은 자들은 사탄과의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이겼고 승리했다. 그러나 이 승리를 맛보려면 먼저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어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워야한다.
하지만 피흘리기까지 싸우려고 하지 않는다. 눈치를 보고 적당히 죄와 타협하며 산다.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영적인 전쟁에서 최선을 다해 죄와 싸워야 함에도 불구하고, 싸우지 않은 채 근거 없는 승리주의에 도취되어 무책임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잘못된 승리감에 도취된 삶으로, 땀과 노력 없이는 승리의 기쁨을 누릴 수 없다는 진리를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롭다고 선포된 사람은 반드시 믿음을 통해 그 사실을 늘 기억하고 의롭다고 선포된 사람으로써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매일매일 끊임없이 습관처럼 짓는 죄 때문에 죄책감에 빠져 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사탄과의 전쟁에서 계속해서 패배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영적인 패배감에 빠져,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잊어버리며 살아간다. 정말 책임감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은 놓여진 삶 때문에 패배를 자주 경험한다.
수련회 때나 어떤 집회나 예배 때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보겠다고 결단하고 실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면 여전히 습관처럼 짓는 죄 때문에 길어야 3일 만에 아니면 예배당 나오자마자 결단했던 것들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자책하고 하나님 앞에 예배로 나오기가 두려워지면서 패배감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나의 의지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고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러면서 삶 속에서 매일매일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우지만 자꾸 패배하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자신의 모습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정에서 이미 의로운 자로 선포된 자기 스스로의 “위치”와 “상태”를 기억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들을 의롭다라고 여기시는 것은 진짜 의로워서가 아니다. 의로운 사람으로 만들어가겠다는 하나님의 선포이다. 우리가 아무리 성경의 말씀대로 철저히 지킨다고 해서 누구도 의로워질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하나님께 인정받을 만한 완벽한 의로움을 갖는 것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고백한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로움에 의지할 때만 의롭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께만 소망을 두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 희망이 있다.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리하여 날마다 주님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음을 고백하기 원한다. 아이가 넘어지거나 다치면 엄마를 찾으면서 울부짖듯이 우리가 넘어질 때마다 예수님을 찾기 소망한다. 예수 이름에 능력이 있기에 날마다 그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끝까지 죄와 싸워 이기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