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명료한 삶의 유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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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Introduction: 미니멀리즘
요즘 가장 관심 있는 개념 중 하나는 미니멀리즘 입니다.
개인적으로 그동안 모아온 싸구려 캠핑용품들을 다 처분하고
꼭 필요한 것만 남겨서 쉬러 가고 싶을때 단촐 하게 떠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미니멀리즘에도 돈이 듭니다.
내가 원하는 기능과 퀄리티 그리고 내가 정말 원했던 디자인을 만족시키는 구성은
언제나 이름 값이 붙고 그만큼 비용을 치뤄야 합니다.
어지하던 저는 저의 모든 물건과 삶의 일정이 군더더기 없이 간단명료 했으면 좋겠습니다.
일할때 최선을 다해서 일하고 쉴 때도 마찬가지로 충만하게 쉬고 싶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버리지 못해 쥐고 사는 것들이 많고
혹시나 해서 붙들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본문은 이런 면에서 해답이 될만한 삶의 방식을 보여줍니다.
바울에 대해 우리는 꽤 많은 정보를 알고 있습니다.
명문학파에서 공부 한 지식이고
바리새파로서 아주 철저한 영성생활을 하였고
회심 후에는 아주 열정적으로 전도여행을 다녔습니다.
그리고 신학적으로 일가를 이룬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공식적인 프로필 이라고 한다면
키가 아주 작았고 안질로 고생하였으며,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고 고생도 많이 하였고
평생 결혼도 안한 사람이라는 정도의 개인 신상정보는 빈약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을 딱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 나는 이미지는 1,2,3차 전도 여행 입니다.
열정적 복음 전파자 라는 이미지가 가장 강하게 떠오릅니다.
그의 신변 잡기에 대한 이야기나 뒷얘기는 거의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의 인생자체가 단순명료한 삶이었습니다.
인생의 고해의 바다를 건너며, 번뇌를 지고 가는 인생이 어떻게 고민이 없고 상념이 없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의도적으로 그의 삶을 단순명료하게 살았습니다.
언제든 복음을 전할 준비를 하고
기회가 주어지면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핍박을 당하고 돌에 맞아도 다시 회복되면 즉시 그가 계속 하던 일, 해야 하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전도는 무작정 생각 없이 주어지는 대로 닥치대로 사는 삶도 아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할수록
신자의 삶은 단순하고 명료해집니다.
사실, 신앙생활 제대로 하다보면 사람 만날 시간도 잘 못냅니다.
예수 믿으면 술친구, 밥친구 다 정리 됩니다.
그렇게 되면 외로울 것같은데
역설적으로 단순명료한 삶에는 수 많은 유익들이 존재 합니다.
성경의 어떤 인물도 공사가 다망하여 기도할 시간이 없고
예배할 시간이 없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사도 바울과 다른 모든 믿음의 선진들 처럼,
단순하고 명료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1.단순한 방식 2.명료한 행동과 목적
1.단순한 방식
단순한 방식으로 살아가면
걱정이나 망설임도 없고 스트레스도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수 많은 곳을 여행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장소를 옮기는 것은 스트레스가 아니었던 것같습니다.
해오던 방식, 배운대로 예수만 전하고 하나님만 높이면 되었기 때문 입니다.
카타 토 아우토(κατὰ τὸ αὐτο) - 주님의 방식을 따라(습관을 쫓아)
사도바울은 그야말로 단순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안디옥-구브로(살라미-바보, 섬전체 횡단)
버가—>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루스드라—>더베
루스드라 → 이고니온 → 비시디아 안디옥 → 버가 → 앗달리아 → 안디옥(수리아)
2년간 이동거리만 2240Km 였습니다.
여행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짐은 가벼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의 마음 자세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의 생활방식 뿐만 아니라, 그의 사역 방식도 무엇인가 확고한 원친에 따라 단순화 되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공생에서 아주 특징적인 삶의 방식이 이 단순성을 잘 보여줌.- "습관을 쫓아”(눅22: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바쁘면 바쁠 수록, 신앙생활을 메뉴얼화 하는 것은 유익이 됩니다.
그래야 소모적인 걱정과 스트레스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구브로에서 하던 방식 그대로 이고니온에서도 실행 합니다.
이것도 일종의 시스템화 하고 메뉴얼화 하는 것입니다.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한글 버전에서는 번역을 하지 않은 헬라어 원문 문장이 있습니다.
카타 토 아우토(κατὰ τὸ αὐτο)- ‘평소와 같이’ (same as usal)
카타 토 아우토(κατὰ τὸ αὐτο)- ‘평소와 같이’ (same as usal)
“The same thing occurred in Iconium,”
무엇인가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내야 겠다는 것보다는
원래 하던 방식을 따라 가자 라는 생각 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실때 즐겨 하던 방식
'교육(Teaching)', '전파(Preaching)', ‘치유(Healing)'
세부일정을 보면,
아침 정한 시간에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천국복음 전파, 병고치심
내 생각으로 조금 더 좋고 개선된 방식으로 해야 겠다가 아니고
겸손하게 주님의 방식을 겸허하게 따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방식에는 뚝심과 인내가 필요 합니다.
그리고 겸손이 필요 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통해 가장 완벽한 천국복음전파 방식과
사역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방식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연히 사도들은 예수님을 닮기를 원했고 그렇게 살기를 원했습니다.
사도들이 자신의 생각으로 단순한 삶의 방식을 착안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기에 그들도 그렇게 살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열정으로 전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 자체가 복음전파였기에
그들도 전한 것입니다.
오랜 기독교의 역사속에서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의 깊은 영성의 핵심은
토마스 아킴퍼스의 책의 제목 처럼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의 실천 이었습니다.
이것은 반복적이고 단순한 그들의 영성생활 이었습니다.
날마다 기도하면 음성을 들려주시어 해야 할 일과 가야 할 곳을 알려주시고
날마다 말씀을 주야로 읽고 묵상하면 지혜를 주시고 하늘의 신령한 진리를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반복과 단순함은 아주 강한 힘이 있습니다.
우둔하던 자가 지혜로워지는 유일한 방법이며
포악하고 잔인하던 자가 자애로와 지는 유일한 방법도 이뿐 입니다.
날마다 주님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단순한 삶의 방식의 또다른 유익은
오래 있을 수 있는 꾸준함을 주고
떠나야 할 때 과감히 떠날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단순하게 반복적으로 무슨 일이든 하다 보면 능숙해지고
신앙적 으로는 영성이 깊어집니다.
사도들이 반복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많은 반대와 위협을 직면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본문에서는 유대인들이 두 사도의 이방 선교를 방해 했다고 말합니다.
자신들이 안 믿는 것으로 모자라 전도대상자들인 이방인들을 선동하고 두 사도를 향해 악감을 품게 합니다.
여러분 올해가 가기 전에 이루고자 하는 일이 있습니까? 아니면 장기적인 목표가 있습니까?
근데 문제는 장애요소가 항상 찾아 옵니다.
그럴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래 해야 합니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3절
단순한 마음으로 반복적으로 오래 버티며 해내는 꾸준함이라는 ‘재능’이 필요 합니다.
눈치채셨습니까?
제가 꾸준함을 말하면서 재능이라는 단어를 사용 했습니다.
보통 재능은 무엇입니까?
탈렌트, 기프트, 타고나서 특출난 능력 등등으로 정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재능이 아무리 많고 좋아도 꾸준함이 없으면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꾸준함을 이길 재능은 없다”
열심히 꾸준히 하면 잘하게 되고 그게 재능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천재적 재능을 가지고 있어도 그 재능을 키우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손흥민은 재능이 있었는지 누구도 몰라도 그가 꾸준하고 쉬지 않고 노력했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하루에 몇천개씩 리프팅을 하고 매일 매일 훈련을 거른적이 없다고 합니다.
두 사도는 박해가 오고 회방이 있어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곳에 오래 있었습니다.
그리고 꾸준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믿는 자들은 중간에 포기 하지 말고 오래 버텨야 하고
더 중요한 것은 내 힘으로 버티는 것이 아니고 아무생각 없이 버티는 것이 아니고
“주를 힘입어 담대함”
어려움과 회방이 오면 위축 되는 것이 아니라,
주를 힘입기 위해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맞서야 합니다.
오래 버틸 수 있는 힘이 나의 인내심 이나 근성이 아닌
주님의 일하심을 보면 견딜 수 있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들에 확신이 떨어질때 그만두고 싶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네가 가는 길이 맞다고 표적(사인)을 주시고 이적을 일으키시면
확신을 되찾고 오래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래 있기 위해서는 표적과 이적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의 은혜를 증명하고 증언하시기 위해 보이시는
우리 맡은 자리에서 열심히 꾸준히 일 하는 것 자체가 전도의 밑거름이 됩니다.
때를 기다리며 오래있어 주를 힘입어 꾸준하게 사역을 감당하다보면
하나님이 일하실 밑바탕이 조성이 되고 그때부터 하나님이 일하시기 시작합니다.
세례 요한과 같은 마음으로 우리는 오래 참고 기다리고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표적과 기적을 찾아 확신 가운데 거하고
오래 참고 견뎌야 합니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3절
나의 꾸준함과 한결같고 사심 없는, 단순한 순종을 쓰셔서
하나님을 드러내 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한 곳곳 마다 하나님의 계획한 일을 행하시는 날이 옵니다.
어둡던 이고니온에 하나님의 빛을 비추사
허다한 사람들이 구원 받는 역사는
이렇게 오래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중에 주님의 힘을 의지하여 꾸준히 담대히 전파한 결과는 분명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빛으로 사용하여
세상에서 영광 받으시길 원하시고
그것을 통해 많은 사람이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단순한 삶에는 이런 강한 바위를 뚫는 물방울 처럼 꾸준함 이라는 유익이 있습니다.
오래 마치 물이 차올라 넘치는 순간이 오듯, 끝내 하나님이 일하시는 임계점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때부터는 우리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그때가 되면 이제 모든 것이 표적과 기적 처럼 놀라운 역사와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 고비를 맞아 한계를 경험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조금만 참고
더 견딜 힘을 주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일하실 그날이 올줄로 믿습니다.
2.명료한 행동과 목표
이제는 떠날때를 아는 것이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복음을 전하는 과정은 새로운 곳으로 가고 전하고 떠나는 일의 반복이었습니다.
두 사도에게 깨어 있는 영성과 기도는
변동과 변수와 위험이 많은 이 상황에서 절박하게 필요 했습니다.
목숨이 왔다가 갔다하고
복음전파 라는 목표가 위협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럴때 일 수록 명료한 행동과 목표가 필요 합니다.
두 사도의 명료한 행동으로 그들의 명료한 목표를 잘 들어내는 예가
본문에는 등장 합니다.
첫째 예는 이고니온에서 하나님의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서 허다한 무리가 믿은 후,
반대파 유대인 편과 두 사도편으로 나뉘어서 대립하는 상황이 됩니다.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혼란은 극에 달하고 결국 두 사도가 위험에 처합니다.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그 결과 두 사도는 도망치기로 합니다.
무슨 도망 치는 것이 명료한 행동이고 명료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이냐 반문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단순하게 꾸준해야 할 것에 대해 설교 하다가 왜 갑자기 도망가는 얘기를 하느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부터 잘 들으시셔야 합니다. 여기에 신앙적인 역설이 존재 합니다.
도망을 갔다는 것은 비겹한 행동 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두 사도의 사명적 측면에서는 명확한 목적에 따른 행동 입니다.
일단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허다한 무리가 믿게 되었습니다.
두 사도는 일단 임무를 완수한 것이라 보아도 될것입니다.
-톰 라이트-
“집배원은 편지를 다 배달하고 나면 더 이상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우편배달에 무슨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맡은 일이 끝났기 때문이다.”
도망은 실패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패와 성공의 기준이 우리 머리 속에 있을때
본문의 두사도들은 비겁한 도망자 입니다.
하지만 본래 하나님의 목표가 이고니온의 모든 사람을 구원 하는 것이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복음의 현장에서는 유대인들 처럼 믿을만해 보이는 사람들이 반대자가 되고
오히려 아예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이방인들이 믿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것을 13:48에서는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라고 표현 합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하나님 입장에서는 계획대로 다 되었으니 떠날뿐이지 비겁한 행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노벨상 수상자인 카너먼과 트버스키가 주장한 ‘실패에 대한 혐오감’ 이라는 개념과 관련이 있다.
“실패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실패의 영역이 점점 더 넓어지고 깊어진다…”게임이 끝나지 않는한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기회는 아직 있어.” 그리하여 완전히 탈탈 털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 일에서 손을 떼는 사람들이 숱하다.”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이 모든 경우에 해당 되는 것은 아니지만
목표를 너무 크게 갖고 있는 사람은 이미 목표를 이뤘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어 노력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큰 목표가 이뤄지기 까지 만족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까지 해온 것이 아까워 멈출 타이밍을 놓쳐 큰 손해를 본다는 것입니다.
이룰 수 있는 실질적인 목표 부터 착실하게 해나가는 것이 명료한 행동과 목표를 갖는데 도움이 됩니다.
내가 원하는 목표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표를 추월해서는 안됩니다.
두 사도의 목표설정 자체가 내 생각이 아닌 내가 원하는 만큼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큼 이었습니다.
물론 물리적인 위협도 있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더 있기를 원하셨다면 두 사도는 어떻게 했을까요?
그리고 지금 거기서 순교하기를 원하셨다면 아마도 그들은 그곳에서 순교 했을 명확한 의지를 두사도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번째 예는 돌로 치려는 자들이 아니라, 칭송하는 자들을 만났을때 입니다.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반면에, 루스스라로 가서 걷지 못하는 남자를 고쳐주고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사람들의 칭송을 받으며 그곳에서 더 머물렀다면 어뗐을까요?
바나바와 바울의 행한 기적을 보고 이방인들은 덩치가 켰던 바나바는 그리스 신화의 최고 신 제우스로
주로 말씀을 전했던 바울을 메신저역할을 했던 신 헤르메스로 부르며 칭송 합니다.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두 사도는 강력하게 대응 합니다.
옷을 찢는 것은 유대교에서 신성모독에 대한 강한 반발을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했습니다.
자신들은 신이 아니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능력임을 명확하게 나타냅니다.
이런 상황은 아주 미묘한 상황입니다.
적대적인 상황도 아니고 오히려 우호적입니다.
그런데, 이 상황이야 말로 가장 위험한 상황 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내가 칭송을 받는 상황이기 때문 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에서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돌려야 할줄로 믿습니다.
-미국의 (TIME SQUARE CHURCH)-카터 콜론(CARTER CONLON)-
“도망치십시오! 번영과 부, 성공에 집중하는 가짜 복음 으로부터 도망치십시오!
그리스도의 이름을 자신의 안위와 이익을 위해 쓰는 이들로부터 도망치십시오!!
예수의 이름으로 여러분들의 주머니를 터는 이들로부터 벗어나십시오!!
자기 개발에만 집중하는 거짓 복음에서 도망치십시오!!
그리스도보다 인간이 영광을 받는 교회로부터 도망치십시오!!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마십시오!!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교회로부터 도망치십시오!!
십자가 없는 신학에서, 회개가 없는 신앙에서 도망치십시오!!
죄의 뉘우침과 돌아서는 삶이 없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언급이 없는 곳에서 떠나십시오!!
죄가 편하게 느껴지는 교회에서 도망치십시오!!
그
결론
결론
우리는 그리스도와 믿음의 선배들의 삶을 따라
단순하고 명료한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이 반복적이고 무료하게 느껴지고
특별한 감흥이 없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말뿐이고 구호뿐인 신앙만 있고
실제 삶 속에서 나타나는 변화나 영향력은 미약한 삶을 살고 있다면
영적인 습관을 쫓는 길로 다시 나아 오십시오
기도를 시작 하십시오
말씀을 읽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여러분의 삶 속에 나타내십시오
이런 영적 유익이 많은 단순명료한 삶을 방해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거기서 멈추고 그곳에서 도망 하십시오!
복음은 간단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 하신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재림을 전합니다.
그리고 내 삶으로 나의 선행으로 전할 때,
하나님이 놀라운 표적과 기사로 여러분의 삶과 여러분의 전도대상자들에게
하나님 스스로 나타내시고 일하실 것입니다.
진정 성도로서 복음의 증인으로서의 행복을 충만히 누리는
단순명료한 진리의 삶을 사시시길 축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