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두려움을 해결하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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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 안에는 두려움이 있다.
미국에서 한 달에 수십만 통의 편지로 인생의 고충을 호소 받아 그 해결책을 신문에 연재하는 론 애슐리라는 상담가가 있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사람들이 어떤 문제로 가장 많이 괴로워하는가?”라고 물었다. 질문자로선 아마 돈, 사랑, 인간 관계, 출세, 건강 중에 하나를 댈 것이라 기대했겠지만 전혀 다른 대답이 나왔다. “모든 사람의 문제는 결국 가지 주제로 귀결 되는데 그것은 Fear(공포)다.”
경기가 좋지 않은데, 혹시 집 몰게지를 못넣고 차압을 당하면 어떻하지? 내가 다니는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면 어떻하지? 숨쉴때 몸안에서 무엇인가 통증이 느껴지는데, 혹시 암은 아닐까? 혹시 우리 자녀들이나 순주들에게 위험한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끊임없는 삶의 염려와 두려움들이 마치 파도처럼 끊이지 않고 몰려오는 것이 우리가 사는 삶의 현실이다.
그래서 그 두려움을 달래볼려고 음악도 듣고 드라마도 보고 취미생활도 하는 것이다. 음악을 듣고 취미생활을 하는 것이 결코 나쁜것은 아니다. 건강한 삶을 위해 필요한 요소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것들로는 인간안에 들어 있는 두려움은 해결되지 않는다.
종교의 영역에서는 명상을 통해 두려움을 해결해볼려고 한다. 그러나 명상역시 두려움을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성도님들! 다른 종교인들은 명상을 하고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묵상을 한다.
그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는가?
명상은 비우는 것이다. 욕심도 비우고 생각도 비우고 다 비우는 것이다. 비움으로 두려움을 해결하는 것이다. 그러나 묵상은 반대다 채우는 것이다. 말씀으로 나의 내면을 채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의 내면을 채우는 것이다.
우리는 묵상을 해야지 명상을 하면 안된다. 명상은 매우 영적으로 위험한 일이다. 무장적 비운다는 것은 어두운 영에게 삶의 주도권을 빼앗길 위험이 있다. 눅 26절에 보면 한 사람에게서 귀신이 나왔는데, 돌아다니다가 갈곳이 없는 고로 다시 나왔던 그 사람에게 가봤더니 마음이 깨끗하게 비워져 있어서 오히려 들어가기 좋아서 더 악한 일곱귀신까지 더 데리고 들어가니 형편이 이전보다 더 심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눅 11:25 가서 보니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26. 이에 가서 저보다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심하게 되느니라
왜 이러한 일이 생기는 것인가?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죄인이 사람이 스스로를 비운다고 거기에서 선한 것이 나올수가 없다. 결국 비워진만큼 다른 죄의 목록이 채워질 뿐이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죄를 이길려고 애를 쓰는것도 마찬가지원리이다. 죄를 짓지 않을려고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마치 늪에 빠진것과 같아서 더 깊히 빠져들어간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야 한다.
욕심을 비우면 행복해진다는 말은 그래서 전혀 진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욕심과 두려움같은 것은 죄의 결과물이기에 스스로 비운다고 비워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묵상이란 채우는 것이다. 내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내 마음을 채우는 것이다. 마치 유리잔에 물을 부으면 유리잔의 공기가 자동으로 빠져나오는 것처럼 , 우리 내면에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으로 채움으로만 해결할수 있는 것이다.
오늘 그 셈플이 사마리아 여인이다.
이 여인의 삶은 두려움으로 점철된 인생이었다. 그리고 이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치밀하고 계획된 접근은 철저한 사랑이셨다.
요한복음 4:3–4 NKRV
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토론토에서 벤쿠버로 육로로 이동하려면 위니펙을 반드시 지나가야 한다. 그것처럼 남쪽 지역인 유대지역에서 북쪽지역인 갈릴리 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중간에 위치한 사마리아땅을 지나가야 했다.
그러나 본문은 그 이야기를 하는것이 아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과 상종을 하지 않았다. 오늘 사마리아 여인도 그 이야기를 한다. 혈통이 섞인 사마라이인들을 유대인들은 개취급을 했다. 그래서 당시 유대인들은 남쪽 유대지역에서 북쪽 갈릴리 지역으로 이동하려고 할때에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가지 않았다. 좀 멀지만 빙 돌아서 이동을 했다. 이런상황에서 기록된 말씀이다. 그러니까 본문의 통과하여야 하겠다는 말은 당시의 상황을 묘사한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을 표현한 말씀이다.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사마리아를 거쳐서 갈릴리 지역으로 가겠다고 결심하셨음을 말씀하는 것이다. 왜 그러셨을까? 사마리아 여인때문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의도는 너무 더워서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는 낮 12시에 , 일부러 그 시간을 택해서 물을 길러 오는 사마리아 여인을 기다리시는 모습에서 다시한번 확인된다. 사마리아 여인이 아니면 예수님이 그러실 이유가 없다. 셈옆에 있으니 그냥 물을 떠서 잡수시면 될일이다. 그런데 일부러 물을 좀 달라 요청하신다. 다 이여인을 향한 사랑때문이다.
이 여인은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었다. 사람이 두렵고 , 다섯번이나 남편을 바꿨다는 말은 당시에는 여자가 남자에게 이혼하자고 요구할 권리가 없었다. 오직 남자만이 여자에게 이혼을 요구할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이 남편이 다섯이 있었다는 말은 다섯번이나 이혼을 당했다는 뜻이다. 이 여인은 성적으로 부도덕한 여인이 아니라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버림받고 외면당한 상처로 가득한 여인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이 여인의 상처와 아픔을 품어주고 위로해주기보다는 오히려 그 상처를 오히려 빌미삼아 손가락질 하고 비난했다. 니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뭔가 잘못된게 있기 때문이아니겠느냐며 수군거리고 외면했다. 그 상처가 쌓이고 쌓여 이 여인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낮 12시에 제일 더울때 물을 길러 온것이다. 그리고 남자인 예수님이 자신에게 물을 떠달라고 요청했을때 잔뜩 긴장한채 퉁명스럽게 대답할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를 예수님은 매우 따듯하게 대해주셨다. 그녀의 삶의 자리를 잘알고 계심을 드러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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