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4:31-44 목.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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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누가복음 4:31-44 찬송가 32장 '만유의 주재' 예수께서 나사렛에서 쫓겨나시고, 갈릴리의 가버나움에 오셔서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가르침과 말씀에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에 권위가 있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권위를 잃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권위의 오남용은 바른 권위를 잃어버리게 했고, 권위에 대한 노이로제를 유발했습니다. 독재주의적 국가권력, 남성우월주의적 가부장제, 권위주의적 상명하복의 문화 등이 더욱 이러한 상황을 부추겼습니다. 사람들은 권위로부터 자유로울 때 자아가 실현된다고 생각했지만 그 결과는 다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는 권위 있는 진리를 잃어버림으로 공허해졌습니다. 또한 윤리와 질서의 권위를 인정치 않으므로, 인간을 필요와 욕구에 의해 사는 존재로 전락시켰습니다.
그 말씀의 권위(31-34) 이러한 권위를 잃어버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복음의 권위가 있다는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 (31-32절) 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예수께서는 나사렛에서 쫓겨나시고 갈릴리에서 가르치셨는데, 그의 가르침과 말씀은 당시 지도자들과 달리 권위가 있었습니다(마7:29). 당시는 말라기 이후 400년 동안 선지자가 그치고 외경과 율법 주석서가 생산되고 자칭 메시아들이 나타나고 있는 시대였습니다. 즉, 그 때에도 권위 있는 진리의 말씀이 희박한 반면, 사람의 지혜와 지식이 흔하게 성행했습니다. 우리 또한 책과 강의와 지식의 풍요 속에서 오히려, 영적인 기갈을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수많은 지식과 정보가 인터넷과 서점을 가득 메우고 있지만, 그것은 우리 시대의 영적인 결핍의 단면일 것입니다. 우리는 수 많은 지식과 정보 속에서, 취사선택을 해야 합니다. 어떤 지식을 취하고 어떤 지식을 버릴 것인지 판단하고 선택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 자신이 자연스럽게 진리를 취사선택할 수 있는 권위자의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권위를 잃어버린 것 같지만, 실재로는 개개인이 그 권위를 나누어 가진 것입니다. 그러나 권위자의 자리 주인이 뒤바뀌면서 무엇인가 잘못 맞추어져 갔습니다. 우리는 권위자의 자리에서 진리를 선택하고 버릴 수 있는 권위를 가졌지만, 오히려 그것이 스스로 영적인 궁핍을 자초한 것이었습니다. 사실상 권위는 우리가 부여하므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권위가 있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권위는 듣는 사람의 반응이나 인정이나 평가를 통해 부여되지 않습니다. 또한 말씀의 권위는 말의 강약이나 어조나 호소력, 진정성, 통찰력 같은 것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의 가르침에 그런 요소가 없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한 것이 권위의 근원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권위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좋은 리더십입니까? 호소력있는 언변입니까? 존경받을 만한 성품입니까? 탁월한 지적능력 입니까? 사람이 가진 것은 일시적으로는 사람의 이목과 마음을 끌지만, 때가 되면 시드는 풀과 같습니다. 우리의 이목과 마음을 끄는 소리를 따라가면 우리는 또다시 고갈되고 궁핍해지기를 반복하다 지치고 말 것입니다. 베드로전서에서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3-25)”
그러하기에 우리는 사람의 이목과 마음을 끄는 설교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 66권에 충실한 말씀은, 그것을 듣는 사람의 평가와 반응과 관계없이,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셨던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과 같이, 우리를 부르시고 거듭나게 하시며 소생케 하시는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권위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말씀이 무엇인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것은 성경 전체의 총체적인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좀 전 읽었던 베드로전서에서도 복음은 곧 말씀이라고 증거합니다. 또한 43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전하는 것이 복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고 가고 있는지? 예수는 누구이며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예수로 인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있어 났으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고 있으며 최종적으로 어떻게 되는지? 말씀합니다. 이러한 예수께서 전하는 시는 복음은 사람들을 놀랍게 하는 권위와 능력이 있었습니다. 복음의 능력과 효과(36-39) (36) 다 놀라 서로 말하여 이르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 도다 하더라 사람들은 자기들과 별반 다를 것 없어 보이는 나사렛 출신 목수인 예수가 전하는 복음에 권위가 있음을 보았습니다.예수님이 전하는 복음의 권위가 귀신축출과 병자의 치료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는 좀 전 나사렛에서 선포했던 말씀인,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말씀이 가버나움에서 입증된 것입니다. 귀신이 쫓겨남은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 즉 권위가 실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님께 하나님 나라의 주권과 권위가 있음이 입증됩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열병을 꾸짖으시고 떠나가게 하십니다. (39)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예수께서 열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열병을 꾸짖고 계십니다. 35절에서도 예수님은 귀신을 꾸짖으셨습니다. 39절에서는 열병을 꾸짖으십니다. 41절에도 귀신을 꾸짖으십니다. 꾸짖다는 말에 쓰인 헬라어 ‘에피티마오'는 견책하다는 의미로,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신적인 권위로 하는 경고를 의미할 때 쓰이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도 예수님의 복음에 하나님의 권위가 있음을 계속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복음의 권위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귀신을 내쫓고 병자를 고치는 그 복음의 권위를 우리도 보고 있습니까? (41)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귀신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알고 있지만, 복음과는 무관했습니다. 즉 복음이 가져다주는 자유와 회복과 은혜와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귀신들은 누리고 있던 것까지 빼앗기며, 복음을 말하는 것까지도 금지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다‘고 말하는 것을 금지하시는데, 여러 추정할 수 있는 이유 중 야고보서 2장 17절의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귀신은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있지만, 순종하는 믿음은 없었기 때문에 금지되고 쫓겨났습니다. 즉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있지만, 그에 부합하는 순종과 믿음이 없다면, 복음은 그 사람에게 소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복음을 빼앗기고 더 궁핍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13장 12절에서 천국의 비밀 즉 복음에 대해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알리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구속하셔서 믿음으로 순종케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즉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지식을 원하는 청중이 되게 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믿고 순종하는 제자가 되게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는 청중입니까 제자입니까? 청중은 자기의 필요에 따라 움직이지만, 제자는 복음을 따라 움직입니다. 청중은 자기 마음에 말씀을 맞추려고 하지만, 제자는 자기의 마음을 말씀에 맞추려고 합니다. 자기 마음에 따라 복음을 각색해서 맞추려 할 때, 복음의 참된 진리를 누리지 못하며 오히려 더 혼란함을 겪고 지치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전파(42-44) (42절)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예수께서 선포하는 복음을 들은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쫓아냈지만, 능력과 이적을 본 가버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이 떠나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이로 보아 사람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혜택과 효과를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효과와 혜택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케 하는데 목적이 있으며,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완전히 실현하는데 그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가져오는 물리적인 효과와 혜택이 이 땅에서 보편적으로 실현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찾아다니는 것은 우리를 더 궁핍과 결핍에 빠지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복음에 능력이 지금에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지금 우리의 병이 고쳐지지 않고 가난이 해결되지 않고 삶의 피로가 여전하며,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을지라도, 그 너머에 있는 영원한 삶을 이 땅으로 가져와 살 수 있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43-4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예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그 능력을 이 땅에 가져오셨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 있는 복음을 지금 가진 자들입니다. 권위를 잃어버린 시대를 살고 있지만, 우리는 복음의 권위마저 우리의 마음에게 내어줘서는 안됩니다. 복음이 가져다주는 효과를 지금 여기에서 찾아다닌다면, 우리는 현세에서 복음보다 더 효과적인 것들로 복음을 대체해 버리게 될 것입니다. 이 복음이 가져야 하는 권위를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했다는 우리 마음(렘17:9)에 내어줘서는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자신 스스로 권위 있는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닌, 주님의 무익한 종이 되기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확증되고 실현된 약속의 복음을 가진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로 복음의 종이 되기를 자랑스러워 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복음의 권위가 우리에게 회복되어 우리의 영적인 기갈과 궁핍이 영원한 생명의 풍성함으로 채워지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님! 예수 그리스도를 저희에게 보내셔서, 살아 있고 참된 진리인 복음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권위에 대해 거부감이 일반화되어 있어서, 권위 있는 말씀보다 자기의 생각과 마음을 더 높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권위마저도 잃어버리고, 자기의 마음을 채워줄 것을 갈망하며 영적인 기갈에 빠져 있고, 또한 주위에 그 기갈을 채워줄 만한 것이 너무나 많아 보입니다. 먹을 것과 볼 것과 입을 것과 즐길 것과 들을 것이 너무 많지만, 정작 그것들은 때문에 우리는 더 피폐해져만 갑니다. 복음의 능력이 현실성 없다고 불평했지만, 실재로는 저희가 복음에 대한 믿음이 없이, 그 능력과 효과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저희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권위 아래 종이 되기를 기뻐하므로 메마른 저희 마음이 회복되어지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예수의 가르침과 말씀에는 권위가 있었는데, 그 권위는 무엇으로부터 온 것인지 생각하고 우리는 어떤 것에 권위를 부여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2.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말씀을 전파하시면서, 또한 귀신을 쫓으시고 병을 치료하신 목적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우리는 가르침에 관심이 있는지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는 것에 관심이 더 큰지 생각해 봅시다. 3. 귀신이 예수님에 대해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는데 그 이유를 생각해보고, 청중과 제자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4. 가버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을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했는데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작성 : 조광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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