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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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가복음 10:46-52(신약 73쪽)
설교제목: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반갑습니다.
오늘도 은혜의 자리에 나오신 분들을 축복합니다.
우리 서로를 축복합시다.
‘감사합니다. 당신과 함께 예배해서 행복합니다.’
# 축복후
오늘은 시각장애인 바디매오의 이야기를 같이 나누려 합니다. 제가 오늘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저는 시각장애인의 삶에 관해 참 모른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시각장애인 바디매오의 이야기를 살피면서 처음엔 그의 시각장애에 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못했습니다. 단지 이 이야기에 어떤 영적인 혹은 신앙적인 교훈이 있는지만 골똘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바디매오가 시각장애인이었다는 사실에 집중하면서 시각장애인의 고통을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여기에 모인 우리 대부분은 시각장애를 앓고 있지 않을 줄로 압니다. 그래서 시각장애인으로 세상을 산다는 것에 관해 잘 모르고 관심이 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오늘 성경 이야기를 잘 이해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바디매오가 눈을 뜨게 된 것이 어떤 사건인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해서 시각장애인에 관한 이해를 돕는 영상을 준비했습니다. 함께 시청하고서 얘기를 이어가겠습니다.
# 영상: 6분 37초
방금 영상에서 아나운서가 시각장애인의 삶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문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마치 지뢰밭을 걷는 것 같은 모험과 도전의 연속’이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시각장애인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많은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볼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시각장애인이었던 바디매오의 삶과 고통을 짐작해 봅니다. 보이지 않는 그의 삶은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아서 언제 바닥에 가라앉을지 몰랐습니다. 아마도 늘 불안과 긴장으로 경직된 삶을 살았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마치 깊은 동굴에 거하듯 출구가 있는지 알 수도 없는 절망과 고통 속에서 신음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서 오늘 성경 이야기에 나오는 바디매오의 이러한 반응을 우리는 이해하게 됩니다. 마가복음 10장 46절~48절의 말씀을 힘주어서 같이 읽습니다.
마가복음 10:46-48(신약 73쪽)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바디매오의 강렬할 외침이 들리십니까? 주변에서 그를 막으려 들지만, 그는 더욱더 소리를 질러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시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바디매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의 행동을 ‘꾸짖고 잠잠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결코 잠잠할 수 없었습니다. 바디매오에게 자신의 문제는 남들이 비록 알아주지 못해도 자신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물론 예수님 주변 사람들의 입장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레드카펫을 따라서 영광스러운 길을 향해 나아가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훗날 그것이 십자가의 길이었음이 밝혀지지만, 당시 예수님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전혀 다른 상상을 하고서 어서 주인공이 영광스러운 시상대에 오르기를 간절히 바랐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뛰쳐나온 극성팬이 예수님의 앞길을 막고는 그의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행보를 막아섭니다. 예수님 주변에 있던 찐 팬은 그러한 상황을 그저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바디매오의 과격한 행동을 제어하는 것이 마땅했을 겁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바디매오가 외친 말에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향하여,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릅니다. 겉으로는 그저 예수님을 특별한 인물로 칭송하는 말이지만, 그 속에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자칫 당시 이스라엘을 식민지배하던 로마제국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었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 투쟁할 인물로 비춰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예수님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그것을 기대하고 있었을 겁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주의 우편에 또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37절)’고 얘기합니다. 그러니 거사를 치르기 전에 예수님이 로마제국에 잡혀가는 일을 막고자 어리석은 바디매오를 강하게 제지하였을 겁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자면, 바디매오가 큰 소란을 일으킬 정도로 이것이 바디매오에게 중요한 일이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디매오가 시력을 회복한 오늘 성경의 이야기는 그에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저 앞을 못 보던 사람이 눈을 뜨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치부할지 몰라도 바디매오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바디매오가 눈을 뜬 것은 그가 구원받았음을 뜻합니다. 그는 더는 어둠에 묶여서 살얼음판을 거닐 듯 출구 없는 동굴에 거하듯 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디매오에게 본다는 것은 그의 인생 전체에서 큰 변화가 생겼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디매오가 눈을 떴다는 것이 그가 구원받음을 뜻할 때,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오늘을 사는 우리의 이야기로 대입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 대부분은 시각장애인이 아니지만, 우리에게도 그에 버금가는 문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본래 그렇습니다. 완벽하지 않아서 누구나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쩌면 바디매오처럼 우리의 인생을 속박당한 어떤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어떤 문제를 안고 살아가십니까? 돈에 관한 문제입니까? 건강에 관한 문제입니까? 관계에 관한 문제입니까? 각자의 얘기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는 형편이니 제 얘기를 털어놓겠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를 털어놓기까지 고민이 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좋은 일이면서 걱정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조심스레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저는 아마 내년 3월이면 아빠가 될 것 같습니다. 네, 저희 가정에 아이가 생겼고 내년 3월쯤 태어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좋은 소식을 이제야 말씀드려서 죄송하기도 합니다. 이 소식을 늦게나마 공개하는 까닭은 여기에는 걱정되는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저와 아내는 40대가 넘었고 병원에서는 이를 노산으로 분류합니다. 더욱이 큰 문제는 안타깝게도 아이와 함께 근종이란 녀석도 같이 자라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 근종 녀석이 크기가 현재 태아보다 더 큽니다. 처음부터 병원에서는 이 부분에 관해 우려를 표했습니다. 출산 때까지 결코 안심할 수 없다고요.
그래도 다행히 저희 아이는 근종과 더불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습니다. 이제 12주 차를 지나고 있는데 그 주에 맞게 커가고 있고 이제 곧 임신 초기를 지나고 있으니 조금은 더 안심됩니다. 앞으로 갈 길이 멀어 보이지만, 구태여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저희 가정을 위해서 기도해주시면 분명 내년에 저는 아빠가 되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풀 수 없고 단지 주께 맡기고 있어야 할 오늘 제가 어찌하지 못하는 문제입니다.
당연히 저만 삶에서 어떤 문제를 겪고 있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분명 저보다 심각한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분도 계시고 사실 문제가 없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고 여겨집니다. 분명한 것은 크든 작든 우리에게 문제는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 문제가 우리 스스로가 해결할 수도 없고 어떻게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 각자는 바디매오의 시각장애와 같이 스스로 어찌해볼 수 없는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이때 우리가 무엇을 보느냐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서 그 문제를 다르게 풀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13장 이하에 나온 사건은 그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줍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데스바네아에서 하나님이 약속한 땅 곧 가나안 땅을 정탐하기 위해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으로 보냅니다.
12명의 정탐꾼 모두가 가나안 땅을 두루 둘러 보았지만, 그 12명의 정탐꾼의 보고 둘로 나뉘는 것을 아실 겁니다. 10명의 정탐꾼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보고 주눅이 들어서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메뚜기’라는 부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반면에 2명의 정탐꾼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들을 능히 무찌를 수 있다고 하며 우리의 ‘밥’이라는 긍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 보고를 들었던 대다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10명의 정탐꾼과 그 말을 따랐습니다. 그 결과 출애굽 1세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믿음에 따라 반응했던 2명의 정탐꾼과 출애굽 2세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갑니다.
이처럼 같은 것을 보고서도 다르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반응에 따라 우리의 운명이 갈라질 수 있습니다. 10명의 정탐꾼과 출애굽 1세대는 광야에서 죽었지만 2명의 정탐꾼과 출애굽 2세대는 약속에 땅에 들어갔으니 말입니다.
이는 성경의 이야기 속만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도 벌어지는 일입니다.
1867년 3월 30일에 있었던 사건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이날은 미국이 러시아에게서 알래스카를 매입한 날입니다. 러시아는 크림전쟁의 패배로 재정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당시 러시아에게 알래스카는 그다지 유용한 땅이라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이에 현재 시세로 우리돈 약 2조원 가량으로 미국에 알래스카를 매각합니다. 이 일을 두고 미국에서의 여론도 좋지 않았습니다. 쓸데없이 국고를 낭비했다는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하지만 약 30년 후에 큰 반전이 일어납니다. 1896년에 알래스카에서 금광이 발견됩니다. 곧 석유 발견 소식도 전해졌고, 그 매장량은 상당했습니다. 이 일로 알래스카 매입은 미국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거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 러시아에서 이 거래를 무효로 하겠다는 얘기까지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알래스카가 금싸라기 땅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한편 오늘 성경 이야기에서 바디매오는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그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여기에는 상당한 변화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캄캄한 어둠인데, 그 자신의 문제를 넘어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그로부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문제에 갇혀 있었다면 아무런 변화를 또는 구원을 얻지 못했을 텐데 그가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변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의 행동이 좀 과격해 보일 수 있고 사람들이 그를 제지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달리 보자면 그는 그만큼 예수님을 신뢰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의 절실함에 확실히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마가복음 10장 49절~52절의 말씀을 같이 읽습니다.
마가복음 10:49-52(신약 73쪽)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지금 예수님께서 가시는 예루살렘은 특별한 여정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영광스러운 길은 아니지만, 분명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특별한 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사실 다른 것에 관해 마음 둘 여유가 없습니다. 속히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향해야 했습니다. 거기엔 당시 사람들은 미처 알지 못했지만 전인류의 미래를 새롭게 할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장 앞서서(32절)’ 이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나 난동을 부리는 바디매오로부터 방해를 받습니다. 한시가 바쁜 길이지만 예수님은 바디매오를 외면치 않으십니다. 바디매오의 절실함을 보신 예수님은 머물러 서서 바디매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히 여기십니다. 우리에게 관심하시고 우리를 도우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오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응답하여 주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문제 앞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나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임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문제를 나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철저히 예수님을 신뢰함으로 그 분께 나아올 때, 그 분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도우십니다. 결코, 바쁘다고 귀찮다고 나중에 오라고 외면하지 않으시고 오늘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시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혹시 눈에 보여지는 현실로 괴로워하고 그것에 허우적 거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것으로 우리의 문제가 해결 받을 수 있습니까? 그것으로 우리가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까? 결코,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방향을 돌려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그분께 나아갈 때 우리는 그 문제로부터 벗어 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바디매오가 보았던 주님을 오늘 우리가 동일하게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의 육신의 눈은 어두웠을지 몰라도 그의 영의 눈은 밝아서 그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라건대, 오늘 우리도 믿음으로 예수를 바라보고 그분으로 인하여 변화되고 새로워진 삶을 구원을 이루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