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은 나 중심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Notes
Transcript
성경본문: 창세기 32:24-25(구약 50쪽)
설교제목: 신앙생활은 나 중심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반갑습니다.
오늘도 은혜의 자리에 나오신 분들을 축복합니다.
우리 성도 분들께서는 최근에 언제 감동하셨습니까? 저는 크게 두 번의 기억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교회 일로 푸드마트데이에 장을 보러갔다가요. 거기서 대게와 랍스터를 삶아서 파는 것을 보고 감동을 느꼈습니다. 제가 좀 엉뚱하죠. 그 장면이 왜 그렇게 인상적인지, 그 후로도 몇 차례 푸드마트데이를 방문하였지만, 번번히 그 장면을 다시 보지 못했습니다. 매우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두번째도 특이하다 여기실 수 있을텐데요. 저는 최근에 흥미로운 유튜브 채널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너무 기쁘고 좋아서 몇 일 전부터 그에 관한 얘기를 반복해서 주변에 하고 있습니다. 제가 발견한 유튜브 채널은 ‘오늘의구약공부’라는 것입니다. 이 유튜브 채널에서는 구약성경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많이 접할 수 있었습니다.
제목을 몇 가지 나열하자면 이렇습니다. ‘네피림은 누구인가’, ‘성경 속 뱀은 원래 사탄이 아니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을 유혹하지 않았다.’ ‘골리앗을 죽인이가 다윗이 아니다?!’ 어떻습니까? 제목만 봐서는 이단적 사상을 전파하는 위험한 사이트 갔지 않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이것은 실제로 구약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중요하게 다뤄지고 매우다양하게 답변되어지는 이야기입니다.
혹시나해서 덧붙이지만 이 유튜브 채널를 운영하는 분이 전원희 목사님인데요. 서울신학대학과 연세대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한 분으로 이른바 우리나라의 주요교단에 속한 성결교단의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신 분입니다. 더군다나 목사인 제가 이 분의 학력과 이야기들을 충분히 공개적으로 소개하고 받아들이고 있으니 이 분의 유튜브 채널에서 다뤄지는 이야기는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제가 아까 나열한 유튜브 영상 제목들이 때때로 유튜브 상에서 불건한 단체나 개인에 의해서 다뤄질 수 있지만요. 적어도 제가 소개하는 ‘오늘의구약공부’ 유튜브 채널에서 다뤄지는 이야기는 안심하셔도 된다는 말입니다. 서론이 좀 길어졌지만, 제가 오늘 나누고 싶은 이야기 또는 감동받은 이야기는 사실 이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구절에 관한 것인데요. 그 배경과 내용을 소개하자면 이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의 이야기는 야곱이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배경을 좀 더 소개하자면 이렇습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을 속여서 형인 에서의 축복을 가로채고 삼촌인 라반의 집으로 도망합니다. 야곱은 그곳에서 자신보다 더 권모술수가 뛰어난 삼촌 라반에게서 어렵사리 살림을 장만하고 식구들을 이끌고 라반의 집을 떠나 다시 아버지의 집 또는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문제는 형인 에서가 야곱이 그동안 어렵게 일궈놓은 재산을 빼앗아 버릴까봐 마음이 무겁습니다. 토끼같은 자식과 곰과 여우같은 아내를 잃을까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래서 야곱은 형인 에서를 만나기 전에 얍복강에서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합니다. 성경은 그것을 천사와 씨름하는 장면으로 보여주는데, 야곱은 이 과정에서 천사로부터 허벅지 관절을 공격당합니다. 그리고 야곱은 그로 인해 평생을 절뚝거리며 살게 됩니다. 앞서 제가 소개했던 유튜브 채널 ‘오늘의구약공부’에서 이 장면에서 왜 천사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쳤는지를 해설합니다. 이것이 저에게 감동적인 이야기로 다가왔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구절에 나타난 ‘허벅지 관절’을 구약성경의 원어인 히브리어로 ‘야레크’라고 합니다. 이는 한글성경에서 여러 단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서처럼 ‘허벅지 관절’로도 나오지만 다른 곳에서는 ‘허리, 넓적다리 또는 우리에게 좀 익숙한 환도뼈’로 나오기도 합니다. 본래 이 야레크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사람의 기초, 인생의 근원’을 뜻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천사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쳤다는 것은 야곱의 중심을 쳤다는 말입니다. 이를 풀어서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이전까지 야곱은 라반에게서 살아남기 위해서 라반의 권모술수를 이기고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재산과 삶을 기반을 축적해야 했습니다. 이른바 자수성가를 한 사람이 야곱입니다. 야곱의 에서와의 문제도 그렇게 돌파하려 했으나 천사는 그의 허벅지 관절을 쳐버림으로 이제는 더 이상 그와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돌파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자기 자신의 경험과 힘에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을 깨닫는 사건이었습니다.
아마도 야곱은 이 과정을 통해 진정한 신앙인으로 거듭났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이제는 더이상 스스로의 힘에 의지하여서 살기보다는 하나님께 힘입어 사는 인생으로 말입니다. 저는 이것이 야곱의 참된 신앙생활의 시작이면서 동시에 야곱이 거듭난 사건이 아닐까 합니다.
제가 감동이 되는 것은 출애굽기 1장 5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번 같이 찾아볼까요. 출애굽기 1장 5절의 말씀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같이 읽습니다.
출애굽기 1:5
5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이 모두 칠십이요
요셉은 애굽에 있었더라
방금 읽은 성경구절에서 ‘허리’라고 단어가 히브리어로 ‘야레크’입니다. 앞서 천사가 야곱을 ‘허벅지 관절’과 같은 것입니다. 야곱이 천사에게 공격당한 야레크는 야곱에게 수치고 약함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전에는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가정과 기업을 일궈왔는데,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그런 것이 더 이상은 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자랑이었던 야레크는 천사에게 공격받아서 약점과 수치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그 약점과 수치를 통해 곧 야곱의 허리에서 칠십인의 사람들 앞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이스라엘 민족이 쏟아져 나오게 하십니다.
이 성경 구절은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힘과 능력을 통해 일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심지어 우리의 약점과 수치를 통해서도 능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우리는 종종 이러한 사실들을 잊어버리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도 내 힘과 내 능력으로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나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임을 이 히브리어 야레크라는 단어를 통해 여실히 보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또 야레크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흥미롭게 사용된 부분입니다. 에스겔 21장 12절인데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에스겔 21:12
12 인자야 너는 부르짖어 슬피 울지어다
이것이 내 백성에게 임하며
이스라엘 모든 고관에게 임함이로다
그들과 내 백성이 함께 칼에 넘긴 바 되었으니
너는 네 넓적다리를 칠지어다
또 예레미야 31장 19절인데 마찬가지로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예레미야 31:19
19 내가 돌이킨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지므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 하도다
방금 읽은 에스겔 21장 12절에서 ‘넓적다리’, 예레미야 31장 19절에서 ‘볼기’도 모두 야레크라는 히브리어 단어입니다. 방금 읽은 성경 구절은 회개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에스겔에서는 회개할 때, 자신의 넓적다리를 치라하고 예레미야에서는 볼기를 치라고 합니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회개라는 것이 결국 야레크 곧 나 중심성을 버리는 일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은 나 중심성을 버리는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깨닫게 됩니다. 신앙생활이란 결국 야레크 곧 나 중심성을 내려놓고 하나님 뜻을 따름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능력이 많은 분이여서 야레크와 관계없이 큰 일을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야레크를 내려놓지 못하면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할 수 없게 됩니다.
바라건대, 오늘 우리도 야레크 곧 자기 중심성을 내려놓고 신앙생활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나의 능력으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나의 약점과 수치에도 불구하고 나를 통해 일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이 하나님을 만나고 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