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유일한 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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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4:3–7 NKRV
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요한복음 4:3–4 NKRV
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지도 소개 -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많은 유대인들이 사마리아를 통과했다 안했다로 의견이 분분하다. 당시 유대인들이 유대지역에서 갈릴리 북부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중간에 있는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어서 유대인들은 그렇게 길을 많이 잡았을 것이다 라는 해석과 당시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거의 사람취급을 하지 않았던 점을 고려하여 사마리아지역이 아닌 다른 길로 다소멀더라도 우회해서 갈릴리지역으로 왕래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저는 후자의 해석을 지지합니다. 이유는 만약에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면 굳이 따로 언급할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본문 9절에서 사마리아여인의 말을 설명하면서 유대인이 사마리아 여인과 상종하지 아니하였다는 설명이 있는 것을 보면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혐오하였고 그런 유대인들이 조금 가깝다고 해서 사마리아땅을 이용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저처럼 후자의 관점으로 본문을 해석하면 예수님은 일부러 다른 유대인들이 가지 않은 사마리아땅을 밟은것으로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수님의 목적은 본문에서 다시한번 여섯시, 그러니까 우리시간으로 낮 12시에 우물가에 앉아 있는 모습을 통해 또한번 드러납니다.
그냥 지나가셔도 될일이고 너무 뜨거워서 잠시 쉬어야 하셨다면 다른 곳에서 쉬어도 되셨을텐데 구태여 우물가에서 그 뜨거운 시간에 홀로 앉아 쉬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모든 과정은 너무나 그 의도가 분명해 보입니다. 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그녀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마치 영화가 주인공을 위주로 이 사건 저사건이 함께 어우러져서 한편의 영화를 만들듯이, 오늘 본문의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 여인 한사람을 위하여 이상황 저 상황을 이용하셔서 이 여인을 만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여인은 어떻게 구원을 얻게 되었는가? 이 여인은 어떻게 예수님을 생명으로 만나게 되었는가?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여인의 상황이 예수님만나기에 너무 좋은 상황이라는 사실을 세삼 생각해보았습니다. 만약에 이 여인이 사마리아 사람이 아니었다면, 만약에 이 여인이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도 다른 남자와 동거하는 그래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받고 살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낮 12시 그 뜨거운 대낮에 물길러 오지 않았더라면 이 여인은 예수님을 구주로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매우 역설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복음을 소개할때 항상 이런 역설적인 상황을 많이 소개합니다.
세리장 삭개오를 보십시오. 예수님이 방문한 마을에서 가장 손가락질 받는 한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이 삭개오일것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가 예수님을 구주로 만나버립니다. 그보다 훨씬 더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들은 예수님을 구경하다가 끝나 버립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예수님을 구주로 만나서 자신이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버립니다. 예수님도 그런 그를 보면서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임했다고 선언해 버리십니다.
오늘 사라미아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혈통적으로 윤리적으로 종교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타락한 사람이라 비난받고 종교인의 자격조차도 갖추지 못한 이 여인이 예수님을 생명으로 만나 인생이 완전히 바뀌어버립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와 사뭇 비교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앞에 나오는 니고데모 이야기입니다. 니고데모는 남자요 유대인이요 바리새인이요 공회원입니다. 모든것이 완벽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 사람은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무슨 말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합니다. 나중에야 예수님의 누구신지 깨닫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니고데모와는 달리 말 몇마디 했는데,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금방 알아채 버립니다.
무엇이 이러한 상황을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내가 죄인이라는 의식입니다.
마태복음 1:21 NKRV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님이 이땅에 구원자로 오신 이유를 설명하는데,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분이십니다.
죄에서 건져내실분입니다.
저는 가끔 교회사역을 하면서 죄인을 구원하는 복음을 전하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는것이 마치 에스키모인들에게 냉장고를 파는 것과 같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유는 교회에서 의외로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반가워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많이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미 처음 예수를 믿었을때 이미 죄용서받고 구원을 받고 의인이 되었는데, 왜 자꾸 죄인이라고 우리를 깍아내리느냐고 생각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그러나 이는 복음을 피상적으로 이해하였기에 일어난 반응입니다.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누구보다 그리스도의 의의 복음을 증거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뭐라고 고백하는지 한번 보십시오.
디모데전서 1:15 NKRV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디모데 전서는 사도바울이 죽기 진적에 쓴 성경입니다. 사도바울은 처음에는 자신을 사도중에 가장 작은자라고 소개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9 NKRV
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다가 그 다음에는 자신을 성도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소개했습니다.
에베소서 3:8 NKRV
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그러다가 이제는 죄인중의 죄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도바울이 그럼 예수를 믿고 갈수록 더 많은 죄를 지어서 그랬을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4:16 NKRV
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고린도 교인들에게 나는 너희의 영적 스승이다. 아비다 하면서 나를 본받아라 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죄를 일상으로 짓는 사람이엇다면 어떻게 이런 말을 할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는 날마다 죄와 싸웠고 죄를 이기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월이 갈수록 자신을 더 깊은 죄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왜 이럴까요?
은혜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본질적인 나의 죄인됨을 더 깊히 각인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죄에 대한 인식은 구원을 처음 받을때에도 그리고 계속해서 구원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입니다.
요나서의 주제는 니느웨의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니느웨의 회개를 통하여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이다.
요나서 전체를 묵상하면서 기억해야 할 주제이다.
그래서 요나서의 핵심단어는 니느웨가 아니라 요나.. 요.. 나 이다.
회개해야 할 사람, 요나.. 나이다. 새로워져야 할 사람 , 요 나이다. 신앙은 이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삶으로 실천하며 사는 것이다. 내가 문제인지 아는 사람이 매사에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삶을 살게 되어 있다 . 이것을 성경은 믿음으로 산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탄이 죄를 보게 하며 죄책감과 정죄감을 가져서 오히려 하나님과 멀어진다.
그러나 성령님이 죄를 보게 하면 죄를 위해 내게 오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고 의지하게 한다.
우리는 전자의 사람이 아니라 후자의 사람이다.
이것은 어거스틴은 O Felix culpa! 행복한 죄라는 불렀다. 교회역사에서 부활절날 많이 암송했다고 한다.
오 복된 죄여, 너롤 말미암아 우리가 위대한 구세주를 얻을수 있게 되었도다.
본문의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생명으로 만난게 된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그녀 스스로가 자신을 죄인으로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탈탈 털어서 한 문장 내지는 몇 단어로 축소하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의와 나의 의의 싸움입니다.
구원은 나의 의를 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붙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해가 되고 용납이 되고 인정이 되게 하는 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말합니다. 은혜를 받으면 내가 죄인인줄 알게 되고, 은혜를 받으면 그런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또한 알게 됩니다. 그리고 더이상 자신의 죄를 감추려고 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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