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 3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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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 3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데칼로그의 세 번째 말씀은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계명을 이해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는 안된다’ 정도로 생각하며 쉽게 넘어갑니다. 그 결과 세 번째 계명의 의미를 쉽게 넘어감으로 놓치게 되는 경우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이 계명은 첫 번째와 두 번째 계명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세 번째 계명의 중요성을 이해하려면, 먼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문을 가르쳐주시면서, 가장 먼저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주기도문의 첫 번째 청원은 하나님의 이름에 관한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주기도문의 두 번째 청원인 “나라가 임하시오며”가 더 중요할 것 같은데, 왜?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청원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청원보다 앞서 놓으신 것일까요? 게다가 주기도문의 첫 번째 청원과 데칼로그의 세 번째 계명이 모두 하나님의 이름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그만큼 “하나님의 이름” 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기도문과 데칼로그 모두 하나님의 이름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관건임을 강하게 암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 이름은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입니다. 히브리어로 “셈”이라고 하는데 770회 나올 정도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이름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 이름은 그 사람의 존재를 뜻합니다. 그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그 사람에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인지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름을 통해서 그것들을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우리 나라도 그렇지 않습니까? 요즘은 그렇게 이름을 짓지 않지만, 과거 우리나라는 전통의 의해서 이름을 지었습니다. 항렬을 따라서, 가문의 질서를 따라, 음양오행을 따져가며 자녀들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사람, 곧 남자를 만드셨는데, 그 이름이 “아담”입니다. 그 뜻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아담을 무엇으로 만드셨습니까? 창세기 2장을 보면, 그 재료가 흙입니다. 그래서 “아담” 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아다마” 흙이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하신 말씀처럼, 사람은 흙이라는 단어에서 아담이 나왔습니다. 흙은 부서지기 쉬운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흙에 물을 부어 단단하게 만들지만, 바위에 부딪치면 쉽게 부서집니다. 이렇게 인간은 연약합니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말의 의미는 부서지기 쉬운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존해야 하는 존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담의 아내의 이름은 “하와”입니다. “산자의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하와를 통해서 후손이 나오고 사람의 생명이 계속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 모세의 이름의 뜻은 “건짐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모세는 건짐을 받은 자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낸 자입니다. 이렇듯, 성경은 이름을 이야기할 때, 그 사람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둘째, 이름은 그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무엇을 할 것인지와 관련이 있다고 히브리 사람들은 이해했습니다. 성경에는 이름을 바꾸는 일이 자주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의 원래 이름은 아브람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존경받는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열국의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야곱의 이름도 그렇습니다.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겨루어 싸웠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긴 자” 이스라엘의 이름을 얻게 됩니다. 이름이 새롭게 바뀌거나 새롭게 붙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존재의 변화, 그 사람이 누구냐는 사실에 변화온 것을 뜻 합니다. 신약에도 그런 경우들이 있지요. 바로 베드로입니다. 그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이름을 반석이라는 뜻을 가진 베드로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바꾸어 주심으로 그가 어떤 존재가 될지, 어떤 일을 맡게 될지 예수님이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세 번째, 이름은 지배권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각 종 동물들을 아담에게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2장 19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 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 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고 되어 있습니다. 동물에게 이름을 짓는 행위는 아담이 다른 동물들을 다스리는 지배권을 가진다는 표시입니다. 그래서 어떤 것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지배권을 갖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름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은 그 정체를 아는 것이고, 그것을 내가 다스릴 수 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름은 어떻습니까?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이름이 없는 분이 아니십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사도바울은 아덴에 도착합니다. 아덴은 지금의 아테네입니다. 바울은 거기서 수많은 비석과 제단들을 보았습니다. 사도행전 17장 23절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알지 못하는 신이기 때문에 이름을 부를 수 없습니다. 알지 못하는 신은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알 수 있는 하나님 이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6장 2-3절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창세기 17장 1절에서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의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나실 때에, “전능한 하나님” 이라고 자신을 표현하십니다. 전능한 하나님은 히브리어로 “엘 샤다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쳐 주신 이름은 야웨, 여호와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가시떨기 나무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모세에게 소명을 주시면서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셨습니다. 출애굽기 3장 13-14절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은 자신에 대해 자기 자신이라고 말하는 분이십니다. 사실 우리 모두 각자가 “나”입니다. 이 지구상에 있는 인류는 스스로 자신을 일컬어 “나”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을 “나”라고 부릅니다. 나는 나입니다. 그러나 이 나의 “나” 가 누구입니까? 자존하는 이가 아닙니다. 나는 타인의 산물입니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으로 태어났고, 사랑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리고 수 많은 타인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삶을 살아갔고, 지금도 혼자가 아닌 타인들의 관심과 사랑 속에서 함께 살아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구상에 있는 인류가 모두 “나”라고 할 수 있지만, 이 “나”는 근원적인 나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나는 나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아무 존재에 의존하지 않으시는 절대적인 분이시면서 동시에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야웨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고난 받는 곳에 참여하시고 백성들을 건지시고, 현존하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믿습니까?
야웨의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언약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에게 계명을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 언약 백성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주셨고, 부르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전혀 입에 담지 말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한 경우는 단 한군데도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0장 24절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네 양과 소로 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여호와의 이름을 기념하는 그곳에 여호와께서 오셔서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민수기 6장 24-26절 “여호와는 내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내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실 때, 자신의 이름으로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쓰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시편 72편 19절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라고 고백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찬송받고 찬양받을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찬송 중에, 예배 중에 “할렐루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할렐루야는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이사야 50장 10절에는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여호와께 모든 것을 맡기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 이름으로 축복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고 여호와의 이름에 의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정도가 아닙니다. 심지어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 야훼의 이름을 맡겼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신약적으로 표현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무리인 교회에 하나님의 이름을 맡긴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도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없는 것입니다.
시편 79편 6절 “주를 알지 아니하는 민족들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나라들에게 주의 노를 쏟으소서”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를 알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주를 알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의 모임, 그것이 무엇입니까? 교회입니다. 교회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 그 뜻은 “불러모은 회중” 곧 “하나님이 불러모으신 사람들” 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불러 모으신 모임인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베드로 사도는 이제는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이 왕 같은 제사장이고, 거룩한 나라이고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 말씀합니다. “택한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로 택하신 이유가 주의 이름을 선포하고 주의 이름을 드러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하고 의지해야 하고 또 주의 이름을 맡은 자라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이름을 오용하는 경우들입니다. 오용이 아니라 오해합니다. 한글 성경의 번역 때문입니다. 제3계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입니다. 바로 “망령” 이라는 단어 때문입니다. “망령” 이라는 단어의 뜻을 찾아보니깐, 국어사전에는 “늙거나 정신이 흐리어 말이나 행동이 정상적인 상태에서 벗어남, 죽은 사람의 영혼” 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단어를 사용할 때, 흔히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사람 망령 들었어?” 사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샤브” 로 “헛되이, 경솔하게, 함부로, 무가치한 것, 무가치” 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경솔하게, 함부로, 무가치하게 부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오용하여 사용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대표적인 사례는 사도행전 19장에 스게와라의 아들들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가르칠 때, 귀신도 많이 쫓아내고 병도 치료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면, 몇몇 주술가들이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낼 수 있겠구나”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우리 말에는 그런 경우가 별로 없지만, 서양 말에 욕설은 신앙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욕은 그 사회에서 가장 거룩하게 여기는 것과 관련해서 표현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상이 욕설로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나라를 보면 “무슨 새끼, 무슨 자식” 대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출생과 관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전통에는 아버지, 어머니가 가장 중요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서양에는 하나님과 관련된 욕설이 많이 있습니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 ”제기랄“ 정도의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기도 합니다. 예레미야 5장 2-3절을 보면 “그들이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할지라도 실상은 거짓맹세니라. 여호와여 주의 눈이 진리를 찾지 아니하시나이까 주께서 그들을 치셨을지라도 그들이 아픈 줄을 알지 못하며...” 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할지라도 그 마음속에는 진실함이나 성실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이름은 매우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첫장을 보아도, 수많은 이름이 등장합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 계시록 마지막장, 마지막 절을 보면 “마라나타 곧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라는 예수의 오심을 기대하는 말로 끝납니다.
예수님의 이름 뿐 아니라,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이름을 통해서 표현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다” 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3절, 14절에서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이름을 안다는 것은 단지 우리 이름을 알 뿐 아니라, 우리를 누구보다 더 잘 아시고, 아끼시고, 사랑하시는 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이름은 물건에 붙여진 명칭 정도가 아니라 이름을 가진 사람과 이름을 부르는 사람 사이에 뗄 수 없는 인격적이고 본질적인 관계를 의미합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14장에서 17장을 보면, 특별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의 긴밀한 관계가 어떤 성경보다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을 보면,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라고 하십니다. 여기보면, 아버지, 예수, 성령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아들 성자 예수 그리스도, 성령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의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보내는 것도 예수의 이름으로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마지막에 누구의 이름으로 기도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을 주시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게 하시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을 수단이 아닙니다. 이름보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성경은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 이러이러한 결과가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예수 이름을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사함입니다.
사도행전 10장 43절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요한일서 2장 12절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요한복음 3장 18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이름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계명이 가지고 있는 더 적극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거룩입니다.
디도서 1장 16절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하나님을 시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입으로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삶을 보면 하나님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복종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찬양도 하고, 입술로 고백하며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지만, 삶에서는 전혀 하나님 백성의 삶을 살지 못하는 모습이 바로 헛되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라는 말입니다.
역대하 7장 14절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하나님은 우리를 “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예수님께 속한 자,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오늘날처럼 교회가 그리스도인이 조롱당하는 시대가 없었습니다. 대형 사건과 사고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연루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명예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이름과 명예가 땅바닥에 내던져진 시대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잘못된 말을 하고 잘못된 행동을 한다면 그것이 우리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이름이 거룩하게 드러나기 위한 노력해야 합니다. 나의 삶과 나의 언어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13-16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그리고 나서 16절에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그 들입니다. 곧 세상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 된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제 3계명,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의 의미입니다. 이 명령을 통해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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