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 2 우상을 섬기지 말라
Notes
Transcript
십계명 2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데칼로그의 제2말씀은 “너를 위해 새긴 우상과 형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에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인간이나 형태를 동산으로 빚어 놓고 신으로 섬기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특히 그리스도들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우상과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제2계명이 현실에서는 별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 주변에는 우상들과 현상들이 가득 차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2000년 대 들어오면서 십대 청소년들이 열광하는 젊은 가수들이 등장했고, 그 이후 한국 사회는 ‘아이돌 공화국’이 되어 버렸습니다. BTS를 비롯해 걸그룹, 남성그룹들이 약 200개나 된다고 합니다.
아이돌은 영어로 하면, 우상이라는 의미입니다. 아이돌의 어원은 ‘이돌룸’이라는 라틴어에서 나왔고, 이것이 다시 희랍어로 에이돌론에서 기원했습니다. ‘에이돌론’은 ‘보았다’ 의 뜻을 가진 ‘에이돈’에서 파생되었습니다. 결국, 아이돌이란 ‘눈에 보이는 어떤 이미지나 형상’을 가리킵니다.
왜? 하나님은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오늘 이 시간에 이 문제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무언가를 만들려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조차도 어떤 형상으로 만들려 노력하는 모습을 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금송아지 사건입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40일 동안 율법을 받고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보이지 않자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들과 함께 남아 있던 모세의 형 아론에게 이렇게 요구합니다.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출 32:1
모세를 하나님의 현인으로 생각했는데, 그가 보이지 않자,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신을 요구한 것입니다.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는 요구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없이 신상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변의 많은 나라들의 종교와 문화를 통해서 보고 배웠습니다. 특별히 그들이 애굽에 있을 때, 애굽의 많은 신들을 보았습니다. 아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직접적인 소통도 음성도 듣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연스럽게 눈이 보이는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은 무엇이었나요? 사람들로 하여금 금을 모으게 합니다. 그리고 금 송아지를 만들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출 32:4).
문맥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다른 신을 섬긴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되 눈에 보이는 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이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즐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송아지였을까요? 송아지는 히브리어로 “에겔”입니다. 1년 된 수송아지를 가리킵니다. 이 수송아지는 힘의 상징입니다. 강한 팔로 인도하여 낸 하나님을 힘의 상징으로 대표되는 송아지 상에 담아 섬기려고 한 것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 1년생 수송아지가 보이는 자연의 힘을 섬긴 결과였습니다.
이스라엘 세 번째 왕인 솔로몬 이후 그 아들 르호보암의 시대가 지나기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과 북으로 분열되었습니다. 북쪽은 열 지파가 나가서 북 이스라엘이 되고, 남쪽은 유다와 베냐민 두 지파만 남아 남 유다를 형성했습니다. 이로인해 그들에게 고민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전은 예루살렘에 있었기에, 그들은 절기만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야 하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남쪽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면 백성을 잃게 되는 두려움이 그들 가운데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북 이스라엘의 시작 왕이었던, 여로보암이 두 개의 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는 벧엘에, 다른 하나는 단에 두었습니다. 여로보암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한 우상 숭배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궤가 예루살렘에 있고, 하나님의 성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어떤 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을 금하셨을까요? 왜? 사람들은 하나님이 만들지 말라는 것을 그토록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우리는 고민해야 합니다. 왜? 사람들은 ‘상을 만드는 가?’ 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동기는 섬기는 신을 상으로 만들어 두면 그 신이 여기저기 왔다갔다 하지 못하고 한 곳에 머무르도록 붙잡아 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섬기는 신이 어디있는지 확실하게 모르면 섬기는 사람은 불안해 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도 계시고, 저기도 계신다면 사람들은 어디에서 섬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한 장소를 거룩하게 하고 일정한 사람이 종교행위를 관리하고, 일정한 시간에 예배드리는 것이 사실상 너무 편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섬기는 신을 한 곳에 두면 내가 확실히 볼 수 있고 섬길 수 있습니다. 경배하고 싶으면 가서 경배하면 되고, 절하고 싶으면 가서 절하면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각 자 자신들이 생각하는 신을 그와 같은 방법으로 한 곳에 만들어 세워 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신을 하고 싶은대로 조정하고 싶은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금송아지나 어떤 형상을 만들어 놓고 나면, 그 형상은 어디로 가지 않습니다. 결국 사람들의 손 바닥 안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든지 보고 싶으면 가고, 힘들면 가고, 온갖 행위를 다 합니다. 결국 그 형상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세의 교회들을 보면, 교회 안에 수많은 조각상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영국과 유럽의 교회들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겉과 속이 너무나 화려합니다. 하지만 그 안을 자세히 보면, 각 종 조각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예배 드리고, 기도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중세에도 그랬고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그 조각상들을 하나님처럼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1522년을 기점으로 우상 파괴 작업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개신교 안에는 어떤 형상을 볼 수 없습니다. "쯔빙글리나 칼빈 등이 십자가와 같은 모든 성상으로 인해 성도들이 우상 숭배의 길로 빠져들 수 있다고 언급했다"며 "특히 칼빈이 '<기독교강요> 제1권 10~12장에서 이 입장을 분명히 밝히"며 십자가 형상을 금지해야 한다고 전했습니다. 그래서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 총회는 2015년 100회 총회에서 교회 안에 십자가 형상은 숭배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강대의 십자가 부착금지를 결의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을 어떤 형상을 통해 섬길 수 없는 것일까요?
첫째는 하나님을 어떤 모양으로 만들어서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를 제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하고 싶다고 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택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을 때는 하나님은 그들을 진멸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만 그렇습니까?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를 불러주신 것은 우리가 원해서가 아닙니다. 그분의 절대적은 주권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자유에 따라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가 상을 만들어 놓으면 하나님의 전적인 자유가 우리를 제약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4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과 블레셋 사이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4천명이 죽어 나갔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장로들이 모여서 의논한 끝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가져와 하나님의 힘을 발휘하자 하였습니다. 언약궤가 도착하자 백성들이 소리치면서 좋아했습니다.
이 사건을 사무엘상 4장 6-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블레셋 사람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이르되 히브리 진영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찌 됨이냐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영에 들어온 줄을 깨달은지라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이르되 신이 진영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이르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날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싸워보기도 전에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힘에 대해 인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신 사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일들을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편에 선다면, 그 어느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반응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만 자신들의 진영에 갖다 놓으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기게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 보다는 오직 언약궤만 있으면... 무슨 말입니까? 즉, 주술적인 힘을 발휘하면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전쟁의 결과가 어땠습니까? 언약궤가 들어오니깐 블레셋 사람들은 아주 엄숙합니다. 여호와께서 싸우실 테니깐, 잘못하면 우리가 죽는다 생각하고 용기있는 자가 싸우라고 독려했습니다.
사무엘상 4장 10절 “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첫 번째 전쟁에서 4천 명이 죽었고, 두 번째 전쟁에서 3만 명이 죽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줍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기 보다는 언약궤를 신뢰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언약궤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형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피조세계에 있는 것, 피조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그것들을 만드신 자의 자유, 하나님이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이끌어 나가고 스스로 활동하는 자유를 제약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을 어떤 신상으로도 표현하면 안 되는 이유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물 속에 있는 것 중 그 무엇도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위엄, 하나님의 높으심을 표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4장 11-12절을 보면, “너희가 가까이 나아와서 산 아래에 서니 그 산에 불이 붙어 불길이 충천하고 어둠과 구름과 흑암이 덮였는데 여호와께서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되 음성뿐이므로 너희가 그 말소리만 듣고 형상은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나님의 형상은 보지 못하고 음성만 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15-16절에서 “여호와께서 호렙 산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그리하여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해 어떤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지 말라 남자의 형상이든지, 여자의 형상이든지...”
무슨 말입니까? 아무도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했다는 것은 누구도 어떠한 형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크심,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영광을 전혀 표현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우리의 손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위엄과 하나님의 크심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 40장 21-24절에서 하나님의 크심이 어떠하신지를 말씀합니다.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에 사는 사람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 같이 펴셨으며 거주할 천막 같이 치셨고 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 그들은 겨우 심기고 겨우 뿌려졌으며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곧 하나님이 입김을 부시니 그들은 말라 회오리바람에 불려 가는 초개 같도다”
무슨 말입니까? 다른 모든 것들은 메뚜기 같고 초개(티끌, 먼지) 와 같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메뚜기와 비교 할 수 없는 존재이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고, 완전하신 분이시기에 그 어떤 피조물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아무리 좋은 의도로, 심지어 하나님을 잘 섬기려는 의도로 그랬다 하더라도 어떤 상을 만들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과 능력에 전혀 합당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어떤 모양, 어떤 형상으로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형상을 보여주시기 않았고, 오직 음성을 통해서 전달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음성은 성경을 통해서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성경을 통해서 약속하고 권유하는 대로 우리가 믿고 따르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방식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하나님을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모습을 절대로 보여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모세가 그토록 하나님의 얼굴을 보기 원했지만, 하나님은 보여주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모세가 등만 봤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오직 음성을 통해서 말씀하셨고,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지키고 살면, 그것이 우리에게 복이 되고 생명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신 6:24)
우상을 만들어서 섬기는 사람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출애굽기 20장 4-6절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축복과 저주를 주시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왜? 질투를 하십니까?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이 언제 질투합니까?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빼앗겼을 때, 우리는 질투를 느낍니다. 하나님이 질투하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미워하고 섬기지 않는 사람에게 보복하신다는 의미 뿐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복을 주시는 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질투하는 하나님이라는 말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더 은혜를 베푸시고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에게는 벌을 주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출애굽기 20장 5-6절에서도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에게는 죄를 갚으시는데 3-4대 까지 갚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벌을 주시는 하나님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비가 없다고 말합니다. 정말 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천대까지입니다. 남은 평생을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단, “하나님 앞에 돌아온다면” 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돌이키십니다. 그런 경우가 성경에 너무나 많이 나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히스기야 왕의 이야기입니다. 열왕기하 20장 3절을 보면 히스기야가 기도할 때, 그를 살려 주셨습니다. 히스기야가 잘 해서가 아닙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여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그리고 그 다음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 내가 네 날에 십오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여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더라” (왕하 20:5-6)
하나님의 종 다윗, 그의 신앙을 기억하고 히스기야의 생명이 15년 연장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이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자들에게 복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신앙생활하는 것이, 내 아들, 내 딸, 내 자손이 잘 되는 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하면 불신앙이 우리의 자녀들에게 계승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물 속에 있는 어떤 형상으로든지 우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의 형상을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바로 누구입니까? 바로 인간인 우리입니다.
창세기 1장 26-28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리를 지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하나니의 형상이란, 하나님의 속성인 거룩, 의, 완전함 등 하나님의 완벽한 성품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를 통해 들어온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원의(하나님의 형상)이 상실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인간은 더 이상 자기 스스로 완벽한 거룩을 이룰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간에게는 더 이상 완전함이 없습니다. 의를 이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에게 주셨지만, 인간에게 죄가 전가되고, 그로 인해 죄책과 오염으로 인해 더 이상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죄의 결과가 우상을 섬기는 것이고, 다른 형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회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종의 형체를 가져 이 땅에 섬기려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빌 2:7).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비어 섬기기 위해 이 땅에 오셨는데, 그 누가 감히 자신을 우상화하거나, 어떤 모양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올바르게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믿고 따라가면, 더 이상 세상의 어떤 것들을 섬길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면 우상화의 길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할 수 있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요일 1:1
예수님은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빌립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 14:8-9
사랑하는 여러분, 따라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완벽한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절대로로 우상숭배의 길은 걸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믿음과 사랑, 그리고 의롭고 거룩하게 살고 싶은 욕망과 소원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가게 된다”고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면, 이스라엘은 이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예배해야 하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는 방식으로 삶을 살아야 하고, 형상이 없는 신을 섬기는 기독교 안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 외 다른 것들을 만들거나 섬길 수 없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데칼로그 2번째 계명입니다. 바라기는 오늘도 내 안에 역사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눈에 보이는 어떤 형상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안에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