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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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마태복음 6장 9절
주기도문의 시작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헬라어 어순으로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아버지, 하늘에 계신” 누가복음은 마태복음과 달리 “하늘에 계신” 이라는 단어를 생략하였지만, 어째듯 공통적으로 “아버지여” 로 시작합니다.
열쇠를 잃어본적이 있으십니까? 요즘은 번호키가 되어 있어서 열쇠가 거의 필요없기도 하지만, 예전에는 열쇠가 없으면 집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영국은 번호키는 없고 아직까지 열쇠를 사용합니다. 열쇠를 잃어버리면 큰 일입니다. 한번은 밖에 잠깐 볼 일이 있어서 나왔는데, 그만 열쇠를 집 안에 놔두고 문을 잠겨 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열어봐도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열쇠 수리 공을 불렀습니다. 엄청난 비용을 들어갔습니다. 문 한번 열어주는데, 100 파운드가 들어갔습니다. 15만원 정도입니다. 열쇠가 없으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에도 열쇠가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의 문 앞에서 문을 열지 못하고 서성이다가 돌아갑니다. 남아공의 화란 개혁자인 앤드류 머레이는 주기도문의 첫 구절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가 “기도의 열쇠”라고 표현했습니다. 왜? 그는 이런 표현을 한 것일까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를 기도의 시작을 알리는 관용구로 별 의미 없는 말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하늘에 계신’ 이라는 말은 우리 기도의 철학적 기초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 라는 말은 어쩌면 멀리 계시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성경에서 하늘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샤마임” 헬라어는 “우라노스” 라는 단어인데, 두 개의 복수를 사용합니다. 그러니깐,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눈으로 보는 물리적인 하늘이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인 세계, 영적인 영역을 지칭하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1장 11절을 보면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다시 정리하면,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 보느냐?” 는 눈으로 보이는 하늘입니다. “너희를 떠나서 하늘로 올라가신”에서 하늘은 천국을 말합니다.
따라서 하늘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리적인 하늘과 영적인 영역의 하늘입니다. 이러한 개념은 성경 여기저기에서 등장합니다. 특별히 에베소서에서 하늘이라는 단어가 상당히 많이 나오는데,
에베소서 1장 3절 “하늘에 속한 온갖 신령한 복”
에베소서 1장 10절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에베소서 3장 10절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
에베소서 6장 9절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하늘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는데, 이 “하늘”이라는 영역에는 주님께서 계실 뿐 아니라, 통치자와 권세자가 존재함을 설명합니다. 온갖 신령한 복이 하늘에 속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셨다가 다시 올라가셨으며, 우리가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게 하셨습니다.
하늘이라는 개념은 오늘날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매우 거리가 먼 개념입니다. 오늘날의 세상의 세계관은 어떻습니까?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관찰될 수 있고, 실험될 수 있는 것만을 실존하는 세계로 생각합니다. 과학주의는 어떻습니까? 새로운 최첨단 과학기술이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눈에 보이는 실존주의, 그래서 하늘을 공간의 개념으로 눈에 보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에 세상의 가치관이고 세계관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 속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늘에 계신” 이라는 말은 우리가 보고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을 넘어서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이 고백은 우리의 인식 넘어에 계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근접할 수 없는 존재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말해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은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주 밖에 저 멀리 계시다가 우리 속에 개입하지도 않고, 멀찍이 바라보시는 분으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쉽게 단정짓고 규명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다만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에게 드려내지신 만큼, 딱 그만큼만 알 수 있을 뿐,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와 지식에 비하면, 바닷가의 물 한방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더듬어 알게 되고, 하나님을 믿게 되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극히 일부 우리에게 보여주셨지만, 그 작은 지식으로 우리는 겨우 이해하고, 때때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따라갑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늘에 계신” 이라 부를 때, 그것은 하나님의 신비와 경외심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가 기도하는 분이 누구인가? 깊이 묵상하기를 소원합니다. 이것이 기도의 첫 번째 열쇠입니다.
두 번째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라는 단어는 수평적 관계를 말할 때 사용하는 인칭대명사입니다. 사실 “우리”라는 인칭대명사는 한국사회에서 자주 사용합니다. 친구와 대화할 때도, 우리 엄마, 우리 아빠가... 너무 흔하게 사용하다 보니깐 “우리” 라는 단어에 별 감동도 없이 사용합니다.
그러나 주기도문의 전후를 살펴보면 “우리”라는 단어에 특별한 의미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5장 23,24절입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형제나 자매의 수평적 관계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도 괸장히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 즉, 형제나 자매들 가운데 문제가 있을 때... 다시 말하면, 우리 사이에 이런 문제가 해결되어야 기도와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신다는 것입니다. 수평적 관계가 수직적 관계에 직접적으로 연관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가르치시고 난 후, 수평적 관계인 용서에 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14,15절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주기도문의 마지막 부분이 어떤 내용입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시고” 가 끝나자마자, 다시 한번 용서가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기도를 ‘나의 기도’라 생각합니다. 그 결과 오늘날 기도는 그냥 개인적으로 드리는 기도, 내가 당한 어려움이 없어지고, 복이 찾아오기만을 구하는 기도로 전략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누구일까요? 나만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고, 내 가족, 내 형제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일까요? 아니면, 이 땅위에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을 품으면서 기도하라는 것일까요?
요한일서 5장 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없던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그 공동체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처음부터 혼자 할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과 관계 없던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는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식구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밥을 먹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식구들입니다. 믿습니까?
이 “우리”라는 말은 막연한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하는 말이 아닙니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고, 함께 대화를 나누고, 밥도 먹고, 수많은 세월과 시간을 함께 보내는 가족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실 우리는 서로 생각도 다르고, 성향도 다르고, 그리스도가 아니었다면 만날 일도 없었던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세 번째, 아버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말 주기도문에는 “우리”라는 단어가 6번 나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오늘날 우리에게, 우리가 우리에게, 우리의 죄를 사하여, 우리를 시험에 들게...” 그런데 헬라어 성경에는 9번 등장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오늘 우리에게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우리에게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우리를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사실상 주기도문은 “우리”로 도배되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하나님나라 백성, 하나님이 부르신 우리의 형제자매들, 그 사람들을 품고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는 사랑이 확대되는 만큼 확대됩니다.
어떤 이들은 “우리”를 매우 추상적으로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우리”는 나와 부딪치고, 만나고, 때로는 싸우기도 하고, 나의 가정사를 잘 알고 있는 사람, 우리집 밥 숟가락이 몇 개인지까지 잘 알고 있는 사람들, 함께 신앙생활을 몇 십년 동안 함께한 사람들과 함께 “우리”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할 때, 내가 속한 작은 공동체를 넘어, 교회 전체의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교회를 넘어 열방의 교회까지 “우리”라고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게 주어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호칭은 “하늘에 계신” 즉 수평적인 관계의 기초인 우리와, 수직적 관계의 기초인 “아버지” 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을 헬라어로 보면, “아버지여, 우리의 하늘에 계신”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가 맨 앞에서 등장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기도의 열쇠가 의미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4장 22,23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되시기로 작정합니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보내 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보내 주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당시 노예였던, 숫자도 적고, 민족의 정체성도 분명하지 않던 소수 민족인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내 아들” 이라고 불러 주셨습니다. 맏 아들이라는 말 속에는 다른 자녀들이 계속 더 나올 것을 암시해 줍니다. 억압과 탄식 속에 있는 노예들을 해방시켜 맏아들로 삼아주시고, 앞으로 태어날 새로운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노예들을 해방시키시면서 아버지가 되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모든 인류의 아버지가 되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죄의 노예가 되어 세상을 좇아 살며 살 수 밖에 없던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찾아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내셨습니다. 믿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감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2절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권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리가 생겼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8장 15절에서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의해서 세워집니다. 그리고 새로운 백성이 태어납니다. 이 나라 백성은 서로 가족 관계입니다. 단지 그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부활과 관련해서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20장 1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예수님이 ‘나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이라고 부르던 그 하나님을 우리도 ‘우리 아버지, 우리 하나님’이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고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을 ‘아버지’ 부를 때 우리는 놀라운 감격 속에 있을 수 있습니다. 고아였던, 버림받았던, 노예와 같았던 우리를 불러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을 우리가 부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버지’ 라는 호칭은 우리에게 친밀감과 신뢰감을 불러일으키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아버지’는 딱딱하고, 불편하고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육신의 아버지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잘못하면 그 자녀가 하나님 아버지를 제대로 부르지 못 합니다. 그러나 하늘의 아버지을 알아가면서 육신의 아버지의 한계를 보고, 또 나의 한계를 보고, 점점 하늘 아버지를 닮아가는 과정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육신의 아버지와는 다릅니다. 하나님을 묵상하면 할수록, 진정한 아버지의 모습이 자리잡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소망이 다시 생겨납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31-39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대한 감격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아버지”라 기도할 때, 우리는 나에게 필요한 모든 거을 이미 달 알고계시며 나를 위해서면 그 무엇도 아끼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주실 준비가 되어 있는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방인의 기도처럼 하나님을 감동시켜 무얼 얻어 내려고 노력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저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 사랑에 잠기는 것입니다. 죄의 노예였던 우리를 위해 값진 희생을 치르시고 우리를 자녀 삼으신 하나님을 기억하면 되는 것입니다. 여전히 쓸모없고, 부족한 우리를 은혜로 불러 주신 하나님을 의지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가운데 이 열쇠를 사용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어려워 합니다. 매일 기도하지만 기도가 깊어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간과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너무 가볍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버지”라 고백할 때, 기도의 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주기도문은 아무나 드리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저 자신이 잘 되고, 이 땅에서 성공하고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만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나라 백성, 내가 사랑하는 자매와 형제들을 마음속에 품은 사람들이 드릴 수 있는 기도입니다. 땅에 것들에 메여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드릴 수 있는 기도입니다. 주기도문은 기도의 본질이 무엇인지 아는 자들이 드리는 기도입니다.
바라기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진심으로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또한 이러한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주기도문의 놀라운 축복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축도>
지금은 세상 끝날 까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함께하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감화, 감동, 교통하심이,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를 기억하고, 이 기도를 통해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기 소원하는 사랑하는 주의 자녀들 머리위에 가정과 직장과 삶의 모든 영역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 지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