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의 심정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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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의 심정이 있습니까?
롬9:1-5
새생명초청잔치가 이제 한달여 남았습니다. 이 새생명초청잔치를 영적 추수의 현장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영혼 구원을 위해 통절한 기도와 눈물을 드리며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심정을 가진 전도자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한 영혼의 구원에서 그치지 않고 민족의 구원을 위해 마음에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하는 한 사람, 곧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과연 여러분에게 이러한 목자의 심정이 있습니까? 이 시간 우리의 냉랭한 가슴에 목자의 심정으로 뜨거운 불을 지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1절로 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로마서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리고 성화의 삶을 이야기 한 다음에 마지막으로 이렇게 선언합니다. 3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로마서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감격에 찬 목소리로 잠담하며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9장에 와서 자신에게 말 못할 고민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로마서 9: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울음 섞인 목소리로 어조가 바뀌면서 자기 안에 있는 큰 근심과 그칠 줄 모르는 고통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마음에 고통이 있습니다. 그것이 질병일 수도 가난일 수도 자식이나 미래의 걱정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개인적인 일상의 고민도 있을 수 있지만 또 다른 고민 즉 영적인 고민도 있습니다. 내 자녀가 예수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내 부모가, 내 형제가 예수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문제 때문에 심각하게 고민해 보셨습니까? 사도바울은 그것이 고민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고통입니까? 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로마서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이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주를 받다라는 말은 헬라어 성경에 ‘아나데마’(ἀνάθεμα)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하나님께 저주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에게도 저주를 받는 것을 싫어하는데 하나님께 저주를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핵심은 ‘저주를 받을지라도’가 핵심이 아니라 ‘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이것이 핵심입니다. 이러한 정신은 스스로 터득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배운 것입니다. 하나님이심에도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고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아 죽어가시면서까지 구원받아야 할 불쌍한 자기의 백성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시는 광경을 생각하면서, 자신도 저주를 받을지라도 골육의 친척 중 몇이라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이 자신이 원하는 바로라고 담대하게 고백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친히 보여주신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의 생애는 불쌍한 영혼들에 대한 눈물로 가득 찬 생애였습니다. 그 중 한번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기도의 소원을 올린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당신 자신이 잠시 후에 형벌의 십자가를 감당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이렇게 못 박는 사람들이 이후에 당하게 될 끔찍한 형벌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바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이었습니다.
믿지 않고 아직까지도 불신 가운데 머물러 있는 여러분들의 가족들은, 친구들은, 이웃들은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까? 잠시 후 이 세상을 떠날 우리 엄마가, 아빠가, 자녀가, 이웃들이 예수 믿지 않고 죽으면 어떻게 될 것인지 그 결과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가족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어두움에 가득 찬 우리 가족들의 영혼에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믿어지는 것은 성령의 역사 없이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안됩니다. 정말 하나님이 하늘을 열고 은혜와 사랑을 부어주셔서 우리 어머니의 맘을 녹이셔야 합니다. 우리 아버지의 돌 같은 마음을 깨뜨리셔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 홀로 우리 가족을 구원하지 않으시고 먼저 예수를 믿은 나를 사용하셔서 가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왜 이렇게 무지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그들의 신앙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율법과 전통과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새 시대, 복음시대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오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돌아다니며 그 부활을 전하고 다니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 십자가를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역설하고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여전히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죽이고서도 회개를 하지 않고 다시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예정론을 강하게 말하고 다니지는 않습니다. 예정론은 멸망당할 운명을 지닌 사람이 있다는 이론입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멸망당할 사람을 미리 운명지어 놓았다는 이론이 성립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을 보면 그렇게 멸망당하기로 작정된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에 저주를 받으면 강퍅해지고 무슨 말을 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믿지 않으려고 귀를 막고 못들은 척하고 거부하고 고집 세게 행동합니다. 별소리를 다 들려주고 보여주어도 믿지 않습니다. 믿지 않으려고 열심히 귀를 막고 있습니다. 옛날 양반들이 가족들이 교회에 가서 변화되어 오는 것을 보고 속으로 자신도 교회에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 끝까지 고집을 부리다가 죽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멸망당할 사람은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그 형편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의 고집과 무지와 잘못된 점을 사도바울은 신랄하게 질타했습니다. 그러다가 독백처럼 외쳤습니다. “차라리 내가 저주 받는다 할지라도 내 백성이 믿는다면….” 그는 이 말에 자기 심정을 피력합니다. 그 마음은 바로 목자의 마음이요, 예수님의 마음의 복사본이었습니다.
영혼들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눈동자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과 같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전하시는 주님의 말씀에는 그분의 전인격과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누가복음 19: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 누가복음 19:41–44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0:14–15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바울은 자신의 가슴속에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을 심어준 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1절 말씀에 성령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통해 예수님의 마음이 바울의 마음이 되었다면, 바울의 마음이 오늘날 성령을 받은 우리 모두의 마음이 될 수 있음을 믿으십니까?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았지만, 자기 민족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이나 대가지불도 불사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애타는 심정과 달리 동족 이스라엘은 그에게 어떠한 존재였습니까? 고린도후서 11:24-2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1:24–25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사도행전 28장 17-2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사도행전 28:17–20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그들이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준 바 되었으니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함이요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이러한 마음을 가졌다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이를 갈면서 미워할 수 밖에 없는 원수였지만, 바울은 그들의 죄는 미워하되 그들의 영혼만은 미워할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의를 왜곡하였습니다. 로마서 10장 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로마서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아는 척 했습니다. 그들은 열심도 있었고 뜨거운 열정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진리가 없었습니다. 열심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공산주의에도 열심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은 모순된 열심입니다. 이단의 열심도 모순된 열심입니다. 이스라엘의 열심은 대단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을 보면 안타까울 정도로 철저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했다고 잡아서 사형에 처했습니다. 간음한 자를 데리고 와서 돌로 칠까요 말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안식일에는 짐승이 우물에 빠져도 건지지를 못하였습니다. 이런 무지로 인해 구원이 가까이 왔을 때 선뜻 받지 않고 거부하였고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도 거부하고 죽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부활도 거부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내 의에 기준을 삼았기 때문입니다.
또 내 지식에 근거를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0장 3절에서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오늘 교회 안에서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내 의를 주장하고 내가 강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왜곡되는 것입니다. 모든 신앙인이 하나님의 의에 기준을 둔다면 갈등은 금방 사라질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자기의 의를 믿으니까 예수를 받아들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누구도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10장 13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로마서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여러분은 어떻게 예수를 알고 믿게 되었습니까? 여러분들이 예수를 알고 믿게 되었다는 것은 굉장한 사건이고 은혜이고 복입니다. 사람이 예수를 믿는 일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어도 당장 생기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오늘 예수를 믿거나 안믿거나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뭐가 생깁니까? 아무것도 주어지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무관심 때문입니다. 먹고 살기에 바쁜데 예수에 관심 갖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들이 성경을 왜 안읽는가 하면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손에 들기만 하면 잠이 오는 것입니다.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관심이 있어 보십시오. 잠이 오겠습니까? 이 무관심이 참 무서운 것입니다.
어느 여인이 책 한권을 사서 읽었는데 재미가 없어서 그냥 버렸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결혼을 하고 보니 그 책을 쓴 저자가 남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찾아 다시 읽어보니까 그렇게 재미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뭐가 달라졌습니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관심만 달라졌습니다. 그러니까 그 책이 재미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전도를 하면 잘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그것은 관심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주 쉽게 예수를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그 사람에게 주어진 은혜입니다.
유대인들은 큰 오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을 오해한 것입니다. 하나님 생각은 온 인류가 구원받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예수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를 오해하여 하나님은 우리들만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말했다고 십자가에 달아 죽였습니다. 이런 오해가 어디 있습니까? 사도바울이 이같은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깨닫고 난 후 그 사실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려 하자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잡아 죽이려 했습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내 자신이 저주받아 예수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바라는 바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 백성들이 결국은 하나님을 믿으리라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10:21절에 근거해서입니다. 함께 10장 21절을 읽겠습니다. 로마서 10:21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탕자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매일 밤 문을 열어 놓고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또 호세아가 집나간 아내가 돌아오기를 밤새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지금 거스르는 이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이 말씀은 바울은 결국 이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믿고 기대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의 가족이 모두 믿는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가족이, 이웃이 믿지 않는다면 또 무슨 불행입니까? 즐겁다가도 그 생각만 하면 즐거움이 사라집니다. 그 고민이 나의 고민이고 우리들의 고민이고, 사도바울의 고민이고 하나님의 고민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사위이기도 했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미개한 인디언들을 위해 자신의 한 평생을 송두리째 불태웠던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25세에 인디언 선교에 헌신하여 2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만, 그의 짧은 생애와 달리 그 영향력은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그는 폐결핵 말기에도 눈덮인 언덕에서 붉은 선혈을 토하며 인디언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마치 자신의 육체를 깎아서 하나님께 바치듯 자신을 산제물로 드렸던 것입니다. 그의 유일한 유작인 일기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써 있습니다.
“영혼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다면 내가 어디에 있든지, 어떻게 살든지, 또 무엇을 견디게 되든지 나는 관계치 않노라. 잠을 자면 저들을 꿈꾸고, 잠을 깨면 첫 번째 드는 생각이 잃어버린 영혼들이다. 아무리 박식하고 능락하며 또 심오한 설교와 청중을 감동시키는 웅변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결코 인간의 심령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결핍을 대신할 수는 없노라.”
이것이 바로 바울의 심정이요, 목자의 심정이요, 성령이 주시는 심정입니다. 이러한 심정은 특별한 사람만이 품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품어야 할 심정입니다. 여러분은 자나깨나 품고 있는 생각은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주님은 우리에게 2가지를 질문하십니다. “너에게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느냐? 너희 가족, 이웃, 너희 민족을 위한 눈물이 있느냐?” 여러분은 이 질문에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잃은 양을 찾아 헤매는 목자의 심정이 없다면 그것은 병든 마음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우리의 마음속에 성령이 거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주님의 심정을 불어 넣어주십니다. 이제 가슴을 열어 목자의 심정을 충만케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그리스도의 심정을 가득 담고 불쌍한 영혼들에게 가서 사랑을 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IV. 결론
희생해야 합니다. 그 잃어버린 영혼이 예수를 믿고 우리와 함께 복음의 빛 가운데 살면서 하늘 가족이 될 수만 있다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내가 하나님께로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나는 관계없습니다. 어느 날 죽음이 불현듯 찾아오고 우리 모두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천국에 가겠죠. 그때 주님이 우리에게 물을 것입니다. “네 가족들은 어디에 있느냐?” “예수님 죄송합니다. 제가 한번도 복음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가족들이 모두 지옥에 있습니다. 저기 울부짖는 소리가 우리 가족들의 소리입니다.” 라고 말해야 할 때 거기가 어떻게 우리에게 천국일 수가 있습니까? 먼저 불쌍한 것은 하나님을 믿은 우리에게 돌봄을 받지 못하고 버려졌던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의 불쌍한 영혼이 아닐까요? 그럼 그 보다 더 불쌍한 것은 그렇게 불쌍한 가족을 위해서 기도할 줄도 모르고, 눈물 흘려줄지도 모르고 희생할 줄 몰랐던 더러운 우리의 영혼이 아니고 누가 불쌍한 영혼이겠습니까?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깊이 회개하고 여러분들의 가족을 가슴에 깊이 끌어안고 눈물 흘리는 전도자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결국 유대인들 믿을 것 기대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들을 전도대상자로 삼고 있습니까? 바울이 평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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