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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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믿음
히브리서 11장 8-10절
제가 어린이 주일학교에 다닐 때 배웠던 찬송곡들 중 한 곡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닌 분들은 아마 아실 겁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요, 그 중에 하나 키가 크고요 나머지는 작대요. 오른팔 들어요, 왼팔 들어요, 고개를 흔들어요, 히프를 흔들어요...”
먼저, 아브라함에게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창세기를 보면 이삭과 이스마엘이 있었고, 또 나중에 그두라를 통해 낳은 6명의 아들들이 있었습니다(창 25:2). 그들 중 하나는 키가 크고 나머지는 작다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알았는지도 의문입니다. 게다가 아브라함과 그 아들에 대해 노래하면서 왜 우리가 오른팔, 왼팔, 고개와 히프까지 흔들어야 하는지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어쨌든 어릴 때 그 노래를 율동과 함께 재미있게 부르던 기억이 납니다.
성경의 인물들 중에서 유명한 사람들을 꼽을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소위 ‘믿음의 조상’이라고도 불립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우리의 믿음의 원조가 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 흩어진 유대교인이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브라함은 만장일치로 믿음의 원조가 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믿음의 원조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믿음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1. 믿음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8절 읽어보겠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여기서 “순종하다“ 는 헬라어로 ”휘파쿠에인“ 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 2번 사용하는데, 창세기 22장 8절, 26장 5절에서 사용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즉각적인 순종, 신속성을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8절은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순종함으로 고향을 떠난 것입니다. 그는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지 못하고 즉각적으로 신속하게 나아간 것입니다. 즉, 그에게 어디로 가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에게는 순종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에게 믿음은 순종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순종하는 믿음으로 그는 그를 따라오는 후배들에게 믿음의 원조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믿음은 순종인 것을, 즉각적인 순종인 것을 가르친 것입니다.
창세기 12장 1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창 12:1)
이때 아브라함은 주님께서 가라고 명령하시는 땅이 어디인지도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어디로 갈 것인지 미리 정보를 주시고 떠나라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갑자기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아직 보여주신 것도 아니고 거기가 어디인지 알려주신 것도 아니고, 앞으로 보여줄 땅으로 무조건 가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아, 너는 내가 보여줄 땅으로 가라.”
“예, 알겠습니다. 그러면 어디로 갈까요?”
“그냥 가라.”
“예? 아니, 갈 텐데 어디로 가야 하는 건가요?”“그러니까 가라. 무조건 가라.”
이게 말이 됩니까?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조건 가라니요? 이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왜 아브라함에게 순종이 중요했을까요? 그것은 그를 부르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가 그의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주인에게 종이 할일은 순종이 아니겠습니까? 느헤미야 9:7-8절에 보면 아브라함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주는 하나님 여호와시라 옛적에 아브람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그의 마음이 주 앞에서 충성됨을 보시고 그와 더불어 언약을 세우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의 땅을 그의 씨에게 주리라 하시더니 그 말씀대로 이루셨사오매 주는 의로우심이로소이다"고 했습니다. 아브람의 충성의 원인이 하나님께서 그의 주인 되셨기 때문임을 증언한 것입니다.
신학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각 때문에 순종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 순종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창세기 22장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지시하는 산에 가서 번제로 드리라.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우리는 여기서 아브라함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그 사랑하는 아들을 바치라 했을 때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마음... 아마도 아브라함은 밤새 고민하고 또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아들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지시한 땅으로 갑니다.
아들 이삭이 묻습니다. “아버지, 나무는 있는데 번제 할 양은 어디있습니까?” 차마 말 하지 못하는 아브라함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가슴이 찢어졌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순종하게 됩니다. 다른 이들 같으면 생각지도 못할 그 일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경제학자 가운데 하버드 대학 교수로 미국 역대 대통령들의 경제 자문역을 했던 갤 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ith)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는 자서전적 성격의 책에서 평생 그를 도왔던 가정부요 비서였던 에밀리(Emily Gloria Wilson)라는 여성에 대한 찬사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런 애피소드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너무 피곤하여 낮에 잠간 쉬겠다고 말하고 낮잠에 빠졌는데 백악관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때 당시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에게서 직접 전화가 왔다고 합니다. "여기 백악관인데 갤 브레이스 교수 좀 바꿔 주게나." 이때 에밀리가 "죄송합니다. 교수님은 너무 피곤해서 잠시 쉬고 계시는데요." 했답니다. 할 수 없이 대통령이 신분을 밝혔다고 합니다. "나 대통령일세. 린든 존슨이네" 그러자 에밀리가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각하시군요. 너무 죄송합니다. 그런데 저를 고용하신 저의 주인은 각하가 아니라 교수님이십니다. 저는 저의 주인의 명을 따라야 합니다." 할 수 없이 대통령이 나중에 다시 전화하면서 "자네는 정말 훌륭한 가정부를 두었군. 백악관으로 보낼 수 없겠나?" 라고 말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여러분과 저를 부르신 하나님이 정말 우리의 주님이라고 고백하십니까? 그렇다면 그의 부르심, 그의 헌신의 요구에 기쁘게 순종하고 계십니까? 지금 당장 말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믿음은 순종이었습니다. 믿음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두 번째로 믿음은 희생하는 것입니다.
2. 믿음은 희생하는 것입니다.
9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아브라함에게는 고향을 떠나는 자체가 희생이었습니다. 창세기 11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본래 그 고향이 갈대아 우르 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지금의 이라크입니다. 갈대아 우르는 지금의 이락 남부 고대 유프라데 강 유역에 위치한 도시로 고대 세계에서는 굉장한 문명이 있었던 곳으로 고고학계에서 증언되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지만 아직 아무 것도 개발되지 않은 그 땅은 우르에 비하면 척박한 황무지였습니다. 본문 9절은 아브라함이 약속된 땅에 들어가서도 장막에 거하였다고 기록합니다.
중동지방을 지나가다 보면 이집트나 이스라엘에서 황무한 사막의 길가에 천막을 치고 사는 소위 베두윈 족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옛날 아브라함이 바로 그런 모습으로 사막생활을 했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도 한 동안 그런 삶을 산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여기 9절에 장막에 '거류했다'는 단어는 나그네처럼 거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방인으로 시민권도 없는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고향을 떠난 순간부터 나그네 인생을 시작했고, 그것은 곧 고난이요 희생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 때문에 행복한 나그네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소유하느냐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함이 가장 좋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길을 인도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의 기업이요, 상급이요, 재산이었습니다. 그의 행복은 저축된 자산이나 부동산, 증권을 헤아려 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행복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하루 일과 중 최고의 시간은 하나님과 기도로 교통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그가 받은 별명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야고보서2:23말씀에 보면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얻습니다.
야고보서 2장 23절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사야 41장 8절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하나님의 친구! 아마 하나님이 직접 부르셨을 것입니다. 그는 갈대아 우리를 떠날 때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을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친구!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별명이 있겠습니까?
“주님 사랑해요, 온맘과 정성 다해,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되기 원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 때문에 많은 것을 희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녁노을 조용한 미풍이 그의 뺨을 스칠 때 하나님에게 기도하면서 "너는 내 친구야"는 음성을 듣는 순간 그는 아무것도 잃어버린 것이 없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는 또한 고향을 떠나면서 여러 정다운 친구를 잃었고 정들었던 가족과 친척들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한밤중 빛나는 사막의 별을 보며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하나님이 그에게 "너는 내 친구야" 속삭여 주실 때 그는 결코 외롭지 않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가 고향을 떠날 때 그는 안락한 집을 포기했고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하늘이 보이는 천막에서 한밤의 한기를 피하고 아침잠을 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침에 떠오르는 아름다운 태양빛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동안 "너는 내 친구야"란 주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그는 결코 인생이 춥지 않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이제 그의 희생이 그의 상급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기쁘게 희생할 수 있었습니다. 믿음은 희생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즐거운 희생인 것입니다. 너무 희생을 두려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너무 인생을 계산적으로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계산했더라면 갈대아 우르를 떠날 수 있었을까요?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가 오늘의 우리에게 까지 기억되고 존경받는 믿음의 선배, 믿음의 원조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장차 천국에서 주님 뵙는 날, 우리에게 유일한 후회가 있을 수 있다면 한번도 주님 안에서 제대로 못산 것을 제일 부끄러운 인생이 있다면 주님 위해 주님 때문에 희생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인생인 것을 아십니까? 우리의 믿음이 믿음의 선배들의 희생과 고난으로 물려받은 믿음이라면 오늘날 주님의 사역을 위해 내게 있는 것으로 희생의 제사를 기쁨으로 드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 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에게 배우는 진정한 믿음-이것은 거룩한 희생이었습니다.
3. 세번째로 믿음은 바라보는 것입니다.
10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0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장막생활의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믿음의 삶을 기쁨으로 살아간 이유는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성'이라는 단어는 원문에서 성 앞에 정관사가 있어 "그 성"(the city)으로 번역되어야 마땅합니다. 이 유일하고 특별한 성은 물론 영원한 천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어거스틴은 이 본문에서 영감을 받아 "하나님의 도성"(City of God)이라는 책을 쓰게 됩니다. 천국의 소망이 확실한 사람은 이 땅에서의 안락한 삶에 너무 매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천국의 소망이 분명하다면 이 땅에서의 재물, 권력에 너무 집착하는 삶을 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좀더 자유하게 좀 더 유연하게 좀 더 단순하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초대교회 시대를 제외하고 기독교인들이 가장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았던 때가 있었다면 소위 청교도 시대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1600-1700년 시대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사치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소망은 천국에 두었기 때문에 겸소하게 살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천국의 소망을 망각하면 자꾸 이 세상에 집착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지요. 최초의 청교도 지도자중 한사람이었던 존 브래드포드(John Bradford)는 그가 죽기 다섯 달 전 투병생활을 하며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내 비록 여기에 부족함이 많으나, 거기에는 풍요함이 있을 것이네. 여기에 굶주림이 있으나 거기에는 배부름이 있을 것이네. 여기에는 피곤함이 있으나, 거기에는 안식이 있을 것이네. 내 비록 여기에서 이제 내 몸이 죽은 것 같으나, 거기에서 부활의 새 몸으로 영광 가운데 살아감을 확실히 바라보고 있다네."
그렇습니다. 어거스틴이 바라본 영원한 도성, 아브라함이 바라본 영원한 도성, 그 도성을 바라보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 도성을 바라보는 천국 믿음을 가지시길 소원합니다. 우리 주님도 십자가로 가시기 직전 이 영원한 하늘의 처소를 바라보며 이 세상의 모든 고난을 이기실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배신도, 세상의 몰이해도, 다가오는 십자가의 고통도 극복하실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더 이상 그를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도망하고 없었습니다. 그 절박한 시기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한14:1-3)
마크 부캐넌 <보이지 않는 것에 눈 뜨다>
“위를 보라! 이것이 당신과 내가 받아야 할 훈련이다. 위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쏟아라. 천국에, 성령에, 그리스도에게로 이것만이 자유와 거룩함의 삶을 위한 유일한 소망이며 최고의 소망이다. 우리 심령과 마음을 위에 있는 것들에 두지 못하면 못할 수록 이 땅에서의 삶이 더욱 비참해질 것이요, 비통해질 것이며 두려워질 것이다. 위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않으면 당신의 거룩함은 햇빛 찬란한 정원이 아니라 격통과 무정함과 눈보라와 권태가 지배하는 가혹한 툰두라의 땅이 될 것이다.
영원한 하늘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우리의 믿음의 원조이신 아브라함을 본받아 이런 믿음을 가진 믿음의 아버지, 믿음의 어머니, 믿음의 자녀들이 일어나게 되시길 소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