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요셉은

히브리서 11장 믿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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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요셉은
히 11: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우리가 잘 아는대로 요셉의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알고 있고, 그 이야기를 들으면 마치 드라마를 보는 듯 상상하게 됩니다. 예를들어 볼까요?
창세기 37장에서 형들에게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는 장면
창세기 39장에서 그 꿈으로 인해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야만 했던 요셉
창세기 39장 2절 이하에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노예로 살아가는 요셉 / 종으로 팔려간 것도 억울한데, 보디발 장군의 아내를 유혹했다는 누명을 받아 감옥에 끌려가는 요셉
창세기 40장에서 그 감옥에서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의 꿈을 해석해 주고 그로 인해 창세기 41장 애굽 바로의 꿈을 해석해 주는 장면까지 결국 요셉은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 형들을 다시 만나는 이야기는 마치 장편 드라마를 보는 듯합니다.
요셉은 역경 중에서 한결같이 하나님 앞에서 성실한 삶을 살았던 인물입니다. 자신의 환경이 어떠하던지 하나님만 신뢰했습니다. 요셉은 팔레스타인 본향에 거할 때도 타향인 애굽 땅에 있을 때도,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형통한 삶을 살았습니다. 요셉은 이스라엘 백성중에 있을 때에도 애굽땅에 홀로 있을 때에도, 목동시절에도 그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 기자는 요셉의 생애를 통하여 신앙의 본질을 말할 때, 지금까지 열거한 요셉의 삶을 다루지 않습니다. 다만 요셉의 죽음의 장면에서 그의 신앙의 특성과 우리에게 가르쳐 줄 신앙의 교훈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죽음을 통해서도 신앙을 교훈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단순히 “죽을 때에”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임종시에” 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이 죽을 때에...” 라고 소개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히브리 기자는 야곱의 죽음과 요셉의 죽음을 설명하면서,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21절에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22절에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우리성경에는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여기서 사용한 “죽을 때에” 는 헬라어 “아포트네스코” 라는 단어로, “임종시에” 는 “텔레프타오, 텔레오” 라는 단어는 “마치다, 이루다, 완성하다, 성취하다” 라는 의미로 “어떤 일을 마치고 종지부를 찍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하실 때,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아포트네스코”는 일반적인 죽음을 말합니다.
그러니깐 히브리 기자는 야곱과 요셉의 죽음을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왜? 히브리 기자는 요셉의 죽음을 끝이 아니라, 성취로 보았던 것일까요?
본문에 보면, 요셉은 애굽에 있었습니다.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그런데 그는 자기 후손들에게 애굽에 머무르지 말고 가나안 땅을 향해 떠날 것을 말합니다. 왜? 요셉은 떠나라고 말했을까요? 그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듣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5장 13~14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하신 약속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요셉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말씀이 실현될 때가 가까이 온 것을 알았습니다. 그가 죽으면 약속된 4대를 맞이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 애굽 땅을 떠나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돌아올 때입니다. 요셉은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창세기 50장을 보면, 요셉의 임종 장면이 나옵니다. 24절에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절에서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여기서 요셉은 “반드시” 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한글성경에는 “반드시”로 되어 있는데, 히브리어 단어는 “바카드” 로 “약속하다, 신뢰, 절차” 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깐, 요셉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였고,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셉의 확신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요셉의 확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었습니다. 어떤 말씀입니까? 하나님과 아브라함과 세운 언약의 말씀입니다. 언약의 핵심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영원한 언약을 요셉은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반드시 이루어질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신뢰했던 것입니다.
요셉은 애굽에 총리로 있으면서 많은 것을 가졌고 누렸던 사람입니다. 최고의 권력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 그것을 다 버리고 떠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의 마음 가운데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시온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의 신앙의 가치관은 어떻습니까? 주관적 감상에 형성된 신앙은 그 감상이 떠날 때, 신앙도 떠납니다. 주관적 철학의 의해 이루어진 신앙도 그 철학이 무너질 때, 그 신앙도 떠납니다. 그러나 신앙이 말씀에 근거한 신앙은, 이 말씀은 영원하기에 나의 신앙 역시 영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씀 없이 신앙생활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성경 없이 교회 출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없이 신앙생활은 불가능합니다. 말씀을 늘 듣었지만, 성경을 통해 진리의 말씀에 내 인격이 내 삶이 부딛하지 못하고, 그저 평생 동안 교회 출석하였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셉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요셉은 주관적 감상이나 철학이나 지식에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말씀에 근거위에 신앙을 형성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셉의 믿음입니다.
오늘날 이단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요즘 넷플릭스에 “나는 신이다” 이단의 이야기가 순위 1위를 기록했습니다. 그 영상에 등장하는 이단들의 모습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니, 오늘날 이단이라고 불리는 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두들, 성경을 신앙에 근거로 세우지 않고, 자신들에게 직통 계시가 임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주 명확하고, 정확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오직 말씀을 통해서, 말씀 위에 서야 합니다.
지금 요셉의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단순히 요셉은 자녀들에게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후손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50장 24절입니다.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절에서도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그의 믿음의 범위는 장차 이 언약을 이루실 하나님의 약속에 있었습니다. 장차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하나님의 말씀에 있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애굽의 삶에 있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가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을 이끌고 들어가게 하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사람들의 신앙이 모두 그러합니다. 로마서 9장 1절에 보면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무엇입니까? 2절입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민족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저주를 받아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때로는 나만을 위한, 나의 가족을 위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이 보다 높은 차원이어야 합니다.
출애굽기 32장 32절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모세의 중심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이 민족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기 위한 간절한 열망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어떤 수준의 위치에 있습니까? 우리의 믿음의 시야는 얼마나 넓습니까?
서울 합정동에 가면 양화진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수많은 선교사님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 중 루비 켄드릭 선교사의 무덤이 있습니다. 루비 케드릭 선교사는 미국 텍사스 남 감리교회에서 파송 받아 한국에 온 여자 선교사님이십니다. 어느날 텍사스 청년회 컨퍼런스에 조선으로부터 비보가 날아옵니다. 그것은 루비 켄드릭 선교사가 세상을 떠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1908년 맹장염으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헌금을 모아 한국에 또 다른 선교사를 보냈고, 지원하였습니다.
양화진에 가면 루비 켄드릭 선교사의 무덤에 이렇게 쓰여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If I have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
나에게 천번의 삶이 있다면, 그 삶을 한국을 위해 바치겠다
이것이 바로 믿음을 가진자의 시야입니다. 오늘 요셉이 가진 믿음의 시야를 보시기 바랍니다. 요셉은 이렇게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22절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여기서 요셉은 자기를 애굽에 장사 지내지 말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묻어 달라고 합니다. 애굽의 장례 행렬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국무총리가 죽었으니, 나라의 국장으로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장례 행렬이 가나안 땅을 향해 있습니다.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유언과 장례를 보았을 것입니다.
요셉은 지금 외치고 있습니다. “나의 소망은 이 땅에 있지 않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요셉의 신앙고백입니다. 애굽에 묻히지 않고 가나안을 향해가는 그의 장례행렬은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여 그의 말씀대로 살다가 그가 누렸던 모든 영광중에서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잊지 않고 믿고 있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이런 고백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까? 이러한 증거가 나에게 있습니까?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사람들이 자신을 뭐라 부르는지 물어십니다. 이 때, 제자들은 선지자 중 한 사람이라고 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시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때 베드로가 아주 유명한 말을 합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우리의 믿음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데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만약 요셉이 애굽땅에 묻혔다면 그도 별 수 없이 애굽의 부요와 향락에 타협한 인간이란 결론이 내려졌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애굽인으로 착각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최후 죽음을 통해서 그의 신앙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음을 확실히 증거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니고데모가 어느 날 예수님께 찾아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밤중에 찾아온 이유가 그가 고위관리직이라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온 듯 합니다. 이 때 예수님은 거듭남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는 아주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3장 16절을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였는지, 자기를 위하여 예수님을 보냈고, 그 분이 바로 자기 앞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성경에는 니고데모의 다음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삶은 변화되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7장 50절입니다. “그 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이제 그는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옹호합니다. 니고데모는 더 이상 숨길 수 없었습니다. 자기가 만났던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을 알렸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9절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옛날에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나머지 한밤중에 예수님께 찾아왔던 그가 이제는 몰약을 가지고 와 예수님의 장례에 참여하였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떠나기는 시각에 공개적으로 예수님의 시신을 싸매는 자리에 서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공개적으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모진 수난과 고난을 당하면서 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가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증거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셉이 오늘 우리들에게 보여준, 말씀에 대한 확실한 믿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삶, 세상 가운데 있지만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사시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면, 믿고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리까지 나아가기를 소원합니다.”
요셉은 평생을 신앙으로 살았고, 마지막 죽음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러한 신앙, 믿음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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