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모세는

히브리서 11장 믿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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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모세는
히 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는 영웅적인 삶을 살았던 자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살았을 때, 3세 이하 사내 아이들을 다 죽이라는 바로의 명령을 피해 극적으로 살았던 자입니다. 뿐만 아니라, 광야에서 가시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우리는 모세의 이야기를 많은 영상을 통해서 이미 접해보았습니다. 애니메이션으로도 유명한 [이집트 왕자]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모세의 삶을 이야기하면,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 장면들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신명기 34장 7절에 보면, 모세의 말년을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그는 늙어서도 기력이 쇠하지 않을 정도로 건강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모세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함이 이러하니라”
모세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또 모세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신명기 34장 5절에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출애굽기 33장 11절에서는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은 다정한 친구와 대화하듯이 모세와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종, 기력이 쇠하지 않았던 인물, 하나님의 친구 모세! 모세는 다양한 별명과 애칭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의 생애를 통해서 우리가 발견하고, 가져야할 믿음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세 가지로 모세의 사람을 말합니다.
첫째는, 거절하고... 24절입니다.
둘째는 더 좋아하고... 25절입니다.
셋째는 여겼으니... 26절입니다.
첫 번째 거절하고.... 모세의 삶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믿음은 마땅히 거절할 것을 거절한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믿음을 “거절하다” 라고 소개합니다. “거절하다” 헬라어로 “아르네오마이” 라는 단어인데, “거부하다, 거절하다, 인연을 끊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는 무엇을 거절하였습니까? 24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받기를 거절하였습니다. 모세는 이집트의 왕자로 40년을 살았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호화로운 삶이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7:22에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는 말씀 외에 40년 동안 모세가 애굽 왕궁에서 무엇을 했는지 기록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모세의 기록을 세상을 거절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애굽의 왕자로 불리움을 거절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세는 명예를 거절한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명예 그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명예심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요셉과 다니엘은 한 나라의 지도자이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하는 명예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영향을 미친다면, 오히려 방해가 된다면, 거절해야 합니다. 모세의 거절은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그는 모국을 위한 목적과 나은 가치를 위해서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칭함 받기를 거절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과 나 사이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우선순위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방해가 된다면 그것은 명백히 거절해야 합니다. 무엇을 사랑하든 하나님과 나 사이에 꺼리낌이 된다면, 성경은 그것을 우상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4장 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부모를 미워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은 부모님 사랑과 자녀 사랑에 중요성을 말씀합니다. 또한 성경처럼 사랑을 강조하는 책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이것이 금이 가게 한다면, 그것이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아닌 것은 아닌 것입니다.
지금 모세는 애굽의 학문과 애굽의 삶을 포기하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믿음입니다. 만일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으면서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더라면 그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물론 잠시 잠깐 부귀와 영화와 권세는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애굽의 왕 바로가 되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모세는 믿음으로 바른 선택을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기를 택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복지,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생 복락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버릴 것은 무엇입니까?
두 번째로, 믿음은 선택할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본문 25절에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라고 말씀합니다. “더 좋아하고“ 헬라어로 ”에네오마이“ 로 ”택하다. 결단을 내리다. 제거하다. 잘라내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뜨거운 마음으로 자율적으로 선택하였습니다. 모세는 무엇을 선택하였습니까? 하나님과 백성들을 위한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리고 26절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25절에서는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을 받았다고 하였는데, 26절에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도 받았다고 히브리 기자는 말합니다.
모세의 시대에 그리스도가 있었습니까? 모세는 역사적으로 그리스도를 아지 못합니다. 그보다 휠씬 뒤에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살았더니, 성경은 그 삶이 바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삶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알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대망하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모세가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으며 또 그를 위해 살아갈 수 있는 자리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살기로 작정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거절한다는 소극적 차원이고, 선택한다는 것은 적극적인 차원입니다. 거절은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나은 선택에 의미가 있습니다. 선택하기 위해 거절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 좋은 것을 선택하려면 좋지 못한 것을 거절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이야기를 알고 계십니까? (탕자 이야기) 탕자는 돼지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한 아버지를 선택하지 못합니다. 탕자는 돼지의 쥐엄열매를 따먹으면서 이것이 낭만이라고 생각하는 한 아버지 집에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추하고, 무너진 삶인가를 생각한다면 아버지의 곁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 없이 즐기는 삶은 쥐엄 열매를 먹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에는 낭만있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 깨닫게 됩니다. 예수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무슨 재미로 인생을 사느냐고?” 자신들의 삶이 더 재미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즐기던 삶 가운데 허무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서 있는 자리가 돼지 우리임을 깨닫게 됩니다. 삶에 허무와 비참을 느낍니다. 그 순간 아버지 집에 향수를 느낍니다. 이때부터 인생은 진정한 선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25절에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사람들이 왜 죄를 짓습니까? 죄를 짓는 사람에게는 죄는 신나는 일입니다. 만일 죄가 추하게 느껴진다는 아무도 안 지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쾌락이 있고, 아름답고, 낭만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죄 앞에 오는 단서가 있습니다. 그것은 “잠시” 라는 것입니다. 잠시라는 단어가 헬라어 “프로스게로스” 인데, 그 어근을 살펴보면, “기회를 얻지 못한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도 잠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인생의 허무가 찾아옵니다. 기회를 다시 얻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의 열매를 씹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죄의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잠시 죄악의 낙” 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세는 지금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삶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살아가는 여러분, 이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예수를 믿는다고 만사형통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이 올 수도 있고, 건강의 아픔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당연히 선택할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삶! 그 삶이 고난의 길이라 할지라도 그 길을 가기로 한 것입니다. 우리도 이같은 선택을 하기를 소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 상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그리므로, 세 번째는 믿음은 분명한 가치관에 의하여 확신을 갖게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가는 삶을 세상의 가장 큰 재산으로 여겼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믿은 후에 잃은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애굽의 공주의 아들로 장차 누리게 될 특권이 많은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재물을 마음대로 누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2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여기서 “여겼다“ 라는 말은 ”헤게노마이“ 단어로 ”다스리다. 이끌다. 다스리다. 가치가 있다고 여기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가치 있는 일이었다는 말이고, 고난받는 삶은 애굽에서 왕자로 사는 것보다 더 가치있는 삶으로 여겼다는 말입니다.
모세에게는 분명한 삶의 전환이 있었습니다. 그는 분명한 가치 있는 삶을 선택하고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했지만, 여전히 나의 삶 가운데 나의 가치관이 달라지지 않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완전히 달라진 삶을 살고 있습니까? 세상에 있지만, 하나님의 법칙을 따르며 살고 있습니까? 모세는 달라졌습니다. 이제 그는 확실한 목표를 향해 나아갑니다. 분명한 목표가 생기니,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살아가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재물도 쾌락도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모세의 이 위대한 결단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7장 23절에서 스데반 집사의 고백에서 그는 모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모세는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 그의 민족을 해방시기를 원하심을 알았습니다. 이 믿음 때문에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모두를 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우리의 삶의 우선순위는 어디에 있습니까?
더 나아가 모세는 “상주심을 바라보았습니다”. 2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상 받기 위해 예수를 믿습니까? 나는 이런 유치한 이기적인 신앙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상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어린시절로 돌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순수했던 그 어린 시절, 상 받는다는 사실 앞에서 얼마나 기뻐했고, 가슴 두근거렸습니까? 아버지가 주시는 상 때문에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습니까? 그 삶은 우리를 순수한 감동과 아름다움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 준다고 해도 감동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 상을 기다렸습니다. 빌립보서 3장 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바울은 아직도 “나는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예배하신 그 영광스러운 상급을 위해 달려갑니다”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고백이 우리 가운데도 있기를 소원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장 6절에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상급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이 누리는 복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이러한 복을 경험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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