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칼리지-갈라디아서 2강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17 viewsNotes
Transcript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갈 1:1-5)
1. 사도 바울의 사도권
유대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해서 바울이 전한 복음을 공격하기 시작.
오직 믿음, 은혜로만 구원받는다고 가르치지 않고 믿음 이상의 것, 곧 할례와 율법을 추가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
거짓 선생들은 예전의 방식대로 다시 종교적 규율에 사람들을 가두기 시작한 것.
바울이 전한 복음만 공격한 것이 아니라 그의 권위에도 심각한 손상을 주고자 사도권을 놓고 맹렬히 공격.
사실 바울은 열두 사도와 좀 다르다.
생전에 예수님이 뽑으신 사도가 아닐 뿐더러 그분과 함께 지낸 제자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짓선생들은 ‘바울은 열두 사도 가운데 하나도 아니고, 어느 누구에게도 권위를 부여받은 바가 없는 자칭 사도라 주장하는 사기꾼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들을 어지럽히는 거짓 선생들 때문에 자신의 사도적 권위와 자신이 전한 은혜의 복음이 부정되는 위험에 직면한 상황에서 이 편지를 썼다.
자신의 권위를 걱정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사도직 권위가 있어야 복음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편지의 시작인 1절부터 자신이 명백한 사도임을 소개하는 것이다. 얼마나 급했으면 ….
갈라디아서 1:1 (NKRV)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1절에서 바울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언급하여 예수의 부활과 자신의 사도 직분을 직접 연결시킨다.
자신의 사도 직분은 근원(from)이 사람들(men)에게 있지 않으며, 또한 어떤 사람(man)의 중개(by)를 통해서 된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왔다고 변호한다.
바울은 자신이 비록 구주가 세상에 계실 때 직접 가르침을 받지 못했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고, 그분이 자신을 사도로 세우셨기에 자신은 사도가 맞다고 변호한다.
사도행전 말씀을 봅시다.
사도행전 9:4 (NKRV)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부활하신 예수님이 직접 사울에게 나타나신 것이다. 그 자리에서 회심과 중생의 경험을 시키심.
그런데 이 다메섹 사건은 바울이 회심하는 사건일 뿐 아니라, 사도의 직분을 받는 사건이기도 하다. 동시에 사도의 직분으로 전하게 될 복음을 전수받는 사건이기도 하다. 바로 삼중적 사건인 것.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는 사건이자, 사도로 임명받는 사건이며, 복음을 전수받은 사건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직접 나타나서 사도 직분을 주셨으므로 자신의 사도직이 신적 기원을 가진 것이며, 자신은 예수님의 파송을 받은 열두 사도와 똑같은 사도임을 주장.
바울의 사도 직분은 결코 인간적인 것이 아니며 근본적으로 신성한 것이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사도 직분 수여자요, 임명자이심을 주장하고 있다.
왜 이렇게 바울이나 거짓 선생들이 사도직에 열을 올릴까? 여기서 ‘사도’라는 직분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도는 특수한 기능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세우신 특별한 직분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첫째, 사도는 예수께서 수많은 제자 중에 열두 명을 택하셔서 세운 직분이며 주의 이름으로 가르치도록 부여한 직분이다.
둘째, 사도는 예수님을 몸으로 경험했다는 면에서 아주 특별한 직분.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자들이다.
셋째, 사도는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겪은 일들을 자신들이 직접 기록하거나 기록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들로서 특별한 직분이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직접 만난 내용을 기록하거나 기록하도록 도울 수 없다. 그러므로 사도 직분은 신약 성경이 완성된 후에는 더 이상 계승될 필요도 없고 계승되지도 않는다.
더불어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의미를 가진다.
히브리 전통에 따르면 보냄을 받은 자는 그를 보낸 자와 동일하다. 그러므로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 그분으로부터 직접 보내심을 받아 특별한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사도의 직분을 감당한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가지고 복음을 전한 것이며, 그리스도의 권위에 기초하여 은혜의 복음을 변호하고자 한 것이다.
2. 은혜와 평강
갈라디아서는 오늘날 후대에게 ‘바른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고 있다. ‘바른 복음’이란 무엇일까?
바울이 말하는 바른 복음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은혜와 평강”이라고 할 수 있다.
갈라디아서 1:3 (NKRV)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바른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것이다.
복음이 하는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그분의 은혜를 우리가 누리게 하고, 그분의 은혜 속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이다.
바울은 복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결정적으로 좌우하기 때문에 이 복음을 바르게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은혜는 매우 중요하다. 은혜는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거저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넘치는 호의이다. 그래서 이 은혜를 ‘선물’이라고도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은혜가 아니라 자격과 조건이라는 틀 속에서 움직인다.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 자라면서 평생을 걸쳐 습득하게 되는 삶의 방식 중에 자격과 조건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이다.
사람들은 좋은 자격과 조건을 얻기 위해 죽자고 공부하고 일한다. 좋은 자격과 조건을 구비해서 사람들에게 인정 받으려고 한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 이미 하나님께 인정받았는데, 자꾸만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 인정 받으려고 한다.
자격과 조건을 구비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돈과 지위를 확보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여기에 인생 대부분을 허비한다.
외모도 굉장히 중요한 자격과 조건이 되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대로 받았다. 이 모습 그대로 하나님은 사랑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인정 받기 위해 끝없이 수고한다.
자유하지 않다.
자신을 가치 있고, 존경받고, 인정받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 삶의 긴장을 풀지 않고 속박되어 살아간다.
그러나 복음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다르다는 것을 알려 준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
우리의 자격과 조건에 근거해서 주시지 않는다.
우리가 예쁘고 훌륭해서 주시지 않는다.
하나님 자신이 선하시기 때문에 자격 없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 이것이 은혜다.
하나님은 우리가 뭐가 이쁘다고 예수님을 보내셔서 죽게 하시고 구원하신 것인가?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이 이것이다.
우리에겐 아무 자격이 없고, 자격 없는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릴 살게 한다.
(대학생 시절, 자격과 조건이 충족되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길 주저했던 모습들… 갈라디아서를 통해 자유를 얻었다.)
정죄와 좌절, 억눌림은 하나님이 나를 은혜 안에서 대하신다는 것을 느끼고 깨달을 때 덜어낼 수 있다.
나를 평가하고 점수 매기는 세상 속에서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 때문에 우리가 귀하게 여김받는 사실을 느낄 때, 비로소 무거운 짐을 벗고 평강을 누릴 수 있다.
이것이 은혜다. 그걸 아는 우리는 또 다른 누군가를 조건 없이 사랑하고 지지하고 아껴주고 베풀 수 있다.
그게 성도다.
성도는 그저 불쌍한 사람을 동정하는 사람이 아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상대적인 만족감을 느껴서 여유있게 뭔가를 나눠 주는 사람도 아니다. 나 같은 자격 없는 사람을 선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내 이웃에게 하나님의 마음으로 대하는 사람이 성도다.
은혜의 열매, 평강
이 귀한 은혜가 우리 삶에 영향을 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가 은혜를 깨닫게 되면, 우리 삶에 은혜의 열매인 평강이 생긴다.
평강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 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겨난 온전한 관계 혹은 삶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즉, 예수 안에 있는 은혜 때문에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누리는 축복이 평강이다.
평강은 하나님과 화해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누리게 되는 마음과 영혼의 안식이다.
우리 사이가 안 좋았던 가족과 지인과 관계가 회복되고 바르고 안정되면, 마음이 편안해지지 않는가? 자녀들도 부모의 관계가 바르면, 마음이 편안하고 건강하게 잘 자란다.
은혜가 있어야 평강이 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가 오고, 그래야 평강이 온다.
또한 평강은 그리스도의 피로 얻게 되며 오직 복음만이 가져다줄 수 있다. 돈이 많으면 편안하기는 하다. 하지만 진정한 평강을 가질 순 없다. (담벼락의 소주병 조각들), (노후 적금 잘 들어도 자식들이 찾아오지 않으면 억울하다.), (돈 많았는데 돈으로도 못 막는 병에 걸리면 불안이 찾아온다)
참된 안전과 보장, 평강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결과로 온다.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의 자격이나 공로에 근거하지 않고 예수 때문에 선한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참된 안식과 평강이 무엇인지 마음으로 알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선물과 축복을 요약한 것이 은혜라면 평강은 그 선물이 성도 개인의 삶에 적용된 결과를 요약한 것이다. 요한복음 말씀을 보자.
요한복음 14:27 (NKRV)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조건과 자격이 지배하는 이 땅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무조건적인 은혜를 경험하면 비로소 우리는 삶 속에 평강, 안식과 쉼과 안전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갈라디아서 1:4 (NKRV)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4절에는 기독론적이고 구원론적인 진술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근본적으로 죄에 대한 희생이었다.
이것은 구약의 속죄제물과 동일한 의미이다. 그분의 대속의 죽으심은 자발적이고 대속적이고 궁극적인 것이다. 완전한 값을 치르셨다.
그 제사를 통해 우리 죄가 용서되고 사해지며 이제 더 이상 우리 스스로 죄의 값을 치르거나 직접 형벌을 받아야 할 필요가 없다. (위로)
그러므로 모든 죄인이 오직 믿음으로, 은혜로만 구원을 얻으며, 그 구원은 더할 것이 없는 완전한 것이다. (더하려고 애쓰지 마라. 위로)
우리는 자기 의지, 자기 의를 내려놓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 의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그분의 죽으심의 목적은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지시는 것이다.
여기서 ‘건지다’는 단어는 단순히 어디로부터 무엇을 옮겨간다는 장소적 의미가 아니다. 어떤 힘의 영역으로부터 옮겨지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예수를 믿어 성도된 자들은 이 세상에서 옮겨져 다른 세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아직 이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다른 힘의 영역으로 옮겨졌다는 의미이다(요 17:15-18).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 밖으로 끌고 가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이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도록 남겨 두신다(골 1:13).
골로새서 1:13 (NKRV)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죄와 악의 지배 아래 살 수밖에 없는 이 악한 세대로부터 우리를 건져내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새로운 질서와 세대로 옮기신 것이 구원 사건이다.
구원의 새 질서가 옛 세계 속으로 들어와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새 세대의 삶을 성령의 도우심과 감동하심을 따라 살아내게 하신다.
몸은 여전히 이 땅에 있지만, 세상의 악한 질서로 살지 않고 은혜의 방법으로 이 땅을 살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변하여,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 은혜에 하나님의 영화로우신 성품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분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서 5절을 고백한다.
갈라디아서 1:5 (NKRV)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신약 성경에서 열세 개의 서신을 쓴 바울이 예수님의 사건을 언급할 때마다 늘 말하는 것이 이 구절이다.
예수님의 사건이야말로 하나님의 성품을 제일 잘 드러내 보여주는 사건이다.
죄는 아무렇게나 지나갈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아들이라도 대신 값을 지불하지 않으면 절대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사람의 내면을 해결하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우리의 내면을 바꾸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신다. 이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께 자연스레 영광과 찬송을 올려드리게 된다.
#오직 하나뿐인 복음(갈 1:6-10)
다른 복음은 없다
바울이 쓴 13개의 서신을 보면, 대부분 바울이 안부 인사로 은혜와 평강을 이야기한 다음, 편지를 받는 이들의 최근 소식에 대한 감사를 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갈라디아서는 그런 구조가 아니다.
“은혜와 평강이 있으라”고 하고서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 교회에 일어난 사태를 그만큼 급박하고 심각한 문제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갈라디아 교회를 선동하고 있었고, 이런 무리의 선동에 갈라디아 성도들이 넘어가고 있었다.
6절을 보면, 얼마나 격한 어조를 사용하고 있는지 모른다.
갈라디아서 1:6 (NKRV)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속히”라는 말은 시간상 빨리 떠났다는 뜻일뿐 아니라 경솔하고 생각 없이 떠났다는 뜻도 있다.
그 좋은 은혜를 저버리고 율법의 멍에를 지는 자리로 다시 기어들어가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며 놀라워한다.
“이상하게 여긴다”는 NIV 영어성경에서 ‘astonished’(어스터-너쉬드)라고 표현된다. 단순히 놀란 게 아니라, 실망하고, 꾸짖는 뜻이 담긴 단어다.
그저 “놀랐다, 깜짝이야”가 아니라, “너희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라는 꾸짖음의 뜻이 담겨있다.
왕복으로 방문하며 사랑했던 그 갈라디아 지역 성도들이 은혜의 자리를 떠나고 있다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힘들었겠는가?
결론적으로, 다른 복음은 없다.
유대주의자들은 마치 경쟁적인 두 복음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엄청난 죄다.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이 예수를 믿고 난 후, 사도들에게 복음을 배웠다고 거짓말한다.
열두 사도들이 나중에 사도가 된 바울에게 복음을 가르쳤는데,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원래 사도들에게 배웠던 가르침대로 가르치지 않는다고 거짓말한다.
열두 사도는 모두 유대인으로서 전부 할례를 받았다. 그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율법을 배우며 자랐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바울은 똑같이 유대의 전통 안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할례와 율법을 빼고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잘못 가르쳤다고 한다.
바울이 말하는 복음은 초보 단계에 불과하며 이것과 더불어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온전한 복음이 된다고 잘못 주장.
그래서 바울은 편지를 시작하자마자 갈라디아 성도들의 믿음에 대한 감사나 기도를 빼고 본론으로 시급하게 들어간 것.
복음은 하나밖에 없다. 복음은 시대를 따라 변하지도 않는다. 한결같다.
그렇다면 복음이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짜 복음. 하나뿐인 복음이다.
2. 거짓 선생들의 교훈
그들의 교훈은 왜 잘못되었을까?
첫째, 이방인도 할례를 받아서 유대인처럼 되어야 성도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하면서 자신의 독특한 문화까지 전하려고 하는데, 그래선 안 된다.
상대를 나처럼 만들고 싶어하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한다.
교회의 전통을 복음에 끼워서 팔면 안된다. 비본질적인 것을 성도에게 구원에 영향을 주는 것인마냥 강요해선 안 된다.
둘째, 거짓 선생들은 복음에 율법 준수를 더했다.
또 끼워팔기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시작하신 구원을 시내산에서 세워진 율법이 완성하도록 만들었다.
구약 성경의 인물들도 하나같이 율법 앞에서 넘어졌다. 아무도 하나님 앞에 완전해 질 수 없다. 그런데 그걸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들을 멸망에 빠트리는 것이다. 엄청난 죄다.
왜 이렇게 잘못된 복음이 교회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걸까? 이 당시뿐만 아니라 요즘 시대에도 잘못된 복음이 많다. 왜 그러는 걸까?
사람은 나면서부터 행위 구원론자이며 율법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우리 속에 다른 복음을 더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은혜의 복음은 낯선 것이다. 있는 그대로 수용 받은 적이 없으니까 어색한 것이다. 있는 그대로 날 받아준다는 것을 못 믿는 것이다.
인간이 태어날 때 두 가지 경향을 가지고 태어난다. 자기중심성과 종교성이다.
하나님이 나를 은혜로 구원하셨다는 걸 처음 들었을 때는 좋았다. 기뻤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부족함이 보이기 시작한다. 저 형편 없는 사람이랑 나랑 동일하게 취급 받는 게 불편하다.
그래서 나의 공로를 더하려고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더욱 선명하게 구별되려고 하고 더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한다.
외부에서 보면 오히려 거짓 선생들, 율법주의자들이 더 훌륭해 보인다. 세련된 종교성으로 보이는 것이다. 세련된 종교성이 우리의 죄성을 덮어주는 것 같아서 사람들이 넘어진다.
우리의 죄성은 끊임없이 은혜의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찾으려고 한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분명히 말한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갈라디아서 1:7 (NKRV)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1:9 (NKRV)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왜 이렇게 단호하게 말하는가?
이것이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그저 막연하게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종교가 아니다.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다고 하는 종교다원주의를 거부해야 한다. 복음은 한 길이다. 다른 복음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 수 없다.
그러니 사도 바울은 그들을 구하기 위해 따끔하게 말하는 것이다.
바울이 10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갈라디아서 1:10 (NKRV)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성도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아프게 말해야 할 수도 있다. 하나님 편에 서서 사람을 잠시 기쁘게 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나는 목사로서, 성도들에게 따끔하게 얘기해야 할 때가 있는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 성도와 관계가 틀어질까봐… 그런데 그 성도의 영혼이 어긋난 길로 가는 것보다 잠시 관계가 틀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게 낫다. 그 영혼만 구할 수 있다면,,, 진정한 사랑으로 말하는 것을 성도도 알아줄 것이다.
“내가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하면서 자기 감정과 원하는 걸 표출해선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자신의 감정을 실어서 말해선 안된다. 오직 사랑으로만 얘기해야 한다.
한국 교회는 복음을 분명하게 말하고 믿어야 할 중요한 순간에 사람의 눈치를 너무 많이 보기 때문에 맛을 너무 많이 잃었다.
사도 바울을 보라. 하나밖에 없는 주님의 진리와 생명의 길을 깨뜨리는 다른 복음으로 속히 떠나려는 자들에게, 하나님 편에 서서 진리를 고수해야 할 때라고 다급히 외치지 않는가. 우리도 그렇게 바른 복음으로 다른 영혼을 지켜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받은 복음(갈 1:11-24)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복음의 내용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예수는 누구신가?”
둘째, “예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가?”
셋째, “예수 자신과 하신 일을 근거로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2천 년 전에 예수께서 하신 일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갈 1:13-14 를 보면, 바울은 예수님을 기다렸지만, 예수님과 전혀 상관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율법에 정통했던 바울이 보기에 예수님은 메시아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가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 자신과 예수님이 어떤 관계가 있으신지. 바로 알게 되니 삶이 변화되었다.
예수님은 은혜로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신다. 교회를 오래 다녀도 예수님을 모를 수 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나타내주셔야 알 수 있다.
예수님을 더 알기 원한다고 기도하며 예수님을 더 알아가길 축복한다.
2. 하나님의 예정
사도 바울이 다메섹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나 그의 눈이 열리기 시작한다.
갈라디아서 1:15 (NKRV)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다메섹 가는 길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사실은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정해진 일이라고 한다. 이 내용이 우리가 잘 아는 “예정론”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예정론에 부딪혀서 넘어지곤 한다.
예정론에 따르면, 하나님이 미리 프로그램으로 모든 것을 계획해 두셨기에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나님이 원하는대로 움직이는 로봇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정론은 우리의 인격이나 자유를 무시하는 교리가 아니다.
예정론은 그렇지 않다.
바울이 고백하는 예정론은, 하나님을 추구하지도 않고 찾지도 않았으며 예수가 구주일 것이라고 상상도 못한 나에게 어느 순간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예수의 복음을 적용시켜 주셨다는 것이다.
바울이 그때 그런 일이 어떻게 자신에게 일어났는지 돌아보니, 자격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복을 주신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주님을 만난 그 순간에 주님이 딱 찾아오신 것 같지만, 주님은 만세 전부터 오랫동안 우리를 사랑으로 기다리셨던 것이다. 이것이 예정론이다.
흔히 알았던 것처럼, 이 사람이 구원받도록 예정된 사람인지를 판단하기 위한 기준으로 나온 교리가 아니다.
관점과 자세를 달리해야 한다. 삐딱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측면으로 봐야 한다.
하나님은 만세 전부터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사랑과 계획을 사람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이 사람을 예정하시고 택하실 때, 그 사람의 자격과 공로를 보지 않으신다. 로마서 말씀을 보자.
로마서 9:11 (NKRV)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선택하신 것이다. 우리 안에는 손톱만큼의 근거도 없다. 그걸 알게 되면 겸손해진다.
감격과 겸손이 함께 만나도록 하는 진리가 예정론이다.
이걸 깨달으면, 평소에 나에게 집중하고, 다른 사람의 나쁜 점만을 말하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나같은 것을 계획하시고 사랑하셨다는 것을 아는 겸손의 자리, 자기 부정의 자리로 옮겨 서서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남을 나보다 더 낫다고 여길 줄 알게 된다.
#생각해볼 질문
나는 예수님께서 은혜를 값없이 주셨다는 것을 믿고 자유를 누리며 신앙생활하고 있나요? 신앙생활하며 자유와 평강을 누리지 못하고 조건과 자격을 얻기 위해 애쓰지는 않았나요?
예수님은 내게 조건과 자격을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고, 은혜와 평강 안에서 신앙생활 할 수 있기를 구하며 기도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