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라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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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라합은
히 11장 31절
히브리서 11장 열 번째 시간입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요셉, 모세 그리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라합입니다.
오늘 본문은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했던 믿음의 사람과는 다른 이미지를 가진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이 사람은 이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과는 상관없는 사람이고, 이방인이면서 여자입니다. 더군다가 기생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기생으로 되어있지만, 헬라어 성경 70인 역에서는 매춘부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믿음의 장에 들어가 있는 것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누릴 수 있는 모든 특권에서 철저하게 제외되었던 한 여자가 믿음으로서 하나님의 딸이 되어 운명을 극복하였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1장 1-6절에 보면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이 혈통은 다윗에게 연결되고 마침내 그리스도에게까지 연결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라합입니다. 성경은 라합이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라합의 믿음은 무엇일까요? 오늘 이 밤에 라합의 믿음을 통해 신앙의 결단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역사적 배경은 여호수아 2장입니다. 여호수아 2장에서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에 정탐꾼 두 사람을 보냅니다. 이 정탐꾼이 여리고성에 들어가는데, 하필 기생 라합에 집에 들어갑니다. 성경에는 ‘기생’ 으로 되어 있지만, 정확히는 자기 몸을 팔아 생계를 잇는 여자입니다. 왜? 두 정탐꾼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마자 많은 집들로 있는데, 하필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가족을 책임지던 이 여인의 집으로 들어간 것일까?
이렇게 우리에게 구원이 임한 것입니다. 슬픈 인생을 살아가던 기생 라합은 이제 정탐꾼을 맞이함으로써 운명이 바뀌게 됩니다.
무엇이 그녀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까?
“또 그들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수 2:8-9
이방 여인 기생라합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온 것입니까?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 내가 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민수기 13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불순종의 결과로 40년을 방황하고 드디어 여리고에 도착하였습니다. 광야의 삶은 불순종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40년을 방황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믿지 못했던, 하나님을 가나안 땅에 살던, 그것도 이방 여인이 이 사실을 확신하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고백이 어떻게 가능하게 된 것일까요?
1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라합은 들었던 것입니다. 라합은 소문을 통해서 저 애굽 땅에 400년을 노예로 살던 사람들이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걸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신 사건을 들었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지키셨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일을 행하신 이가 그들의 하나님이라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자기들은 믿지 못해서 40년을 방황해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왔는데, 이제 실제로 가나안 땅에서 사는 기생 라합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홍해를 건널 때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듣고, 또 너희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간덩이가 녹아내렸다”
그 때 두 정탐꾼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냥 믿고 들어오면 되는 걸, 믿지 못해서 40년을 허비했구나” 그들의 불신앙이 40년의 세월을 허비하게 만든 것입니다.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요? 이 기생 라합은 그저 소문만 듣고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믿음입니까?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사람이 기생 라합 한 사람뿐일까요? 나머지 가나안 사람들을 듣지 않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다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간담이 녹아내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머지 사람들은 가나안 왕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만 집중하였습니다. 오직 한 여인만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이 말씀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어떤 이에게 이 말씀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이고, 삶의 제일 우선 순위이고, 살아가는 힘이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생라합은 구원의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간절히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이러한 갈망이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기대하고 사모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는 자들에게,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에게, 그 구원의 때를 위해 준비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동일하게 흘러갑니다. 누구에게나 동일한 말씀이 전해 집니다. 하지만, 그 시간을 준비하는 자들에게, 그 말씀을 믿고 그 때를 위해 기도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라합은 하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믿어서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까지는 너무나 잘 해요.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결단이 없습니다. 라합은 자기가 하나님의 은혜를 목말라 기다렸고, 자기가 고백한 대로 자신의 전 존재를 걸줄 아는 신앙의 용단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안다” 의 고백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하신 하나님, 홍해를 가르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시고, 바위에서 샘이 솟아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 2장 11절에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니라”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러한 믿음의 고백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은 복된 것입니다. 라합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고, 하나님의 역사를 알았기에, “나는 압니다”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신학자 윌리암 바클레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승리할 확률이 백만분의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상황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싸울만한 무기도 없었고, 사막을 건너온 유목민들이어서 철기가 있던 가나안을 상대로 싸운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상황이었습니다. 보이는 상황을 보면 결코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라합은 보이는 현상보다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라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은 바라보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 분석에 치중했다면 낙담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눈에 보이는 여러고 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불가능 하지만, 하나님이 하시기를 원하시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사실을 “나는 압니다”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더 나아가 라합에게는 믿음의 행동이 있었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승리를 믿고 정탐꾼을 자신의 집으로 숨깁니다. 이 사실을 들키기만 하면 그녀의 삶은 끝이 납니다. 이스라엘 병사들을 영접하는 것은 라합의 목숨을 거는 행위 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나안의 왕은 이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고, 예의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라합을 소환합니다. 이 때 라합은 거짓말을 합니다. 여호수아 2장 4절입니다. “그 여인이 그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이르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이것은 목숨을 건 모험입니다. 신앙의 결단입니다. 라합은 자기가 믿고 고백한대로 자신의 전 존재를 걸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신앙의 결단이 있습니까?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의 행함을 강조하는 책이 있습니다. 야고보서입니다. 이 책에서 진정한 행함이 있던 사람의 예로 두 사람을 이야기하는데, 한 사람은 아브라함이고 한 사람은 라합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함께 믿음을 행함으로 옮겼던 사람의 대표적인 인물로 성경은 라합을 뽑습니다. 이렇게 라합을 설명합니다.
야고보서 2장 25절 “또 이와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야고보서는 라합을 행함의 사람이라고 말하고, 히브리 기자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어느것이 맞을까요? 믿음입니까? 행함입니까? 우리가 성경을 피상적으로 읽을 때, 믿음과 행함이 서로 모순되는 것같이 느껴집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본문에서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는 것, 그 자체는 행함입니다. 목숨을 건 행동입니다. 그러면 이 엄청난 행동이 무엇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습니까?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라합은 정탐꾼을 영접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과 행함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고, 참된 행동을 가져옵니다. 순서에 있어서는 언제나 믿음이 먼저 강조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행함이 따릅니다. 기생 라합은 우리에게 이런 신앙의 본이 된 행함의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의 결과입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행함이 따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믿음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라함의 믿음의 행동을 통해 두 가지 결과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라합의 고백은 신앙의 위대한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2장 11절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믿음은 언제나 고백을 낳습니다. 라합의 고백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0장 10절에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라고 말합니다. 마음이 신앙이 머무는 장소라면 입술은 신앙이 고백되는 장소입니다. 마음이 없는데 입술로만 고백하고 있다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마음에 있는데 입술로 고백하지 않으면 그것은 비겁한 침묵입니다. 자기가 가진 신앙을 시인하고 고백하지 않으면 그 신앙은 위축 됩니다.
기생 라합은 그녀가 믿었을 때에 가지의 입술을 닫아 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고백합니다.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수 2:11
더 나아가서 라합의 믿음은 그녀가 사랑했던 모든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본문은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지금 그녀만 구원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녀가 사랑했던 모든 사람을 구원에 동참하게 만든 결과을 얻었습니다.
여호수아 2장 12,13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
라합은 하나님의 구원과 멸망에 대해 깨닫자 마자 멸망해 가는 여리고성의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라합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 관심은 어떻게 보상되었습니까?
드디어 여리고 성이 무너집니다. 여호수아 6장 22,23절입니다. “여호수아가 그 땅을 정탐한 두 사람에게 이르되 그 기생의 집에 들어가서 너희가 그 여인에게 맹세한 대로 그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라 하매 정탐한 젊은이들이 들어가서 라합과 그의 부모와 그의 형제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고 또 그의 친족도 다 이끌어 내어 그들을 이스라엘의 진영 밖에 두고”
라합이 혼자 하나님을 신뢰하기로 결정하였을 당시 그 가족들은 얼마나 라합을 비웃었을까요?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라합의 신앙을 조롱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리고가 하나님의 심판의 칼날이 떨어지던 그날 라합의 가족과 이웃들은 라합의 결단에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라합은 가족들을 구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사람의 믿음의 중요성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믿음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라합은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은 이 여인의 인생의 결말을 이렇게 인도하십니다. 마태복음 1장 1-6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누구의 족보에 라합의 이름이 올라가 있습니까? 다윗 왕의 시조가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이방 여인 기생 출신 라합이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입니다. 이 여인에게 임했던 이 엄청난 구원의 역사가 오늘 우리에게 임하길 원합니다. 우리는 기생 라합 정도가 아니라 영적으로 진노 받아 죽을 자들이었습니다. 그 어디에도 희망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의 복음이 전해졌고, 구원의 복음이 임했고,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습니다.
마치 우연인 것 같아 보이지만, 하나님은 정확하게 구원을 예비해 두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기다리고 있는 여인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들은 그들에게는 자기의 전 존재를 거는 삶의 결단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믿음의 결단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 생애를 거는 순종과 결단이 있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