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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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눈물
누가복음 19장 41-48절
지난날 한국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100여 년 전에 이 땅에 복음이 들어와서 이렇게 성장한 경우는 세계 선교 역사, 어디에도 있지 않습니다. 때로는 우리 스스로도 놀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무엇이 그런 복을 가져다 주었습니까? 여러 가지 요인을 들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영적이고 정신적으로 잘 무장된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에 기초해서 세워진 교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민족이 지녔던 아픔과 슬픔에 역사 현장 한 가운데 교회가 있었습니다.
지난날 우리는 새벽기도회와 십일조, 주일성수에 엄격했으며, 이웃을 위한 봉사와 섬김을, 또한 나라와 민족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공의를 세우는 일을 기쁨으로 실천했습니다. 무엇보다 한국교회는 신앙의 순전함을 지키고 나라를 사랑했던 순교자의 피에 기초한 교회였습니다. 그리하여 일본제국의 억압을 이겨낼 수 있었고, 6.25전쟁의 속에서 공산당의 박해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군사독재의 사슬을 풀어내고 민주화의 길을 가게 했던 자리에 한국교회가 큰 몫을 행했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역할은 일상적인 삶에도 여러 가지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술 취함과 도박, 그리고 나태한 습성들을 끊어내기 시작하였고, 근면함과 성실함을 강조함으로 생산적인 경제를 만드는 데 이바지했습니다. 그래서 가난했던 이 백성은 한강의 기적, 곧 경제적인 풍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의 사람들이 각 분야에 진출하며 자기 역할을 감당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의 현실을 더 깊게 살펴보면, 더 이상 낙관적으로 현재와 미래를 바라볼 수 없습니다. 여러 부정적인 일들과 연일 보도되는 사건들은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고, 신문과 TV를 통해 등장하는 목회자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때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어쩌면 가장 변화되지 않을 뿐 아니라, 변화되기 어려운 집단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 공동체다.” 라고 탄식의 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도 그러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정치는 로마제국의 속국으로 헤롯의 잔인한 통치가 이어졌고, 경제는 정의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양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온 세상은 하나님의 배반과 배신으로 충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회는 주인과 종이라는 이중적인 구조화로 갈등과 위기가 팽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종교를 가진 자들은 약한 자들을 억압하기 위해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유대 공동체는 형식화된 종교, 물질주의적인 종교, 이기적인 종교로 몰락하고 있었고,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대의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자들아,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라고 강력히 외치셨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강력한 소식에 반응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선포는 그들에게는 도전이고, 매우 불편한 소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언은 곧, 당대의 정치 비판, 사회 비판, 경제 비판이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엄정한 비판을 받은 것은 당대의 정치, 경제인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의 영적 지도자로 알려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돈을 좋아했고, 외형적인 직분에 연연하며 자기 자랑과 교만이 가득한 기득권층으로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의 자기 갱신을 추구하지 않는, 화석과 같이 굳어진 종교성을 가지고 스스로를 몰락의 길로 내몰았습니다. 이런 세상 한 가운데 우리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 지도자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를 죽일까?’ 온갖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박해와 멸시 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마지막 사역을 위해 한걸음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사역인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예루살렘 성전에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볼품없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날은 주일이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이기 시작했다”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그곳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고, 행한 일들을 체험했던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오병이어를 체험한 사람도 그 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귀신들렸다가 회복한 여인도 있었을 것이고, 문둥병 고침을 받았던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이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여서 예수님이 들어오시는 것을 보고 환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환영과는 달리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마음과 같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21장 10절을 보면,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 큰 소동이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 예수님이 입성하시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들어오시고, 환영하는 인파는 찬송과 환영소리로 온 성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들은 오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마 21:9)이라고 외쳤습니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 아닙니까?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천사들의 찬송소리와 같지 않습니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그들은 평화의 왕이신 주님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지나가는 길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심지어 열렬한 추종자들은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땅바닥에 깔고 밭에서 베어 온 종려나무 가지를 깃발처럼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찬양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마 21:9)
공관복음을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예수님이 생애가 어떠했는지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환영 받으신 적이 있으셨습니까? 아닙니다. 이렇게 많은 인원이 모인 적도 없었고, 이런 광경은 성경 어디에도 없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백성들은 이렇게 엄청난 열광과 함께 예수님의 입성을 환영했던 것입니까?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열렬한 지지자로 만든 것입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유를 얻을 수 있어, 로마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어’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의 백성을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해 낼 정치적인 메시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전에는 없던 열광으로 예수님을 환영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고 드린 찬송과 영광이 아니라, 자신들을 정치적으로 해방시키고 구원시킬 모습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 이례적인 환영과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찬송을 마땅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비록 열렬히 따랐던 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구속하시기 위해 예루살렘 성을 입성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엄청난 인파들과 함께 벳바게와 베다니를 떠나 예루살렘 성 가까이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은 예수님 앞에 자신의 겉옷을 벗어 던지며 환영과 찬송을 불렸지만, 예수님은 갑자기 우시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울고 계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눈물은 자신을 환영해주는 사람들에게 흘리는 감사와 기쁨의 눈물입니까? 아니면, 슬픔은 당해서 흘리는 눈물입니까? 지난날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보면, 예수님의 눈물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환영과 눈물은 너무나 대조되기 때문에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궁금증을 가지게 합니다. 오늘 본문을 대하는 우리 역시 궁금해집니다. 왜? 예수님은 울고 계셨던 것일까요?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하시는 종려주일은 우리들에게 무슨 의미를 주며, 예수님이 흘리신 눈물은 무엇일까요? 본문을 통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먼저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눈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41절을 보면,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시며’ 라는 단어는 헬라어 ‘클라이오’ 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클라이오’는 신구약 성경에서 140회 정도 나오는데, “심한 슬픔으로 우는 것, 죽은 자를 애도하여 우는 것,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울부 짖는 것” 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양심적 가책이나 슬픔을 당했을 때 흘리는 눈물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밖으로 드러나 볼 수 있는 육체적 혹은 정신적인 고통을 겪을 때, 그 슬픔을 견디지 못해 큰 소리를 내며 우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환영 인파와 함께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다 갑자기 목 놓아 우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외쳤고, 예수님은 이 인파속에서 통곡을 하시며 울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예수님의 눈물의 통곡과 고통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끊임없이 자신의 도움을 원하며 다가오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던 분이셨습니다. 작은 자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진리로 가르치시기에 수많은 이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생애를 비쳐보면, 열렬한 추종자들의 찬송과 환영을 받으시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이것은 울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감격해야 할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통곡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통곡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를 떠 올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삶을 사셨습니까? 예수님의 생애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주님은 33년 동안 강철 같은 생애를 사셨습니다. 특별히 그가 얼마나 강한 생애를 사셨는가 하는 것은 그 분의 눈물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우신 장면은 세 번 나옵니다. 첫 번째는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주님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요 11:35).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간다는 전갈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두 번째는 히브리서 5장 7절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아버지와의 기도에서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본문 누가복음 19장에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면서 성을 보시면서 우셨습니다(눅 19:41). 예수님의 눈물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세 번의 눈물은 자신을 위한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모두 세상 사람들을 위한 것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나약한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처음 시작하실 때, 초인적인 금식과 강력한 마귀의 시험에서도 낙심하지 않으시는 분이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증거 하실 때, 사람들을 피해 이 동네, 저 동네로 쫓겨 다니실 때, 식사를 못하실 때도 있었지만, 결코 힘들어 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과 자신이 사랑하는 제자들이 모두 배반하여 떠났을 때도 주님은 물과 피는 흘리셨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강하신 분이십니다. 결코 나약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주님이 가슴이 찢어지는 비탄과 슬픔을 가지고 통곡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 우리 주님은 가슴이 찢어지는 서러움과 큰 소리로 통곡하신 것입니까? 지금의 축제의 상황과는 전혀 반대가 되는 주님의 행동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신 것입니까? 예루살렘 성전은 어느 때와 다름없이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예전에 행하던 대로 사람들은 저마다 하루의 일과를 수행하기 위하여 바쁘게 드나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성을 보시고 울기 시작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예수님은 보셨습니다. 장차 파도처럼 다가올 역사를 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이지만, 그 안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과 하나님과 관계를 기초로 주님은 그 모든 것을 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예루살렘 성전은 자신의 신념과 신앙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쳤고, 거룩한 언약의 성전을 거기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살고 있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하나님의 배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하나님의 비전과 소망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오직 외식과 형식만 남아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판이 곧 임한다는 사실을 미리 보셨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9장 43-4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나와 및 그 가운데 있는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신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누가복음 23장 28절에 보면 십자가를 지시고 올라가실 때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왔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여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라고 하셨습니다.
이 두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장차 다가올 예루살렘의 멸망을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역사를 보면 예루살렘 멸망은 주후 70년에 일어났습니다. 그 날은 예수님이 우셨던 때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후일 로마의 황제가 된 티투스 장군에게 의해 예루살렘성은 포위하고 토성까지 쌓으며 강공을 퍼부었습니다. 곧이어 성안에 갇혀있던 사람들은 보급이 끊어지기 시작하였고, 극심한 기근과 목마름으로 고통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굶어 죽어 성안에 버려졌고, 급기야는 어린아이를 잡아먹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주후 70년 6월 24일 안토니오 요새가 점령되고, 7월 6일 성전의 예배가 그쳤습니다. 8월 27일 예루살렘 성전의 상징인 대문이 불탔고, 9월 24일 성안의 도시들은 무너졌습니다. 당시 유대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유대인 전쟁사”라는 책에서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성 내부에 진입한 로마군은 분노에 차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유월절을 맞아 외국에서 방문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까지 들어와 있었기에 피해는 더 컸다.” 로마군의 점령 뒤에는 무자비한 약탈이 뒤따랐고, 그 일을 위해서는 끔찍한 살육이 자행되었습니다. 거리 이곳저곳에는 겁탈당한 부녀들의 비명소리가 아비규환을 이루었습니다. 유대인들의 피로 도랑을 이루었고, 예루살렘 성은 폐허가 되었습니다. 간신히 살아남은 자들은 검투사로 끌려갔습니다. 지금은 성의 일부만 남아 있습니다. 이날이 바로 예루살렘의 최후의 날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심판의 날을 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난 주간을 보내는 우리들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이나 지금 우리들의 상황이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잠들어 있을 때, 하나님의 교회가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을 때, 하나님의 교회에 말씀과 기도가 사라질 때,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시대를 바르게 보지 못하는 영적 상실 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말씀으로 가득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문화에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빛과 소금이 되어서 세상을 밝혀야 하는데, 세상에서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이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 보입니다. 그 때 나타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영적 무기력함 입니다.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교회가 세상을 따라가고 있는 현실을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함께 있었던 제자들과 수많은 사람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많은 이적과 기사, 가르침을 받았지만 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무지함으로 인해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을 때,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찾지 않을 때, 우리는 영적으로 둔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불편함 없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 적응력이 교회와 인간 안에 있는 죄의 무감각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때때로 우리 자신을 보면, 너무나 혐오스럽습니다. 매일 죄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다 정신 차리고 돌아와 회개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습관적이고 반복적으로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따라서 우리 모습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죄성을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역시 소망이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해야 할 백성들이 세상의 야망과 비전을 따라갈 때, 세상의 논리와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갈 때, 말씀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가치관에 묶여 있을 때,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성을 낱낱이 고백해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눈이 가리워져 볼 수 없었던 제자들과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영적 회복에 비밀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누가복음 19장 45-48절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이어 예루살렘 성전에 방문하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비둘기파는 자들을 내어 쫒으시고 돈 바꾸는 상인들의 물건들을 뒤집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이 광경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찾으셨을 때, 무슨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입니까? 아닙니다. 성전에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어제처럼, 지난 절기처럼 사람들은 성전을 찾아왔고, 지난번에 행하던 대로 이날도 되풀이 되고 있었습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커다란 죄악의 현장을 목격하신 것처럼 상과 의자를 마구 둘러엎으시고 큰 소리로 외쳤셨습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눅 19:46)
마가복음에서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 하지 아니하였으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도다.”(막 11:17) 이 말씀은 이사야 56장 7절에 인용된 말씀입니다. 이사야에 기록된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되기 시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깨닫는 역사가 일어날 때, 즉,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넘칠 때, 바로 그곳은 기도의 집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기도의 회복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가 어두워져가는 세상에서 영적으로 깨어있기 원한다면,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기 원한다면 우리 역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은 기도하고 계십니까? 우리 교회는 기도의 집입니까? 우리는 늘 기도하고 있지만, 우리가 얼마나 기도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린 교회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의 선포의 중심이 되기보다는 지푸라기와 같은 인간의 사상이나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보배들이 설교의 재료가 되었습니다. 기도가 참으로 우리의 가정과 교회에 각 기관에 중심적인 기능이 되고 있습니까?
우리가 정말 기도의 세계를 이해하고 있습니까? 기도가 무엇입니까? 과연 우리 중에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에 대해 이해하고 있습니까? 기도가 깊어지면서 깊어질수록 하나님과 대면하게 되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인도받기보다는 인간들이 만든 정교한 규칙과 계획표에 의하여 운영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순간순간 지도하시고 능력주시는 성령을 의지하기보다는 잘 짜여진 조직과 잘 만들어진 규칙들을 의지하며, 진액을 짜는 기도 대신 사람들과의 사귐이 교회의 중심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모습으로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
지난주일은 종려주일이었습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시러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제자들과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찬양으로 예수님을 영접했던 날을 기념하여 지키는 날입니다. 그러나 이 날은 기쁨의 날이 아닙니다. 이 날은 슬픔의 날이요, 눈물의 날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장차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깨어있지 않는 교회와 영적으로 무감각한 우리들을 향해 통곡과 때론 분노하심으로 우리들을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모진 고통과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의 말씀처럼,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고난주간을 맞이하는 이 한 주간,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예수님의 눈물과 분노의 가르침에 반응하며, 깊은 고민과 기도하는 한 주간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놀라운 십자가의 능력, 기도의 능력, 복음의 폭발적인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듣던 찬양이 있습니다. 가사의 내용이 저의 가슴을 울립니다. 함께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