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녹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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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장 5-6절
에녹
히브리서 11장을 우리는 흔히 “믿음의 장” 이라고 부릅니다. 믿음으로 살아간 자들의 삶을 나열해 놓았습니다. 하지만, 그 순서를 보면 반드시 역사의 순서대로 기록해 놓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이야기하기 전에 이삭과 야곱의 이름이 먼저 나오고, 여리고 성의 무너짐보다는 라합이 먼저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락보다는 기드온이, 입다보다는 삼손이, 사무엘보다는 다윗이 먼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역사적 서술의 의도보다는 중요한 것은 교훈의 중요성입니다.
지난번 살펴본 대로, 아벨은 예배를 통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교훈하였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녹은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바른 교제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사실을 통해서, 성도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참 의미가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없이는 바른 교제는 불가능 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배웁니다. 나아가 바른 관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드려지는 예배를 통해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배웁니다. 또한 이 교제가 없이는 증거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지속적이고 신실한 교제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증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에녹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5절입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은 언제든지 객관적인 근거를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이 계시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되어야 합니다.
유다서 14-15절을 보면, 에녹이 받은 계시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여기서 보는 것처럼 에녹은 예언자였습니다. 예언자의 기능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에녹은 하나님이 말씀 가운데 임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하나님은 그 시대에 임하셔서 뭇 사람을 심판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심판하셨을까요? 경건하지 않은 일과 완악한 마라고 유다서 기자는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토합니다. 따라서 언어는 곧 그 사람의 인격입니다. 에녹은 그 시대 사람들의 부패성을 일의 행위와 언어를 통해서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에녹에게 그 시대를 향한 심판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에녹은 그 말씀을 믿고 선포합니다.
오늘 본문 히브리서 11장 5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그렇다면 에녹의 믿음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성경은 에녹의 믿음을 설명하면서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다고 표현합니다. 특별히 5절에는 “옮겨졌다”라는 동사가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반복하지 않지만, 강조할 때는 예외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강조하기 위해 반복한 “옮겨졌다”가 수동태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선 수동태로 된 “옮겨졌다”의 반복은 에녹의 믿음에 대한 주도권이 에녹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증거입니다.
창세기 5장 21-23절을 보면 에녹에 대해 이렇게 소개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이 말씀에는 에녹이 등장하지만 어떻게 믿음으로 살았는지,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했는지 구체적인 내용이 없습니다. 이것만으로는 에녹의 믿음을 짐작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어떻게 믿음과 연결해서 풀 수 있을까요? 잠시 창조시대로 돌아가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지으신 후에 아담에게 동물들의 이름을 짓도록 하셨습니다. 아담이 그 일을 마무리하고 나오는 문장이 ‘돕는 베필이 없으므로’(창 3:20) 입니다. 이것은 아담이 자기 뜻대로 동물의 이름을 지은 것이 아니라 동물의 속성을 꿰뚫어 보고 지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동물을 통해 자신과 같은 존재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에 하나님이 아담을 잠들게 하고 그와 격이 같은 하와를 만드신 것입니다. 이처럼 히브리적인 사유에서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계시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에녹’이라 이름을 주신 이유는 그 안에 담긴 사명과 계시 때문입니다. 에녹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노크’ - “전파하다. 교수하다 가르치다” 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녹은 하나님의 존귀와 영광을 전하고 가르치고 교수하는 존재로 부름 받은 자입니다.
이렇게 부름을 받은 에녹의 인생을 살펴보면, 하나님과 동행하기 전과 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에녹이 이 땅에 머물렀던 시간은 365년입니다.
창세기 5장 22절에 에녹이 하나님과 300년을 동행했다고 한다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시간은 65세부터 입니다. 그러면 에녹의 삶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때는 노아홍수 이전의 시대로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갔던 시대였습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단순한 표현이 아닙니다. 노아홍수 이전의 사람의 삶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것에 관한 증언에는 관심이 없고, 세상의 논리로 재산을 쌓고 높은 위치에 올라다는 데만 집중하는 시대, 하나님이 없는 시대가 바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시대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시대를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무엇이라 합니까?? 죄라고 말 합니다. 에녹도 65세까지 그들처럼 세상의 논리를 좇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하나님의 계시가 에녹에게 임합니다. 계시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초자연적인 계시도 있지만, 일반 계시도 있습니다. 해가 뜨고 지고 달이 뜨고 지는 천체의 운행을 보면서 이 천지가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믿음으로 아는 것, 그것은 자연 계시입니다. 에녹의 경우에는 아들 므드셀라의 탄생이 그것입니다.
성서신학자 뉴베리(Newberry) 는 에녹의 아들 므두셀라의 이름과 관련해서 하나님이 에녹에게 주셨던 심판의 메시지를 새로운 의미로 통찰했습니다.
“므두셀라” 그의 이름에 놀라운 뜻이 담겨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므트“는 심판,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셀라트“는 보낸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이 합쳐 해석하면, ”죽음을 보낸다, 심판이 있을 것이다“ 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이 두 단어를 명사로 해석하면 “창을 던지는 사람”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을과 마을 사이에 전투가 벌이지게 되면, 한 마을을 정복하기 위해 제일 해야 하는 것은 마을 입구에서 마을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창 던지는 사람입니다. 다른 마을 사람들은 “창 던지는 사람만 없으면 저 마을을 우리가 깨끗이 소탕할 수 있을 텐데...”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창 던지는 사람만 없으면 그 마을은 정복을 당하거나 심판을 당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창 던지는 사람이 죽으면 세상이 끝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념에서 부여되었던 이름이 므두셀라입니다.
어느날 하나님이 에녹을 부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에녹아”
“예 하나님”
“세상이 아주 악해졌지?
“예, 그렇습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너에게 이 세상에 심판이 임박했다는 사인을 주마. 아들이 태어날 것인데 그 이름을 므두셀라라고 지어라.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올 것이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창세기 5장 2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므두셀라를 낳기 전에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말이 없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 아들을 통해서 들려온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엄숙한 진리를 깨우치자마자 그는 즉시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속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신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 될 것이다”
이 심판의 교훈이 부딪히자, 에녹은 즉시로 자신의 삶을 고치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그의 자손들을 기록합니다. 25절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28-29절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노아가 태어났을 때, 므두셀라의 나이는 몇 살이었습니까? 369세 였습니다.
창세기 7장 11-12절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노아가 600세 되던 해에 심판이 일어났고, 그 때 므두셀라의 나이는 969세 였습니다. 므두셀라가 죽은 해, 노아의 나이가 600세 되던 해에 홍수가 터졌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했습니다.
에녹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런대로 현재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에녹에게 갑자기 하나님이 아들을 줄 것과 그 아들이 죽은 후에 심판할 것을 계시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에녹과 하나님의 동행이 시작됩니다. 히브리어로 동행은 ‘할라크-에트’ 이고, ‘목적지를 향해 함께 간다’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또 다른 뜻은 ‘사귐이 있는 동반’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에녹의 인생의 주도권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에녹의 믿음은 하나님과의 동행에서 출발하고, 그 주도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우리의 신념이나 자기암시, 자기확신이 아니라 죽었던 영적세계 속으로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나와 관계를 맺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믿으십니까?
하나님이 에녹을 찾아와 계시하시고, 그가 가르치는 자, 교수하는 자,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자로 살게 하셨고, 에녹은 그것을 순종했습니다. 우리 또한 조금만 더 민감하고 영적으로 깨어있으면, 하나님의 계시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둔하여 수많은 말씀들을 지나쳐 버리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과거에 에녹이 그러했습니다. 아들을 통한 계시를 받고서야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고 그때부터 하나님과 300년을 동행합니다. 그 긴 시간 동안 에녹이 이 땅에 살았던 이유는 하나님이 에녹을 오랫동안 참고 기다리고 설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기간은 기껏해야 70-80년입니다.
에녹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짧은 기간이므로 그 기간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동행에 합한 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에녹보다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 그것 때문입니다. 아마 에녹은 우리에 비해 조금 끈질겼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자의 첫 번째 조건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안계신 것을 이성이나 논리로 믿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논리로 하나님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오로지 주님이 주신 은혜로만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아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 “그가 계신 것과 또하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여시서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그를 알게 하신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그를 알게 믿게 하신 사실을 대한 일종의 책임을 비추는 것이다.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는 그 사랑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 하나님이 동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힘에 겨워 허덕일 때마다 하나님은 힘을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 나약해 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영화 <타짜>에서 보면 조직폭력배를 등에 업은 전문 도박꾼들이 나옵니다. 도박꾼들은 손가락을 자르면 발가락으로 화투장을 잡고 도박을 합니다. 이것을 뭐라고 합니까? 중독. 정말 중독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중독성보다 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본전생각!입니다. 한 판만 이기면 지금까지 잃은 모든 것을 해결할 것 같다는 생각에 도박을 끊지 못하는 것입니다. 벼랑 끝의 도박꾼들도 본전생각 때문에 도박을 끊지 못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실까요? 못하십니다.
하나님의 본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자기 아들을 죽이고 시작한 일인데, 하나님이 중간에 우리를 포기할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미 죽었던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가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내가 이 모양인데 하나님 앞에서 복 받을 수 있을까?’ 이런 자괴감은 오히려 신앙을 망칩니다. 열 번 쓰러져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반드시 한 번 더 일으키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투자한 본전 생각 때문에 우리를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치고 곤고해서 쓰러질지라도 일어설 수 있는 힘과 소망이 우리에게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에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다리기도 하시고, 져주기도 하시고, 경고도 하시고, 상줄 것을 약속하시면서 우리를 데리고 끝내 자신의 안식까지 들어가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와 동행하고 계심을 고백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