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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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노아는
히 11:6-7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근거와 믿음의 태도, 믿음의 행동과 증거, 그리고 믿음의 궁극적인 결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시간까지 우리는 아벨을 통해서 “예배를 통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그리고 “에녹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동행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노아의 믿음에 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밤에, 우리는 노아의 믿음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보고 우리의 믿음이 굳건해지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노아는 우리가 잘 아는 인물입니다. 노아에게 있어서 믿음의 근거는 무엇이었을까요?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 11장은 그 근거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일, 즉 심판에 관한 말씀을 하나님께서 하셨을 때에 노아는 믿은 것입니다. 이 일은 앞으로 일어날 사건이었지만, 언제 일어날지 알지 못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노아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던 일을 믿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본질에 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보는 것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언제나 계시하신 말씀에 근거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믿음의 출발인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은 사색을 통한 인간의 주관적인 이성의 차원에 근거하여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고, 그 말씀을 우리가 믿음으로 신앙은 출발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0장 1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그것을 믿습니다. 따라서 믿음은 이 믿음이 얼마나 진지한가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말씀하셨을 때에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7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성경은 노아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였다고 소개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경외가 무엇입니까? 경외는 “거룩함과 두려움”입니다. 성경의 말을 빌리자면 노아는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홍수로 모든 것을 멸절하신다는 계획을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아마도 그는 하나님의 선언을 듣는 순간,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 임박한 상황 가운데서 가벼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까? 강단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교양강좌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생명과 멸망을 좌우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을 경외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사람들이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와 동행하시며, 항상 도우시고, 친근하시는 아버지의 이미지를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두려우신 분이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두렵고 떨림이란 일상적인 공포와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실된 태도를 말합니다.
노아의 문제는 심판에 대한 공포가 아니었습니다. 노아는 그 시대를 향해 선포된 엄숙한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 말씀을 신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롯의 사위들의 태도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가 들려왔습니다. 그 때 롯의 사위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창세기 19장 14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
만약 노아에게 그리고 롯에게 선포 되었던 이 메시지가 우리에게 선포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받겠습니까? 롯의 사위들과 노아의 태도는 어떻게 달랐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노아는 하나님을 경외하여 방주를 예비하기 시작했다고... 이것이 노아의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믿음을 생각할 때, 행위와 믿음의 관계를 생각합니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요? 행위입니까? 믿음입니까? 순서에 있어서는 언제나 믿음이 앞에 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행위를 낳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경외함으로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방주를 지었습니다.
언제 비가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에 대한 메시지를 듣고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방주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이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노아는 맑은 날, 좋은 하늘 아래에서 방주를 짓고 있습니다. 얼마나 불합리합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냉대를 받았을까요? 인간적으로 보면, 방주를 지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방주를 짓습니다. 이 행동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바로 믿음 때문입니다. 홍수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 하나님이 곧 심판하실 것이라는 믿음, 하나님의 심판이 있지만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구원하실 것이라는 믿음, 바로 그 믿음 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믿는 다는 것은 그 말씀이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행동을 가져옵니다. 야고보서 2장 26절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영혼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오늘 우리가 가운데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 다음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노아 이야기에 감춰진 큰 의미를 물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노아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어떤 이미지가 생각납니까? 바로 방주입니다.
방주는 히브리어로 ‘테바’이고 성경에 두 번 나옵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모세의 어머니가 모세를 살리기 위해 갈대상자에 그를 넣었는데, 이 때의 방주가 노아의 그것과 같은 어휘를 사용합니다. 노아의 방주는 그 시대 수치인 규빗을 사용하였는데, 오늘날로 환산해 보니깐, 가로길이가 135미터, 너비가 22.5미터, 높이가 13.5 미터 되는 큰 배였습니다. 이 배의 가장 큰 특징은 보통의 배라면, 키, 닻 그리고 노가 있어야 하는데, 노아의 방주에는 배가 갖추어야 할 그런 시설이 일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나무상자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흔히 영화에서 보면, 노아의 방주 하면 커다란 배의 모양을 상상해서 이미지화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배라기보다는 나무 상자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로써는 하나님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배를 만들라고 하시고서는 나무상자를 만들라고 하시다니, 이해가 되지 않지만, 노아는 그 말씀 앞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방주를 만들게 됩니다. 방주를 만드는데, 그 방법이 좀 특이합니다. 방주를 만들 때, 안과 밖에 역청을 바르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이 역청은 성경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역청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코페르’인데, ‘속전’ 즉 ‘몸 값’을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청의 속뜻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노아의 방주가 노아의 믿음만을 증명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노아의 방주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원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홍수의 심판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어디인가요? 바로 방주입니다. 따라서 방주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살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구약의 방주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역시 세상의 심판으로부터 살 수 있는 곳, 유일한 구원의 이유, 그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방주이심을 기억하기를 소원합니다. 따라서 방주는 우리가 구원받은 존재이고, 그 구원을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노아가 이렇게 나무상자에 가까운 방주를 만든 것은, 하나님의 명령 앞에 순종한 것은, 이러한 확신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방주가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방주만이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살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만이 유일한 구원의 소망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믿음으로 노아는’이란 구절입니다. 방주가 노아의 노력을 조명하는 의도가 아니었음에도 성경은 노아의 믿음을 언급했습니다. 그럼, 노아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노아는 하나님께 소속되었습니다.
성경은 노아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창세기 6장 8-9절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인은 무엇입니까? 의인은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는 에베소서 1장에 묘사되어 있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라는 말씀과 동일합니다. ‘심판을 받을 운명이지만 하나님은 노아를 택하셔서 구속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를 입었다’의 표현이다. 노아가 의인이기 때문에 은혜를 입은 자가 아니라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의인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인의 정의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의인과는 다릅니다. 의인은 ‘옳다. 그르다’의 기준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인은 “하나님께 소속되었음” 을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노아가 의롭게 되었다의 뜻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런 내세울 공로가 없는 우리를 하나님은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 믿는 사람은 그 누구도 자랑할 인생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우리가 지녀야 할 성품이 있다면 그것은 감사하는 자세뿐입니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께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 라는 부분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완전한 자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약점과 허물, 추함으로 얼룩진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신에게 돌아올 몫을 상속받아 집을 떠납니다. 유대 사회에서 아버지께 상속을 받아 떠난다는 것은 이제 아버지와의 관계는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째 아들에게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가지고 있던 재산을 다 써서 거지가 된 것입니다. 이방인에게 빌붙고, 그것도 모자라서 돼지우리에서 지내고 돼지가 먹는 쥐염열매를 먹고 살아갑니다.
그 때 이 아들이 아버지의 집을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먹을 것이 많고 하인들도 굶지는 않기에 ‘차라리 이렇게 살다 죽느니 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종으로 살자’ 결심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성경은 “아직도 서로 간에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기약없이 떠나갔던 아들이 돌아오는 모습을 알아봤다고 기록합니다. 떠나갈 때와는 달리 거지 몰골이 되었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알아봤습니다. 아버지는 맨발로 달려가서 아들의 목을 얼싸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집으로 데려와 살진 송아지를 잡아 줍니다. 이 아버지는 항상 최고를 주는 분입니다. 좋은 옷을 입히고, 아들의 발을 닦고 신발을 신겨 줍니다. 마지막으로 반지를 끼워줍니다.
“너는 다시 내 아들이고, 이 모든 것이 다시 너의 것” 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제 둘 째 아들의 지위와 권리가 회복되었습니다. 이제 탕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제 탕자는 온전해 졌습니다. 추하고 악한 존재일지라도 아버지의 품안에 있으면 온전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조건을 내밀고 우리를 뽑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죄와 사망 아래 있었던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안에 있으면 우리는 온전한 자가 됩니다. 우리가 잘나서 온전한 자가 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안아주시고, 상속자로 삼아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온전해 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소속 되었다”의 의미입니다. 이제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 소속되었습니다. 이제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붙들려 있습니다. 이것이 노아의 믿음의 기준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소속되는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두 번째는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다” 동행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할라크” 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그 뜻은 ‘그 분이 찾아와주셔서 교제를 허락하고 함께 길을 걸어간다“는 뜻이다. 따라서 노아의 인생은 노아의 믿음이 만든 것이 아니라 그의 인생을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철두철미하게 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6장 22절, 7장 5절, 7장 16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창세기 6장 22절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창세기 7장 5절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창세기 7장 16절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노아는 하나님의 동행하심에 반응하고 순종 했습니다. 방주는 누가 짓고 누가 마무리했습니까? 모두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게 된 사연은 정말 다양합니다. 누군가는 이성을 보기위해 목사가 되기도 하고, 누군가는 빚 받으러 왔다가 예배에 은혜를 받아 빚을 탕감해 주기도 합니다. 또 누군가는 친구 손에 끌려온 사람, 우울함을 견디기 위해 온 사람 등 저마다의 이유를 가지고 교회를 찾습니다.
무엇이든 어떤 모양으로 이곳에 왔든지, 하나님께서 부르지 않으면 우리는 이 곳에 올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이미 우리 인생에 간섭하셔서 우리를 찾고 부르고 끌어당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은총 중에 은총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부르심이 없이는 아버지 앞으로 올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연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노아의 믿음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하나님께 붙들려 있는 것, 우리 모두가 이러한 자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셋째는 노아의 믿음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히브리서 11장 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여기서 경고하심을 받아 라는 한글 성경의 번역이 딱딱하고 어색합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크레마티조” 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셨다” 라는 뜻입니다. 노아가 특별히 영리해서 방주를 예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방주 짓는 일을 시키셔서 그가 준행했다는 해석이 더 정확합니다. 이 뜻은 하나님이 먼저 찾아 오셔서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노아는 그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방주를 준비했을 뿐, 동물을 방주에 들여보내고, 방주의 문을 닫는 그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아기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기가 스스로 첫걸음을 떼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그때까지 누구의 수고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까? 엄마, 아빠 혹은 그 외의 사람들의 수고와 돌봄이 있어야 합니다. 보채는 아기를 안고 밤잠을 이루지 못하며 잠 들 때까지 토닥여 주어야 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기저귀를 갈아주어야 하고, 사소함 위험에 대비해서 아기 곁을 지켜야 합니다. 아기를 데리고 나들이하는 날은 이사짐을 싸야 합니다. 그것을 끝나는 것이 아니라, 먹어야 합니다. 이제 겨우 걸음마를 시작하면 손을 잡고 하나 둘 하나 둘 하면서 보조도 맞춰 주어야 합니다. 아기를 세워놓고 엄마 혼자 걸어가지 않습니다. 함께 뒤뚱거리면서 걸음마를 시작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기가 바들바들 떨면서 두 발을 딛고 서게 됩니다.
사실 아이 힘으로 혼자 일어선 듯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 누구의 힘으로 일어선 것입니까? 부모입니다. 아기는 넘어지더라도 엄마, 아빠가 지켜줄 것을 알고 굳게 믿고 일어섰습니다. 그러기에 일어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과정을 쉽게 말하면 ‘믿음으로’ 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셨고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이루어졌다’ 이것이 “믿음으로”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 하나님은 노아를 택하셔서 그를 도우시고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노아는 세상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 7절을 보면,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 짓는 일을 시키셨습니다. 노아는 그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방주를 준비했을 뿐, 동물을 방주에 들여보내고 방주의 문을 닫는 일은 모두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노아는...”이라고 이야기할 때, 그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노아는... ” 의 진의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모두 하나님이 하신 것이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잘했다며 칭찬을 돌려주십니다. 이 벅찬 사랑에 붙잡힌 우리가 진정 행복한 사람이 아닙니까? 우리의 무너짐과 꺾임, 절망의 눈물을 보지 않고, 우리를 붙드신 하나님의 영원한 소망에 기대어 한 번 더 일어설 때, 우리는 믿음으로 살 수 있음을 기억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노아처럼 하나님만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정리>
노아는 하나님께 소속 되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다.
노아의 믿음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