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칼리지-갈라디아서 3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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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적이면서도 동일한 복음(갈 2:1-10)
거짓교사사들은, 바울이 원래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복음을 배웠는데 그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다 보니 율법이나 할례 같은 것을 가르치기 어렵기 때문에 그 내용을 빼고 일부만 전한 것이라고 거짓말했다.
이런 거짓 선생들의 주장에 대해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 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전한 복음과는 독립되어 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하나님께 받은 것이지 사도들에게 받은 것이 아닌, 독립된 복음이다.
그러나 예루살렘 복음이 따로 있고,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복음의 기원은 다르지만 하나님께 계시로 받은 것이기 때문에 내용은 같은 것이라고 본문을 통해 살폈다.
1차 예루살렘 방문에서 그걸 증명하고자 한다.
갈라디아서 1:16 (NKRV)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여기서 ‘혈육’은 사람을 뜻한다. 그러니까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라는 말은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7절을 보자.
갈라디아서 1:17 (NKRV)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사도들에게 자신의 경험과 계시를 나눌 필요가 없었다는 걸 뜻한다. 왜냐하면 분명한 계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사도들을 만나지 않고 바로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갔다.
그러니까 바울이 예루살렘 사도들에게 복음을 배웠다는 거짓 선생들의 주장은 거짓된 말이다. 그 후 3년이 지난 후에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18절을 보자.
갈라디아서 1:18 (NKRV)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바울이 복음을 예루살렘에서 배웠다고 주장하는 거짓 선생들의 의견과 달리 바울이 예루살렘에 처음 간 것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3년이 지나서였다.
그리고 15일을 머물렀다. 짧게 머무르며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났다.
바울이 그들을 만났을 때, 육신을 가지고 지상에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세세한 이야기를 듣고 많은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두고,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복음을 배운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21절을 보자.
갈라디아서 1:21 (NKRV)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는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이다. 예루살렘에 단 15일만 머물고 먼 곳으로 이동해 왔는데, 어찌 예루살렘 사도들에게 복음을 배웠다고 할 수 있겠는가?
2차 예루살렘 방문
갈라디아서 2:1 (NKRV)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여기서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 이야기가 나온다.
바울은 14년 동안 이방인 사역을 충분히 한 후에 두번째로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을 만난다. 14년이나 지났다. 바울이 예루살렘 사도들에게 복음을 배웠다는 말이 전부 거짓이라는 증거다.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에서 주의해서 봐야 할 대목이 있다.
바울이 바나바와 디도를 데리고 올라간다. 바나바는 유대인이고, 디도는 헬라인, 즉 이방인이다.
바나바는 유대인으로 할례를 받은 사람이고, 디도는 이방인이기에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다.
바울이 디도를 데리고 간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파격적인 일이다.
갈라디아서 2:2 (NKRV)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유대인의 정서를 잘 아는 바울의 마음에 부담감이 생겼다.
당시 초대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이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생길 어려움을 예측하고 그간 수고한 것들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사도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할례 문제
눈여겨 볼 사건. 디도를 데리고 올라가니까 예루살렘에 있는 어떤 무리가 디도에게 할례를 억지로 주려고 한다.
갈라디아서 2:3 (NKRV)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자기 정체성의 핵심.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외적으로 표시해 주는 것이 할례이다.
이방인 중에서 유대교 안으로 들어오려면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했다.
이런 차원에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게 교회 안에 들어오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자를 할례를 통해 다시 유대인처럼 만들고 싶어한 것이다.
예수를 믿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교회 안으로 들어와 성도가 되려면 유대인이 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도 그런 모습이 있지 않은가?
누구든지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환영한다. 그러나 우리 방식대로 정착해 주기를 원한다. 우리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온갖 조건을 붙여서 상대를 바꾸려고 한다. 그냥 바꾸면 이기적으로 보이니까 원칙을 내세워서 상대를 바꾸려고 한다.
교회 안에도 본질이 있고 비본질이 있다. 비본질은 상대화할 수 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디도에게 이제 비본질이 되어버린 할례를 요구한다.
이런 유대인들의 도모를 바울이 어떻게 다루었는가?
갈라디아서 2:5 (NKRV)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절대로 디도에게 할례를 주지 않았고 허락하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4절이다.
갈라디아서 2:4 (NKRV)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할례를 요구하는 이들은 형제의 이름과 모양은 가지고 있지만, 가짜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도의 자유를 빼앗으려고 한다. 그러니 가짜이다. 하나님이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는데, 그걸 빼앗으려 하다니…
Nestle-Aland Greek New Testament, 28th Edition (Chapter 2)
παρεισάκτους
* 가만히 들어오다는 단어는 ‘파레-이스악토스’라는 헬라어의 뜻이다. 이는 직역하면 ‘몰래 침입하다’라는 뜻을 가진다. 그들이 전하는 다른 복음이 올바른 것이라면 몰래 들어올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본인들도 당당하지 못한 것이다.
* 몰래 침입하여 교묘한 수법을 쓰는 것은 사기꾼이나 하는 짓이다. 그들은 율법을 요구하지만, 뒤에선 정죄감을 스스로 느끼며 자유함 없이 힘들어할 것이다.
* 그저 갈라디아 성도들의 자유를 엿보고 갈라디아 성도들도 자기들처럼 자유를 빼앗기고 힘들어하기를 바랐다. 아주 나쁜 사람들인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정죄에서 자유케 하신다. 죄에서 자유케 하신다. 사망에서 자유케 하신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를 ‘자유의 대헌장’이라고 부른다.
성도의 자유를 할례와 같은 조건으로 옭아매려고 해선 안 된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외적인 여러 조건, 신분, 재능, 학벌, 돈을 가지고 평가한다. 그 결과 그 인생은 수고롭고 힘들어진다.
뭔가 조건과 자격을 구비하는 것이 인생살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면 피곤해진다.
조건과 자격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 자격이나 조건과 같은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의 공로로 값없이 복을 받는 특별한 은혜가 주어졌다.
이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바르게 깨달으면 자유할 수 있다.
사람들의 평판에서 자유하게 된다.
우리는 평생 이런저런 형태의 종노릇을 많이 하면서 살았다.
다른 사람의 눈총의 종으로 살았다. 그것이 다른 복음이다. 눈치를 보며 공로와 자격을 인정 받고 싶어하는 것.
우리가 다른 복음을 환영하는 것은 우리 속에 타락한 종교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종교성이 우리의 자기중심성과 만나면 다른 복음을 만든다.
사랑으로 기다리시는 하나님은 오랫동안 우리를 바꿔 자유자로 만들고 참 복음을 주시지만, 우리는 이런 기다림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본성은 끊임없이 다른 복음을 만들어 낸다. 더욱 종교적인 것같이 보이는 어떤 모습을 찾는다. 그래서 할례를 행하는 것이다. 여러 외적인 종교행위에 목매는 것이다.
복음은 자유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지만 그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 자원하는 마음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해코지 당할 것을 두려워해서 겁 때문에 하는 것은 전부 타락한 종교이다.
복음은 하나님을 마음에서부터 자원하여 사랑하고 기꺼이 순종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우리 본성에 잘 맞지 않는다.
하나님은 강제로 우리의 인격과 중심을 바꿀 힘이 있으시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인격과 중심을 바꾸기 위해 우리가 사용해 본 적 없는 근육들을 사용하는 법을 배워 내면의 변화를 일으키는 참된 신앙을 기대하신다.
우리가 선택하도록 기다리시고, 우리의 자유를 온전히 보호해 주시고, 사랑하고 아끼신다.
그래서 오히려 변화가 더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실패할 수 없는 길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피를 쏟고 몸을 찢으시며, 완전하고 귀한 대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이다.
바울의 동일하고 완전한 복음
사도 바울이 진리를 잘 보존하고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복음을 제시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6절이다.
갈라디아서 2:6 (NKRV)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바울이 복음을 다 제시하자 예루살렘의 유력한 자들이 아무도 뭔가를 더해 주지 않았다. 자신들이 전하는 복음과 전혀 다를 것 없는 완전한 복음임을 알았다. 그래서 보충하거나 더하려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할례를 받았는지 여부를 확인하고 싶어하지 않으신다.
우리 속이 정말 변화되었는지,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있는지, 우리 속에 자원함이 있는지를 보신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자신들의 복음과 똑같다는 것을 깨닫고는 친교의 악수를 한다.
갈라디아서 2:9 (NKRV)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사회에서는 악수가 당연한 행동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이 당시 사회에서 악수는 대등함의 상징이었다. 그 당시는 신분 사회였기 때문에 악수를 한다는 것은 상대방과 내가 대등하다는 것을 상징하는 행동이다.
사도들은 바울의 복음을 듣고 확인한 다음, 자신들의 복음과 같은 것을 알았다.
그래서 한 부류는 유대인에게로, 한 부류는 이방인에게로 부르셨다는 것만 구별되는 줄 알고 서로를 인정했다.
이것이 복음이다. 문화가 다르고 사람이 다르고 시대가 달라도 복음은 하나이다. 복음은 하나밖에 없다.
사랑부, WM센터, 한반도선교지원팀, 교회학교, 교구에서 전해지는 복음은 다 하나다. 예수 그리스도로 자유함을 얻는 것!
# “이신칭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 것(갈 2:11-16)
갈라디아서 2:11 (NKRV)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바울은 베드로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령도 낮고 사도도 더 늦게 된 후배이다. 그런데 공개 석상에서 연장자인 베드로를 꾸짖는 일이 생겼다. 왜 그랬을까요?
갈라디아서 2:12 (NKRV)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핵심적인 단어는 “함께 먹다가"이다.
여기서 ‘먹다가’는 미완료 시제 동사이다.
이 ‘먹다가’는 일회적인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습관을 보여 주는 동사이다.
한 번 먹었다는 것이 아니라 함께 먹기를 즐기며 자주 했다는 뜻이다.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즐거워했고, 자주 반복해서 함께 식사했다.
이 당시 문화 속에서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기도 했다. 유대인은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음식에 대한 율법규정이 200개가 넘었다. 그만큼 먹는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율법에서 먹지 말라고 한 음식을 아무렇지 않게 먹던 사람들이었다. 베드로가 그런 그들과 함께 식사를 했던 것이다.
사도행전의 10장을 보면,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를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때 하나님이 환상으로 이방인이 먹는 음식을 베드로에게 먹으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정하다 하신 걸 더럽다 하지 말라 하신다.
그리고 베드로는 고넬료를 만나러 가고, 그에게 세례를 주고 그를 교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였다.
그 은혜를 경험한 베드로가 이렇게 고백했다. (행 10:34-35)
사도행전 10:34–35 (NKRV)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베드로는 이 사건으로 이방인의 외적 조건을 따지지 않는 것을 배웠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자칭 야고보가 보내서 왔다 한 사람들이 베드로의 식탁 교제에 찾아와 분란을 일으키려 한 것이다.
하지만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었던 야고보가 절대 문란을 일으킬 리가 없었다. 그들은 거짓말하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야고보도 그 점을 예루살렘 공회의 에서 지적한다(행15:24).
사도행전 15:24 (NKRV)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베드로는 그들에게 속아서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며 이방인들과의 식탁 교제에서 일어나 물러갔다.
바나바도 그를 보고 덩달아 떠나갔고, 다른 유대인들도 똑같이 떠나갔다. 바나바는 최초의 이방인 교회인 ‘안디옥교회’의 담임목사였다. 자기 성도들을 버리고 떠난 것이다.
그 식탁에 남겨진 이방인들은 얼마나 비참하고 수치스러웠을까…?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말한다.
갈라디아서 2:14 (NKRV)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바울은 베드로의 행위를 그냥 용납할 수 없었다. 그에게 나쁜 감정을 실어 화를 낸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한 것은, 복음이 왜곡될 위험을 느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꾸짖고 혼을 낸 것이다.
<교회가 가르치는 사랑>
바울은 베드로의 허물을 사랑으로 덮어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렇게 덮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개념이 아니다.
너가 하는 걸 무조건 다 받아들이고 내가 하는 것도 무조건 다 받아들이라고 하는 게 아니다.
복음이 가르치는 사랑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포기할 수 없는 진리를 가진 사랑이다.
그렇다고 진리를 거스르는 행동을 할 때, 원수처럼 정죄해선 안 된다.
그 영혼을 바르게 하기 위해 사랑으로 책망해야 한다. 그 사람이 진정으로 바른 진리를 되찾기를 바라며 권고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베드로가 진리를 왜곡하자 그를 책망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베드로와 관계가 깨질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를 세우기 위해 책망했다.
그것이 바울의 사랑이었다.
사람과의 관계가 불편해지는 것이 나은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불편해지는 것이 나은가?
진리를 세우기 위해 사람과의 관계가 불편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그를 책망해야 할 일이 생기면 책망하고 계속 진리 가운데로 돌아올 수 있도록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
<교회가 말하는 성도의 교제>
교회는 어떤 교제가 이루어져야 할까?
이방인들을 억지로 유대인처럼 만들어야 성도의 교제가 가능한 것이 아니다.
교회는 새로 들어온 이방인들이 먼저 자리잡은 유대인들처럼 되어야 성도의 교제가 가능한 공동체가 되어선 안 된다.
교회로 들어올 때 유대인처럼 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건다는 것은 교회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깨뜨리는 행위다.
3장에서 다룰 구절이지만, 바울이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
갈라디아서 3:28 (NKRV)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그런데 유대인들처럼 할례를 받거나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공동체로 들어올 수 없다?
예수님이 팔 벌려 기다리시는데, 우리가 왜 그걸 막아야 하는가?
우리에게는 막을 자격이 없다.
교회는 만민을 위한 집이다.
어느 지역 출신, 어느 대학 출신이 중요한 게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자유함을 얻은 성도인지, 인격적인 변화가 있는지, 그것이 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이다.
민족, 소속, 능력, 외모, 계급이 달라도 교회에 모이면 그 반짝거리던 것들이 빛을 다 잃는다. 오직 예수님만 빛난다.
그곳이 교회다.
여러분이 어떤 외모이든, 얼마나 돈을 가지고 있든 예수님은 여러분을 향해 두 팔 벌려 안아주기 위해 기다리신다.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자격과 조건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신다. 그러니 그 주님 품에 안겨라.
<복음의 핵심>
바울은 베드로를 책망하고 복음을 정확하게 한번 더 짚어준다. 16절이다.
갈라디아서 2:16 (NKRV)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이 16절은 갈라디아서의 가장 중요한 구절 중 하나이다.
16절 앞부분에 이미 복음의 핵심이 다 나왔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밀미암음이라”.
이게 복음의 요약입니다.
그리고 16절 후반부를 볼까요?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율법의 행위를 가지고 천국 앞에 가면, 하나님이 “너는 정말 잘했다. 내 마음에 쏙 든다.”라고 하실까?
이 말을 들을 육체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자가 없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래서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아무리 가르쳐도 그 내용을 좋아하기는 하나 가슴과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뭔가를 충족시키려는 죄의 경향이 계속 드러나온다.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제일 중요한 문제는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보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근원적인 고통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관계하면서 평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거리를 느끼며 하나님만 생각하면 끝없는 눌림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모태로부터 가지고 태어난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멀게 만들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면 기쁘지 않고 평안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기 전까지 안식이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는 의롭다’ 말씀해 주시기 전까지 자유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 그 말을 들으려고 종교적 열심을 가진다 해서 의롭다고 말을 들을 수 없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의지해야 한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갈 2:17-21)
믿음과 행함에 대한 바른 구분
갈라디아서 2:19 (NKRV)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하게 되면서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는 일이 일어난다.
모든 사람이 율법을 지킬 수 없어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율법의 권위 아래로 오셨다.
그리스도 자신이 율법을 주신 분인데 스스로 율법의 권위 아래 오셨다.
예수님은 모든 율법과 명령을 전부 이루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율법을 어긴 것에 대한 형벌을 대신 받으셨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율법은 예수님께 할 말이 없다.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형벌을 받으셔서 율법은 요구할 수 있는 게, 할 수 있는 말이 없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그 정당성을 함께 누리게 된다.
그런데, 그런 우리보고 예수님 믿는거에다가 율법을 지켜야 구원이 완성된다고 말하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율법에 대해 죽었고, 하나님에 대해 살았다. 그 연장선이 20절이다.
2. 새로운 피조물
갈라디아서 2:20 (NKRV)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람의 치명적인 문제는 자기중심성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를 위해 살고, 자기를 기쁘게 하려고 살아간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으면, 자기중심에 묻혀 있던 우리의 삶에 예수님이 들어오신다.
그래서 우리는 나 자신을 위해 살기를 멈추기 시작한다.
더 이상 자기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삶의 목적이 아니다.
중심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과 모든 걸 함께 하고 싶어한다.
부부가 가정을 꾸리고 가장 많이 부딪히는 게 서로의 자기중심성 아닌가?
(나는 MBTI 가 P이고, 아내는 J 이다. 그래서 항상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길 요구한다. 그런데 나는 그게 스트레스다. 부부 생활을 통해 가장 소중한 사람도 다 맞춰주지 못하고 바르게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배우자를 고를 때, 제일 중요한 게 뭔가? 성격 좋은 사람? 성격 좋은 죄인이 어딨나? 다 망가져 있다.)
(자기중심성을 깨뜨릴 준비가 돼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 안에 예수님이 사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면,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고 하나님이 보이기 시자하고, 이웃이 보이기 시작한다.
3. 예수님과의 연합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과 연합하게 된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참되고, 영적이고, 개인적이고, 사실적인 연합이 일어난다.
주님과 우리 사이에 연합이 일어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은 우리 안에서 동등하게 같은 혜택을 누리게 된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사건이 된다.
그리고 우리를 하늘에 앉히신다.
에베소서 2:4–6 (NKRV)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예수님을 믿는 일이 이렇게 놀랍고 위대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1-5)
갈라디아 교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갈라디아서 3:1 (NKRV)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여기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눈 앞에 밝히 보인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이 복음을 생생하게 누렸다는 뜻이다.
그랬던 그들이 은혜를 헛되이 여기고 율법 아래로 들어가려고 하고 있으니, 얼마나 바울 마음이 속상했을까?
인간이 율법을 잘 지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필요가 없었다.
그게 분명한데도 갈라디아 성도들은 할례를 받거나 율법을 준수하는 육신의 행위를 해서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한다.
너무나 어리석은 일.
갈라디아서 3:3 (NKRV)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라디아 성도들은 조건 없이 자신을 사랑하는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선물로 받고도 어리석게도 육신의 길로 다시 돌아가려고 한다.
자기를 신뢰하려고 하고, 끊임없이 자격을 세워서 하나님 앞에 뭔가를 얻어 내려고 한다.
성령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성도는 그 어떤 조건도 충족시킬 수 없다.
성령님을 의지해야만 육체를 다스릴 수 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성령님을 의지하시는 여러분들 되시길 축복한다.
생각해볼 질문
1) 나는 교회 안에서 율법적인 잣대를 가지고 나 스스로와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는 않았나요?
2) 어떤 사람이 교회로 들어올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인가요? 예수님께 은혜를 입은 사람인가요?
3) 율법주의는 내게 괴로움만 안겨준다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자유한 마음으로 다른 성도들과 사랑으로 연합하여 신앙생활 할 수 있기를 소망하며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