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가 가져야할 최고의 가치(마 19: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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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가져야할 최고의 가치(마 19:16-30)
<서론>
예전에 故옥한흠 목사님의 설교 중에 기억나는 예화가 있습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80세가 될 때까지 건강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좀 더 살고 싶은 마음에, 어느 날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 돈 많아요.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았는데 좀 더 살고 싶어요. 제 재산 절반을 드릴 테니, 좀 더 살게 해 주세요!
이에 하나님께서 반색을 하시며 ‘그래? 만일 네가 네 재산 전부를 주겠다고 했다면, 2천년을 살게 했을 텐데, 재산 반을 준다니, 나도 반을 잘라서 천년을 더 살게 해 주마!
이 말을 들자 부자는 흥분했습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을 다 불러 모아 놓고 자기가 천년을 더 살게 되었다며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루 만에 갑자기 심장 마비로 죽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항의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면 약속을 지켜야죠. 천년을 약속해 놓고 하루 만에 부르시면 어떻합니까?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웃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성경 벧후 3:8을 봤느냐? 내가 거기에 이렇게 써 놨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
성경은 종종 부자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말하곤 합니다. 특히 누가복음에서는 어리석은 부자이야기(눅 12:16-21) 부자와 나사로이야기(눅 16:19-31)를 하시더니, 오늘 본문에서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24)고까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부자로 사는 것은 죄이고, 부자는 절대 천국에 갈 수 없는 것일까요?
반대로, 가난하게 지지리 고생하며 살아야만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일까요?
「윌리엄 핸드릭슨」이 쓴 교리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탐욕이란, 우리가 빠져 나올 수 없을 만큼 재물 혹은 물건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삶에서 제일 중요하다.
많은 돈좋은 집비싼 차문제가 아니라, 그것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최고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있느냐?’에 따라 그것이 ‘죄가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돈을 최고로 사랑하는 사람은 돈을 위해 살지만,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그 사실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본론>
1. 하나님을 사랑하라
본문은 먼저, 「성도가 가져야 할 최고의 가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16a). 마태는 그를 “청년”(20)이라고 말하지만, 마가(10:17)는 “부자”라고 소개하고, 누가(18:18)는 “관원(ἄρχων 산헤드린 공회원)”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젊고 부자이고 이스라엘 최고의결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원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엄친아입니다.
엄마친구아들 중에 누구는 전교 1등(혹은 사장, 사시합격)이라더라~’하는 완벽한 청년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훈훈한 그가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합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6).
청년의 질문은 시작부터 잘못되었습니다. 그는 자칭타칭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생각했기에 사람인 자신이 ‘선하다’ 혹은 ‘선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붙들려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17a)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친구야! 무슨 소리야~~ ‘선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어~」 말씀하시며, 옳지 않은 질문을 바로 잡으시고서 가르침을 시작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17b).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 받는다」는 사실을, 잘 아는 우리들은, 지금 ‘계명들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상하게 생각될 것입니다.
글귀에 붙들리면 안 됩니다. 예수께서 부자 청년에게 영생의 조건으로 계명을 언급하신 것은, 계명 의 본질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청년은 계명의 본질이 아니라 ‘선함’을 영생의 조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선하게 살면 하나님이 그것을 공로로 여기셔서 영생을 주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요일 2:5)
그 청년은 크게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의 진정한 정신인 ‘하나님 사랑’에는 관심 없고, 그저 ‘선함’에만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계명을 지키는 우리에게서 하나님 사랑을 찾을 수 없다면, 결코 진정으로 계명을 지킨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착하게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 있는 사람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에 기꺼이 순종할 수 있는 무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 사랑이 최고의 가치라면 자기를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하나님 사랑이 최고의 가치인 사람은, 자기를 포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청년은 이렇게 묻습니다. “어느 계명이오니이까?”(18a)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18b–19)고 답하셔서 계명을 상기시킵니다.
그럼에도 답답한 청년의 반응은 계속 이어집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지켰습니다!”(20a) 청년은 이 계명들을 너무 잘 알고 있고, 지금까지 너무 잘 해온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20b)라며, 자신감을 피력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가 온전하고자 하느냐?”(21a)라고 말씀합니다.
마가복음에는 직접화법으로 말씀합니다.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막 10:21)
청년은 비록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고, 이웃에게 해를 주지 않았지만, 그것은 다만 율법의 글귀대로, ‘여기까지 이것까지 하면 됐지 머!’하며, 진정한 하나님 사랑 정신은 빼먹었습니다.
청년은 율법을 다 지켰다고 자부했으나, 예수님이 볼 때는 자기만족 수준에 머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한계를 넘어,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21b)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그는 재물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 청년에게 재물은 자신의 정체성을 사람들에게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그 청년의 실체를 이렇게 보고합니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22)
근심하며λυπέω뤼페오”단순한 고민의 정도가 아니라, 「마음을 아파하며」라는 뜻입니다.
그 청년이 ‘돈을 포기하는 것’은 자신의 심장을 찌르는 것같이 ‘마음이 아프고 매우 슬픈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재물 = 나」였습니다.
예수님이 문제 삼으신 것재물 자체가 아니라, 그 재물에 대한 그의 집착입니다.
이 청년은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재물로 대변되는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는 말의 의미를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는 말씀에서 ‘주 κύριος Lord’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 는 종의 반대 개념으로 ‘주인’ 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예수로 하여금 내 인생의 주인이 되시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다니고 있고 예배에는 않아 있지만, 여전히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셨다말하기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다는 것은, 나를 포기하고 예수님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방식으로 생각이 바뀌고, 사상도 바뀌며, 살아가는 방식도 바뀌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국(영생)은, 예수님 외에 다른 것은 다 버리는 성도의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성도는 자기를 포기하고 예수를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삽니다.
바라기는, 하나님 사랑을 인생 최고의 가치로 삼음으로, 나를 포기하는 것이 하나도 가슴 아프지 않고, 최고의 즐거움이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이제, 예수를 따라야합니다.
세 번째로 본문은, 하나님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우리는이제, 재물(세상)이 아니라 예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부자청년에게 “와서 나를 따르라”(21c)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지금까지 예수께서 부자청년에게 하신 말씀의 핵심이자 결론입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하나님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알고 자기를 포기(부인)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최종의 행동이자, 삶의 열매입니다(10:38; 16:24; 막 8:34; 눅 9:23; 14:27).
예수를 따르는 것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하나님께 자신을 전적으로 헌신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부자청년은 반대로, 하나님보다 재물 더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마음이 상하여(삐져서) 가버렸습니다.
아브라함 때와 동시대 사람으로 추정되는 동방의 욥이라는 사람은 재물이 사라지고 모든 것을 잃어 버렸어도 마음이 상하지 않았습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문제는 탐욕입니다. 이 탐욕은 예수님을 따라가는데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왜냐하면 탐욕은 예수보다 돈을 사랑하게 해서 우리의 발목을 잡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들에게 중요한 것은 우선순위입니다. 재물보다 하나님이 우선해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따르는 것으로 인해 오는 손해 때문에 전혀 속상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혹시, 신앙 때문에 발생하는 직장사업장관계에서 오는 불편 때문에 속상하지는 않습니까?
혹시, 예배하러 온 것 때문에 무언가 못한 것이 있어서 마음이 편하지 못하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드리는 헌금 때문에 아깝다는 생각으로 시험에 들어 있지는 않으십니까?
그래서, 그만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시간 이후로 생각을 바꾸셔야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최고로 여기지 않고,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데 인색하다면,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23a) 내가 진심으로 말하겠는데!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23b) 얼마 만 큼?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24)
가장 큰 동물인 「낙타」가장 작은 구멍인「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아니!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지금 당신을 따르는데 방해가 되는 걸림돌을 제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보다 더 좋은 것이 있으면 절대 주님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내게 가장 귀한 분이 예수님이 되어서, 기쁘게 예수님을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오늘 강론이 다소 과격하게 들리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구원과 구원 받은 성도가 지켜야할 근본입니다.
우리의 삶의 가장 큰 가치는 하나님 사랑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재물이 되었든, 관계가 되었든, 기호가 되었든 모든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데 사용되어야하고, 주님을 따르고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생의 길을 묻는 이 청년의 모습은, 우리 자신의 모습일수도 있습니다.
영생을 갈망하면서도 얻지 못하고, 주님을 따르는데도 실패하는 것은, 하나님 보다 더 좋은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 사랑하는 것을 가장 우선하는 가치로 삼아서, 나를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는 것에 성공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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