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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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서론
: 이제 추석이다
추석이면 가족이 모여서 무엇을 합니까?
잘 지내는 가족도 있고 꼭 한번은 대판 싸우는 가족도 있다.
그런데, 가족은 금방 싸우다가도 금방 화해하는 법입니다.
인간관계에는 때론 심각한 논쟁이 있을 수 있고
그로 인해 분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어떤 사람과 분쟁이 있은 후 화해 잘 하는 편이십니까?
그런 논쟁 후 관계를 더 돈독히 한 경험이 있나요?
이런 갈등을 어떻게 해결 하는냐가 그 사람의 됨됨이와
그 사람의 성숙도를 보여줍니다.
오늘 설교는 안디옥 교회의 문제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모이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위기일수도 있고 아주심각한 문제 이기도 한 교회 내의 갈등을 해결하여
초대교회는 위기를 기회로, 더 멀리 뛸 수 있는 계기로 삼습니다.
그리고 더욱 성숙합니다.
교회의 성숙을통해,
복음이 더욱 더 활발히 전파되는 발판을 만드는 초대 교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지금 부터 성숙한 신앙에 대해 차근 차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큰 은혜 있으시길 축원 합니다.
1.일치를 위한 노력 2.정죄하지 않음과 자유
1. 일치(Unity)를 위한 노력
1. 일치(Unity)를 위한 노력
기독교는 일치를 위해 모이고 함께 힘써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분란을 봉합하고 성숙해왔습니다.
한 복음, 한 주님만을 믿고 따르기 위해 일치를 위해 쏟아온 노력은
성숙함으로 나타났고
복음은 더 폭발적으로 전파되고
더 다양한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 드는 긍정적 결과를 낳았습니다.
한 가정에서도 부모가 가장 원하는 것이 우애좋고 화합하는 것이듯이,
하나님 아버지 께서도 교회와 성도의 일치를 원하십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교회는 일치를 경험할 때마다 한 단계씩 성숙하고
하나님의 뜻에 주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사도행전에서 누가가 즐겨쓰는 표현중 하나가 바로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32절a).
“한마음과 한 뜻”(카르디아 카이 프쉬케 미아, καρδία καὶ ψυχὴ μία, one in heart and mind)에서
“마음”(카르디아)과 “뜻”(프쉬케)은 ‘마음’과 ‘혼.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한 마음으로 함께 기도한 결과가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한 마음과 한 뜻” 이 삶 자체가 됩니다.
이렇게 다양하고 독특한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함께 한 마음이 되려고 기도하고 모여
신앙생활 하는 것이 교회고 그 교회는 결국 일치, 즉 “한마음과 한 뜻” 으로 나아가야 한다
분열은 성숙을 막고 복음전파를 정체 시킵니다.
어쩌면 한국 교회의 성숙이 정체된 결과가 표면적으로 성장의 정체로 나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본문에서 교회의 일치를 심각하게 흔드는 사람들이 등장 합니다. 이들은 분열을 야기 시킵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1절 이 구절에는 “어떤 사람들” 로 지칭 되는 사람들이 안디옥에 느닷없이 나탑니다.
이 사람들은 유대 지역에서 왔고 그들은 안디옥의 형제들을 가르쳤다고 말합니다.
당시 초대교회의 기득권은 유대인들 이었습니다.
이방인에 대한 교육과 치리를 목적으로 안디옥으로 온 것으로 보입니다.
한 영혼 한영혼 이 아닌, 이방인 이라는 그룹으로 묶어 생각 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문제
“어떤 사람들”의 문제
이들을 통해 교회에 “적지 않은 변론과 분란” 이었습니다.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2절 이 분란의 원인으로 두 가지를 들수가 있는데,
첫째, 교회의 지시도 없이 안디옥에 갔던 사람들이고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어떤 사람들”이 뭐가 문제 일까?
ㄱ. 지시와 파송을 받지 않은 사람들
ㄱ. 지시와 파송을 받지 않은 사람들
교회에서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해도 되는 말이 있고 굳이 안해도 되는 말이 있습니다.
특히, 문제가 될 만하고 교회의 일치를 흔들 만한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발언을 신중히 해야 함
분열을 일으킬만한 소지가 있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성숙하지 않은 사람은 자기 생각이 제일 중요합니다.
어린 아이들을 가만 보면 그야말로 자기가 원하는 것,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가장 중요 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성숙한다는 것은 자기 욕구는 잠시 참을 수 있는 것이고
하고 싶은 말도 제어 할 줄알아야 하고
자신이 속해 있는 단체나 사회에 득이 될만한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을 성숙하다고 말합니다.
룰을 따를 줄 알아야 성숙한 사람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어성경에서 이 사람들을 “certain individuals” 라고 기록했는데, 특정 개인 이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그저 개인적인 의견을 공적인 자리에서 말하는 것을 넘어서
가르침 이라는 공식적인 행위를 했다는 것이 문제 입니다.
교리와 성경의 해석은 공인된 교제와 주석을 참조해서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교사는 교회의 임명을 통해서만 세워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개인적인 주장이나 잘못된 신학을 가르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일치를 위해…자비와 경청을…
일치를 위해…자비와 경청을…
성숙한 교회는 이런 분란 속에서 일치로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잘못을 행한 사람들을 치리하고 분란을 잠재우면 될까요?
너 잘못했으니 나가라고 하면 끝나는 것일까요?
성숙한 자세 라는 것은 본질을 보고 근본적인 해결을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일을 대비하는 것이 진정한 성숙한 대처 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어떻게 이 일을 처리했는지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5:2 (NKRV)
…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2절 하반절 바나바와 바울 일행을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보냅니다
이것은 문제를 덮는데 급급하지 않고 또 잘못을 저지른 형제들도 버리지 않기 위한 성숙하고 자비로운 결정 이였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도착하고 예루살렘에서 격렬한 토론이 이뤄집니다.
이럴때 우리는 명확한 대처가 필요 합니다
첨해한 문제일수록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먼저, 문제의 본질을 살펴 봅니다.
그것은 유대인 출신 형제들이 아직도 이방인 출신 형제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의 핵심 이었습니다.
본문의 사건은 일종의 텃새이고 일종의 끼리 끼리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사도들과 장로들은 이 문제에 대해 현장에서 직접 성령님의 역사를 경험한 바울과 바나바에게 가장 먼저 발언권을 줍니다.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그리고 4절 이들의 모두 발언을 시작으로 반대파인 바리새파 성도들의 의견을 듣습니다.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5절 그리고 사도들과 장로들이 쉽게 결론을 내지 않고 신중하고 진실되게 많은 변론을 나눕니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7절 그리고 나서야 대표자 격인 베드로의 의견을 듣습니다.
8-11절 동등하게 죄사하시고 구원 하셨다
12절에 사도들과 장로들 앞에서 말한 것을 이제는 성도들 앞에서 전합니다.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 우리와 동등하게 역사하시어 구원하셨다는 것을 설명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토론이 성숙되고 질서정연하게 진행 되었다는 것입니다.
동등한 발언권을 주고 중구난방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발언권을 얻은 자만 이야기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무리 나의 생각과 반대 된다하여도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경청 했다는 것이 중요한 부분 입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 교회의 분란을 막는 길입니다.
성숙한 성도와 교회가 되려면 인내하며 들을줄 알아야 합니다.
형제들의 입을 통해 말씀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일치로 가는 길입니다.
자기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겸손하게 신중하게 경청하는 것이 중요 합니다.
초대교회의 성숙한 갈등 해결 방식이 어떻게 가능 했을까요?
초대교회의 성숙한 갈등 해결 방식이 어떻게 가능 했을까요?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자신이 믿는 신념을 내려 놓고
민족도 아니고 나라도 아닌 오직 믿음,
복음 앞에 숙복할때 그것이 진정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는 길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야고보 입니다.
야고보의 발언
야고보의 발언
이제 13절에서 부터 베드로가 떠난 후 초대교회의 리더로 세워졌던 야고보가 발언을 하는데
저는 야고보에 대해서 조금 언급하고자 합니다.
야고보는 세베대의 아들 중 하나도 아니고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육체적인 형제로서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주님을 따르지 않고
주님의 부활 후가 되서야 주님이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매일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여 그 무릎이 낙타와 같이 딱딱하게 굳었다고 합니다.
다른 초대교회 지도자들과 달리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도 칭송과 존경을 받는 애국자요 민족주의자였다고 합니다.
"그는 홀로 성전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모든 인간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그래서 야고보의 무릎은 낙타의 무릎처럼 딱딱해졌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를 의인 또는 ‘오블리아스’라고 불렀는데,
오블리아스는 인간의 방파제이며 의로움이라는 뜻이다."
(유세비우스 교회사" 2-23)
그런 그가 이 사건에 대해 어떤 의견을 내었는지 궁금해집니다.
17절에서 아모스 말씀(9:11-12)을 인용해서,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모든 이방인들이 주를 찾게 될 날이 오늘날 이르렀다는 것을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요 민족을 사랑하고 이스라엘 나라를 사랑하는 이 야고보가 선포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애국이나 민족주의적 생각 보다
교회의 일치와 하나님의 구원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순복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자신의 사상과 생각을 복음을 위해 포기할 줄 아는
야고보의 성숙함을 배워야 합니다.
2. 정죄 하지 않음과 자유(Liberty)
2. 정죄 하지 않음과 자유(Liberty)
안디옥과 초대교회 리더들이 가장 두려워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또 유대인들이 가장 무서워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이 두그룹의 교집합은 ‘이방인’ 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 그 당시 이방인들은 성적으로 문란하고
우상을 섬기고 다신교는 믿는 망령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유대교에서는 절대 하지 않는 가증한 일들을 서슴치 않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유대인들에게 29절의 우상의 제물, 피와 목메어 죽은 것과 음행은 용납할 수 없는 죄악된 행동이었습니다
해결책으로 내놓았던 것이 ‘할례’ 였던 것입니다.
이방인들도 모두 할례 받은 준 유대인으로 만들면 된다는 생각 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비본질적이고 외적인 모습 이었습니다.
다른 복음
다른 복음
여기서 “어떤 사람들”의 두번째 문제, “다른 복음”을 가르쳤다
이 사건에 대해 나중에 바울은 이 일을 회상하면서 이들이 가르친 것을 “다른 복음” 이라고 표현 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의 내용은 1절 하반절, “모세의 법”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
이들이 언급하는 모세의 법은 모세가 애굽에 다시 돌아가기 전에 자신의 아들을 할례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여호와께서 격노 하신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영어원문에 보면, 모세의 법이 아니라, “custom of Moses” 즉, 모세의 관습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이 아니라, 모세의 관습은 있지도 않으며 있다하여도 관습은 따라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특히나 이들의 주장이 위험한 이유는 할례와 구원을 연관 지었기 때문 입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증표 입니다.
구원은 죄사함의 문제 입니다.
구약에서도 할례와 죄사함은 관계가 하등 없습니다
로마서 2장에서 바울은 할례와 율법에 대해서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할례가 소용 없다고 말합니다.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25절 할례는 유대인 이라는 표증이 될지 몰라도 유대인이 된다는 것이 구원의 길은 아닙니다
오직 예수 보혈로 죄사함 받고 구원 받는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 에서 그 어떤 사상이나 자기 신념도 복음 보다 앞서서는 안됩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는 자비를"(in essentials, unity; in nonessentials, freedom; and in all things, charity).
본질과 비본질에 대한 옳바른 판단과
나와 다른 이들에 대해 포용하고 자유를 인정하고
모든 것을 자비와 사랑을 배풀려는 성숙한 복음적인 자세가 필요 합니다.
본질은 영혼의 죄사함이고 구원 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우상의 재물 문제가 있었을때,
바울은 먹어도 되고 안먹어도 되지만 자유하지만
서로 정죄 하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먹고 안먹고 정회하고 하는 좁은 시야에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넓은 시야로 나아갈 것을 말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의 백성이 서로 분열하고 다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서로 정죄하지 말고
좁은 관점의 멍에에서 자유하고
나와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자잘한 문제로 괜히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얻는 일이 방해 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본질적이고 중요한 문제에는 힘을 합하여 합력하고
자잘한 문제에는 목숨을 걸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괜히 형제들 괴롭게 하지 말고 좀 자유롭게 시간을 두고 대처 하자는 것입니다.
영혼구원이 우선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법 이다 라는 것입니다.
할례문제로 하나님의 뜻인 이방전도를 막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비본질적인 것으로 사람이 교회에 오는 것을 막아서는 안된다
다만, 가르칠 것은 가르치면 된다 라는 것입니다.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일단 물에 빠진 사람은 구하자는 것이고
물에 빠져 있다 막 구원 받은 사람들에게 무거운 멍에를 지우지 말자는 것입니다.
신앙에 율법주의가 들어오면 분열을 만들고 정죄가 서로를 상처 줍니다.
사람도 연륜이 쌓이고 성숙하면 부드러워지고 여유로와 지듯이
신앙에는 이렇게 넓고 자유로움이 있어야 합니다
마치, 구세군 군우들이 알코올 중독으로 힘겨워 하는 형제들을 위해 함께 금주 하기로 한 것이 지금의 구세군의 전통이 된 것도 같이
우리는 마실 수도 있고 안 마실 자유도 있지만 형제를 돕기 위해 안먹기로 하면서
감명 받고 힘을 얻은 많은 형제들이 금주를 결심 했던 것은 성숙한 신앙과 자유에 대한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분열의 위기와 이방전도가 막힐뻔한 위기를 성숙한 대처로
잘 넘긴 초대교회는 더 부흥하고 성장 합니다.
성도와 교회의 성숙은 진정한 부흥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결론
결론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성장하고 어떻게 성숙되어지기를 원하실까요?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믿음의 길이와 넓이와 깊이
분열과 다툼이 아닌 일치를 이루고자 힘쓰는 우리의 성품과 믿음의 넓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방인 처럼 우리와 삶의 방식과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까지 포용이 미치는 신앙의 길이 였으면 좋겠습니다
죄인 되어 하나님을 대적 하던 자 까지도 품어 하나님의 사도 삼아주시는 그 사랑의 깊이를 소유 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깊은 데까지 통달하고 이해하고 동참하는 영성의 깊이를 갈망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일치된 복음을 통해 전파 되야 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죄와 가짜종교에서 자유함으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실천함으로 증명 될 것입니다. 모두 함께 기도 하겠습니다.
이 시간 기도하겠습니다 이런 신앙의 경지에 이르고 싶은 갈망을 주시기를 기도하시고
이런 넓고 길고 깊은 신앙, 일치와 자유와 자비와 사랑을 이루기 위해 선한 싸우는 성도들 되게 해달라고 기도 하십시다
모두 일어나 기도 찬양 하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넓으신 은혜,
하나님 아버지의 한량 없는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감화감동 역사하심이 오늘날 주님 안에 온갖 분란과 분열을 잠재우고
사랑으로 일치하고 사랑으로 용납하여
자유를 누리기를 소망하여
선한 싸움 싸우기를 다짐하는
주님의 거룩한 백성 위에 이제로 부터 영원까지 함께 있을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