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아니라 능력 (2)

고린도전서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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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설교>
찬송가 516장 “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을”
고린도전서 4:17-21
“말이 아니라 능력”
2024. 9. 6
조 정 수
할렐루야. 오늘 본문을 놓고 “말이 아니라 능력”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고자 합니다. 수요일 새벽하고 제목이 같은데요. 본래는 수요일 본문하고 오늘 본문을 묶어서 설교를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너무 분량이 많아져서 반으로 나눈 겁니다. 그래서 제목이 같습니다.
자, 어쨌거나 오늘 본문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바울이 아버지로서 고린도교인들에게 다시 한번 더 나를 본받을 것을 권면하는 내용인데요. 지난 시간에는 아버지로서 자녀들에게 자상하게 나를 본받으라고 권면을 했다면, 오늘은 그보다는 엄격하게 책망을 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위에 16절에서 바울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나를 본받으라고 말을 했습니다.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그러면서 오늘 본문 17절에서 그 말을 반복합니다. 17절에 보니까,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 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바울이 고린도에 디모데를 보내겠다고 하는데, 디모데를 보내는 목적이 뭐예요? 내가 가르친 것을 생각나게 하기 위해서, 숙련된 조교인 디모데를 보내서 복습을 시킨다는 것이죠. 나를 본받아야 하는데, 내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했는지, 어떻게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았는지, 교인들이 까먹었을 수 있잖아요. 그래서 디모데가 가서 다시 가르쳐주는 겁니다.
아마도 고린도교인들은 디모데를 이미 알고 있었을 겁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혼자 먼저 도착을 해서 지내고 있디가, 나중에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와서 고린도에서 합류를 했거든요. 그리고 이들이 합력해서 고린도에 교회를 세웠어요. 그러니까 당연히 고린도교인들이 디모데를 잘 알았을 수밖에 없죠.
바울이 직접 가면 좋겠는데, 지금 바울은 에베소에서 하고 있는 사역이 있다보니까 자리를 떠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디모데를 대신 보낸 거예요. 디모데를 보내면서 바울은 나름대로 문제가 잘 해결되리라고 생각했겠죠.
어쨌거나 디모데를 보내서 자기가 가르친 것들을 교인들이 다시 떠올리게 하고, 그 가르침대로 살게 될 것을 기대했습니다.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는 말을 하고, 다시 한번 “내가 너희에게 가르친 것을 생각하라”고 권면하는 겁니다. 표현만 다를 뿐이지, 사실상 나를 본받으라는 말을 반복한 거예요.
그런데 그 뒤에 곧바로 교인들에 대한 책망이 나옵니다. 18절 말씀,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바울의 말투가 아버지가 자녀들을 타이르듯이 자상한 말투에서 갑자기 책망하는 말투로 바뀝니다. ‘너희가 나를 본받는 자가 되어라. 그런데, 너희가 지금 교만하단 말이야.’ 이런 식으로 말투가 바뀌는 거예요.
이것을 두고, 학자들은 아마도 바울이 자상하게 편지를 쓰다가, 갑자기 분이 올라와서 말투가 바뀌게 된 것으로 해석을 합니다. 편지를 쓰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너무 괘씸하고 화가 나는 거죠. 바울이 갑자기 이렇게 화가 나는 이유는, 앞으로 그가 쓸 편지 내용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뒤에 5장에 가서 보면, 음행에 대한 문제가 나오거든요. 그 내용에 대해서 쓸 생각을 하니까 갑자기 화가 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음행 문제는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쓰기 전에 먼저 써서 보냈던 ‘고린도A서’에서 다루었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에 음행 문제가 있다는 것을 듣고, 먼저 편지를 보내서 문제를 해결하도록 했어요. 그런데 전혀 문제가 해결이 안 된 겁니다. 그래서 다시 그 문제에 대해 쓰려고 하니까 화가 날 수밖에 없죠.
그렇게 화가 나서 편지를 쓰는데, 바울은 저들이 음행을 저지르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를 먼저 말합니다. 바로 ‘교만’이에요. 여기서 교만은 헬라어로 “퓌시오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바람을 넣어 부풀리다” 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교인들이 마치 풍선에 바람이 든 것처럼 자기 자신을 부풀리고 자랑하고 있다는 겁니다. 속은 엉망인데, 겉만 번드르르하게 치장을 하면서, 그것이 진리인 것처럼 자랑하는 겁니다.
바울은 절대로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거든요. 바울은 겉사람이 중요한 게 아니라, 속사람이 중요하다고 가르쳤어요. 나중에 고린도후서 4장에 가면 이것을 다시 가르칩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인데요.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아멘.
겉사람은 낡아져요. 하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겉사람이 뭐가 중요합니까? 속사람이 중요하죠. 그 사람의 내면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이것이 중요한 거예요.
그런데 지금 고린도교회가 반대로 가고 있어요. 속사람은 내팽개치고, 겉사람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지식이 많은지, 얼마나 말을 잘하는지, 얼마나 권위가 있는지, 이런 보여지는 것들에만 관심이 있다는 겁니다.
한편으로, 바울은 저들이 겉사람에 집중을 하면서 교만하여진 이유가 무엇인가를 알았습니다. 18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교만하여졌다고 했죠. 저들이 교만해진 이유는, 바울이 고린도에 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을 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만약에 바울이 오면, 그 앞에서 한마디도 못할 사람들이, 바울이 없으니까 활개를 쳐요. 심지어 바울이 고린도에 다시는 오지 않을 걸로 생각을 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교회를 휘젓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인 전체가 다 그런다는 것은 아니에요. 18절 앞에 있는 “어떤 이들”이 그러고 있는 거예요. 어떤 이들. 이 사람들이 바로 바울을 반대하고, 바울이 돌아오지 않을 것으로 여기고, 교만하게 행동하는 자들이겠죠.
바울은 그래서 저들이 깜짝 놀랄 만한 말을 하는데요. 바로, 내가 너희에게 가겠다는 말입니다. 그게 19절이에요. 19절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아멘.
바울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주께서 허락만 하시면, 속히 고린도로 가겠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너희 교만한 자들의 능력을 알아보겠다고 말해요. 너희가 말만 번드르르한지, 아니면 정말 너희가 말하는 것처럼 너희에게 능력이 있는지, 내가 가서 보겠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바로 뒤에 20절에서 굉장히 중요한 말을 합니다. 자, 20절도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아멘.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에 있어요? 오직 능력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곧 구원이거든요. 그러니까 구원은 말만 한다고 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서 얻는 것이라는 말이에요.
마태복음 7장 21절에 보면, 예수님이 이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아멘.
천국은 주여 주여 말만 하는 자가 들어가는 곳이 아니에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가는 곳입니다. 여러분, 능력은 곧 실천하는 힘입니다. 말만 번드르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말한 그대로 살아내는 거예요. 말씀대로 사는 게 너무나도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아내도록 만드는 힘, 이것이 바로 능력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가서 바로 이것을 따져보겠다는 겁니다. 너희가 말만 하는 사람들인지, 아니면 말한 그대로 살아내는 사람들인지, 내가 가서 보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냥 가지 않고, 양손에 뭘 들고 가겠다고 말해요. 마지막 21절인데요. 21절도 같이 읽습니다. 시작,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아멘.
바울이 한 손에는 매, 한 손에는 사랑과 온유한 마음을 들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무엇을 들고 갈지를 너희가 선택하라고 말하고 있어요. 내가 뭘 들고 갈까? 매를 들고 갈까? 가서 빠따 좀 때릴까? 아니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갈까?
이것을 선택하는 것은 바울이 아니라 교인들입니다. 저들이 하기에 달린 거예요. 아버지가 자녀를 양육할 때, 자녀가 잘못하면 매를 때리고, 잘하면 칭찬을 하듯이, 교인들이 고린도전서를 받아보고도 고쳐지지 않으면, 바울이 매를 들고 갈 것이고, 고쳐지면 사랑과 온유한 마음을 들고 갈 겁니다.
주사위는 던져졌어요.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지, 바울도 모릅니다. 바울이 바라기는, 디모데가 이 편지를 들고 가서 문제가 잘 해결되고, 교회가 잘 봉합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버지라고 해서 매를 때리는 게 좋겠어요? 끌어안고, 잘했다고, 고생했다고 다둑거리고 싶죠. 바울이 그런 마음이에요.
내가 매가 아니라, 사랑과 온유한 마음을 들고 가고 싶다. 마음껏 웃으면서 교제하고 싶다. 그런데 이런 마음이 바울만이 아니라, 오늘날에 우리들도 동일하게 갖고 있는 마음이에요. 자녀를 양육하는데 있어서, 힘이 들잖아요. 저도 딸 하나 키우는데 참 힘이 듭니다. 세 살밖에 안 됐는데, 말을 잘해요. 그래서 굉장히 교만합니다.
세 살짜리가 교만해요. 뭐든지 내꺼. 뭐든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 되고, 아빠가 뭐라고 하면 빽 소리를 지르고, 아빠 밉다고 그러고. 여러분, 이게 교만이에요. 별거 아닌 거 같지만, 내가 중심이 되어서, 내가 하고싶은 말을 하고, 내가 하고싶은 행동을 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물론 세 살짜리는 충분히 그럴 수 있어요. 정상적인 정서발달 과정입니다. 그러나 성인이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서 바울이 책망했던 것처럼, 여전히 젖을 먹는 어린 아이와 같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내가 하고싶은 말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말을 하고, 내가 하고싶은 행동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행동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여 주여 말만 하는 삶이 아니라, 나의 삶으로 실천하며 살아내는, 능력의 삶을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오시는 그 날에, 매가 아니라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우리를 품에 안으시고, 의의 면류관을 씌워주시는 영광된 그 날을 기대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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