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불행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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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명절입니다. 어떤 명절인지를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이 요한복음이 이방인을 위한 복음서이어서 이 이야기에서 굳이 유대명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굳이 밝힐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명절날 있었던 이 사건자체가 중요하지 어떤 명절인지가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예루살렘에 명절때가 되면 200만명의 유대인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약 25만마리의 짐승이 재물로 드려졌구요 . 말이 25만이지 엄청난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인산 인해, 가는 곳마다 피 비린내가 진동하는 때가 바로 이 유대인의 명절 절기였습니다. 예수님도 명절을 지키기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가기위해 양문이라고 하는 문을 지나가야 하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수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중에 한 사람에게 다가가 말을 거셨습니다. 그중에 가장 비참해 보이는 한 사람, 일어서지도 못하고 누워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 38년동안 그러고 있었으니 몸 자체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그런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거셨습니다.
낮고 싶으냐? 물어 무엇하겠습니까? 마는 주님은 그럼에도 물으십니다.
이유는 그의 삶의 시선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지난 38년의 설움과 아픔을 끄집어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괴로움을 바라보는 그의 삶이 시선을 확인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는 자신에게 그처럼 질문을 해준 사람도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라도 질문해주는 예수님이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다소 생뚱맞은 대답처럼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그가 왜 지금까지 낫지 못하고 이렇게 우물곁에 맴돌고 있는지 그 이유를 말합니다. 물이 동할때 나를 연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서 이렇게 낫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이 동한다는 전설이 있었던 거 같습니다. 말그대로 전설이지요.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저을때가 있는데 그 때 그 물에 들어가면 어떤 병이든 낫는다. 참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이보다는 차라리 복권이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복권은 확률이 희박해서 그렇지 그래도 매주 당첨자들이 확실하게 나오니까요.
복권 당첨 확률이 번개맞을 확률이라고 하지요? 번개맞을 확률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또 실제로 뉴스같은것을 보면 번개맞은 사람들이 가끔 나옵니다. 복권도 그렇지요. 확률이 극히 희박한대도 확실한 것은 매주 당첨자가 나오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허망한줄 알면서도 그래도 만에 하나 , 만에 하나라도 당첨될수 있다는 정말 송곳같은 희망이 있기에 사람들은 복권을 삽니다. 그만큼 희망이 안보이는다는 뜻입니다. 삶을 역전시킬 희망이 다른데는 보이지 않으니 헛돈을 쓰는지를 알면서도 사람들이 복권을 사는것처럼 , 이 38년된 병자역시 그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이야기인줄 알면서도 그거라도 희망삼아야 하겠기에 양문곀을 맴도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더하여 이 사람에게는 불행의 돌덩어리 하나가 더 그의 어깨위에 올려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설령 물이 동한다 하더라도 자기를 그 연못까지 데려다 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실상 이 사람은 거기에 있을이유가 없습니다.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그의 상황을 보고 조언한다면 , 당신은 여기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라고 말해주어야 할 그런 사람입니다. 물이 동하는 것도 전설과 같은 이야기요. 거기다가 설령 그런 순간이 온다해도 그 연못에 들어갈수가 확실하게 없는 사람이니 , 그곳에 있을이유가 없는 사람인것이 확실하지 않습니까? 마치 복권확률이 희박한데, 그나마 복권을 사는 이유는 그래도 그 희박한 희망이라도 있으니 사는 것인데 문제는 그 당첨된 복권을 은행에 가져가 갈 방법이 없는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그 복권을 사야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38년을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불행의 이유를 물이 동하지않은 것과 또 물이 동할때 자신을 데려다 줄 사람이 없는 것으로 그 이유를 삼으며 자신의 불행을 곱씹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물이 동하지 않는 것이나 그 연못으로 데려다 줄 사람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지요. 걸을수도 움직일수도 없는 자신의 형편 자체가 문제라면 문제이고 불행이라면 불행이지요 여기서부터 문제 해결의 답을 찾아야 했는데 그는 지금 엉뚱한 곳에서 문제의 답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계속해서 답이 될수없는 것들을 바라보면서 그 답이 없어서 자신은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 사람을 찾아갔을까요? 그것은 이 사람은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셈플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 연못을 넘어 성전을 드나드는 예루살렘에 명절을 지키러 온 100만명이 넘는 모든 사람들이 사실은 이 38년된 병자와 같은 상황임을 말씀해주시기 위해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38년된 병자로 태어난것 자체가 불행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죄인의 자리에서 살아가는것 자체가 불행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릅니다. 자꾸 이유를 다른데 둘려고 합니다. 내가 돈이 없어서, 내가 성공을 못해서, 내가 인기가 없어서, 내 부모가 내 자녀가 자랑스럽지 못해서… 이런 저런 이유를 다 말하지만 결론은 나는 행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는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조금만 더 돈이 있으면, 내가 조금만 더 성공하면, 내가 조금만 더 이 지역에서 인정받는다면 나는 분명 행복해질거라 여기면서 불행의 연못근처에서 서성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들의 삶의 현실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이 38년된 병자의 모습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병자를 치료해주시는 분이 주님 한분이셨습니다. 8절 9절입니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안식일이라는 단어와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에게 자신의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 명령하실수 있는 분, 그리고 그 명령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그를 일으켜 세울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 한분이셨습니다.
그를 진정으로 고쳐줄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 한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 사람에게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 명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것은 안식일을 범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안식일날 어떤 물건이나 짐을 들거나 옮기는 것은 다 일로 취급되는 상황에서 이 사람이 자리를 들고 일어난 것은 명백히 안식일의 규정을 위반 한것이었습니다.
본문 요 5:10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예수님은 그 사람은 그냥 고쳐주신 것이 아닙니다. 전능자이니까 메시야이니까 그냥 마술사가 마술을 부리듯 그냥 질병아 나아가 라고 낫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 사람은 자신의 목숨값을 지불하고 고쳐주신 것입니다.
제가 좀전에 38년된 병자는 모든 인간 군상들의 대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절대 절망의 인간의 상태를 고쳐주실분은 오직 예수님 한분 뿐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어떻게 그분이 그렇게 영혼이 병들고 인생이 병든 이들을 고쳐주실수 있으십니까? 능력으로 ? 권능으로?아닙니다. 자신의 생명으로입니다 , 자신의 죽음으로 입니다.
저는 이 38년된 병자가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어떻게 일어났을까 생각해봅니다. 지금 이 사람은 주님에 대한믿음이 없습니다. 시선이 전혀 다른 곳에 꽂혀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가 믿음이 있어서 믿음으로 반응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이 그를 반 강제로 일으켜 세운 것입니다 놀래서든지요..
우리가 받은 구원이 그와 같습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예수님을 알고 믿은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그 시간에 주님은 이미 우리를성도로 택하시고 그분의 때에 그분의 방법으로 우리를 불러 내신 것입니다. 무엇으로 말입니까?그분의 죽음으로 말입니다.
이에 대해서 성경 롬 5:8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분의 죽으심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사마리아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다까? 그분의 죽으심을 바라볼때입니다. 그분의 죽으심을 나의 사건으로 바라볼때 우리는 목마름에서 비로소 해갈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계속해서 목마르고 세상사람들과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사는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생수를 주지 않으셔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죽으심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여인의 행복을 향한 목마름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셨고, 본문의 38년된 병자를 고치시기 위해서 주님은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시비를 거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손에 율법의 손에, 법의 심판의 잣대에 일부러 자신을 죄의 모양으로 비추셔서 체포당하고 기소 당하고 선고당하고 집행당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러셨습니다.
이것이 오늘도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 주님의 사랑이 이 병자를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성도님들 우리가 주님앞에서 정직하게 주님 저 불행헤요 저 죄인이에요 이렇게 말하면 우리는 주님을 만날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