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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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초청
마 11:28-30
가을입니다. 가을은 초대의 계절입니다.
청첩장이 날라 올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초청을 받는 것이 즐겁습니까? 그럴 분도 계시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짐스럽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여름내 땀흘려 추수한 것을 가지고 부조를 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떤 집에서 자녀를 혼인시킨다고 하면 어떤 사람은 국수 한 뭉치, 어떤 사람은 계란 한 줄 가지고 가서 진심으로 축하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서로 주고받는 것이지만 무거운 짐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우리 주님께서도 많은 사람들을 초청하시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런데 우리 주님의 초청은 짐스러운 초청이 아니라 참으로 은혜로운 초청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주님의 초청이 은혜로운 초청일까요? 주님의 초청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값없이 돈 없이 좋은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요, 영혼이 사는 초청이기 때문입니다.
사 55:1-3절에 보면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초청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주님은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들을 초청하십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초청은 은혜로운 초청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주님의 초청이 왜 은혜로운 것인지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1. 초청의 대상 때문입니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을 초청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수고라는 낱말이 가장 먼저 나온 데가 어디입니까?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창 3:16-17)에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인간이 범죄한 결과 여자와 남자에게 똑 같은 수고의 형벌이 주어졌습니다. 여인은 잉태의 고통과 해산의 수고가, 남자에게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먹고 살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만약에 인간이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우리 자매님들이 아이를 낳으실 때 아주 유쾌하게 기분 좋게 지금부터 아이를 낳자, "원, 투, 쓰리……" 그리고 유쾌하게 출산을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범죄한 대가로 잉태의 고통과 해산의 수고를 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하셨습니다.
옛날 어머니들은 아이를 낳으러 방에 들어가실 때 신발을 거꾸로 놓고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이를 낳다가 죽은 어머니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요즘도 아이를 낳다가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 아내가 20년 전 큰 아이를 낳는 모습을 보고서야 어머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장가가서 자식을 낳아봐야 부모의 은혜를 깨닫는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디다.
왜 이런 수고로움이 찾아왔습니까? 죄 때문입니다. 그뿐입니까? 남자에게도 동일한 형벌이 선고되었습니다. 남자들도 종신토록 땀을 흘리며 수고해야 그 열매를 먹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수고는 단순한 노동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고통스러운 노동을 말합니다. 성경은 노동의 가치를 귀하게 평가합니다. 노동은 타락 전에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 창조한 에덴의 동산 안에서 처음 사람들은 경작하며 일하며 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노동이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죄가 왔을 때 타락이 왔을 때 달라진 것이 뭐냐 하면 즐거워야 할 노동이 고통스러운 노동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토스토엡스키는 그의 작품의 주인공의 입술을 빌려서 자주 이런 말을 되풀이합니다. "죄인에게는 산다는 그 자체가 힘들고 버거운 일이다." 따라서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안식은 없습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자유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죄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을까요?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예언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질고라는 말은 질병, 고통 이런 의미들을 다 내포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가 즉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질고, 우리의 질병,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짊어지고 우리에게는 치유와 안식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없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질고가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질병의 무거운 짐 아래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 근본적인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죄 때문입니다.
`수고하고`(호이 코피온테스)라는 현재 분사 능동형입니다. 이는 스스로 많은 일을 하여 계속해서 피곤에 지친 상태를 말합니다. `무거운 짐진 자`(페포르티스메노이)라는 말도 현재 분사 수동형입니다. 이 말은 타인에 의해 무거운 짐을 진 채 계속해서 지쳐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지금 현재 계속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또는 타의에 의해서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많은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습니다.
(마 23:2-4)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이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신 그 메시아가 오셔서 "오라 내게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라고 초청하십니다. 이 얼마나 은혜로운 초청입니까?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죄악의 무거운 짐 밑에서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까? 질병의 짐을 지고 고통을 당하십니까? 은혜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다 내게로 오라" 고 부르십니다. 지금 주님께로 오십시오. 거기만 살 길이 있습니다.
2. 초청의 범위 때문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주님의 초청의 범위는 광대합니다.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칼빈 선생님도 `다`라는 말에 유의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초청은 결코 편협하시지 않습니다.
사 45:22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요 7:37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계 22: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 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그러나 어떤 사람이 주님께로 옵니까?
요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아버지께서 주님께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 내게로 오라"이것은 주님의 권위적이면서도 친절한 초청입니다. 불교에서는 인생을 고(苦)로 보고 그 원인을 無明(무명)으로 규정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깨달음으로 이 고에서 해방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한 데서,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떠나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데서 모든 인생의 苦(고)가 생겼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돌아와 끊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함으로 죄의 용서함을 받고, 따라서 진정한 마음의 평안이 있게 되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오라"고 초청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죄인들을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1장 18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죄의 용서함을 받는 길은 하나님께 나아오는 길뿐입니다. 누구든지 오기만 하면, 그래서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나는 죄인입니다"하는 고백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 죄를 인정하지 않는 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주님 앞에 나와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자백하기만 하면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죄가 많다고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버지를 멀리 떠났던 탕자도 아버지께 돌아왔을 때 죄를 사해 주셨고, 두 팔 벌려 환영해 주셨고, 아들의 권리를 회복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께 오는 것으로 여러 가지 축복을 많이 받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도 가장 큰 축복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것은 죄 사함 받는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축복이 됩니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죄가 우리에게 있을 때에는 하나님이 두렵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죄를 범한 사람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값은 반드시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네 죄가 반드시 너를 찾아 만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깨닫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나아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심으로 누구든지 죄사함 받을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제 그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은 "다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셨습니다.
요한복음 7장 3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여러 해 전에 미국 서부 사막 지대에 사는 미국 원주민이 뉴욕시의 초청을 받았습니다. 며칠 동안을 뉴욕에서 지내며 여기 저기를 구경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뉴욕에서 며칠 동안 지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때 그 원주민이 수도꼭지 옆으로 가서 수도꼭지를 틀면서 "원하면 이렇게 언제나 물을 구할 수 있는 것이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빌딩이 아니고, 거리를 메운 자동차가 아니고, 호화찬란한 의복이나 구미를 돋우는 음식이 아니라 언제나 원하면 마실 수 있는 물이 사막에 사는 인디언에게는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이것이 목마름을 뼈저리게 당하고 있는 사람의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다 오라`고 초청하셨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일부 계층만 초청하셨다면 결코 은혜로운 초청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은 다 올 수 있도록 문호를 활짝 개방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선진국을 방문하려면 절차가 매우 복잡합니다. 대사관에 가서 인터뷰를 해야 하고 거기에서 합격을 해야 방문 비자를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몇 년 전 미국 비자를 발급 받으러 미국 대사관에 갔을 때 울화통이 터졌습니다. 수위가 한국 사람인데 마치 자기가 미국 사람인 것처럼 목에 힘을 주고 못 들어가게 합디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천국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다 오라`고 초청하고 계십니다.
3. 초청의 목적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초청하신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이 주시기 원하시는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안식입니다. 주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안식은 어떤 것입니까? 마음이 쉼을 얻는 것입니다. 영혼이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려고 했던 최고의 은혜가 안식이었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이 일 하시고 창조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2장은 안식의 장입니다. 창세기 1장은 엿새동안 하나님이 빛을 만드시고, 궁창을 만드시고, 육지와 바다를 만드시고,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시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를 만드시고, 짐승을 만들고, 사람을 만드시며 하나님이 계속 일하셨습니다. 그리고 일이 끝났습니다.
그러면 인간의 역사는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까? 창세기 2장부터 인간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안식의 시작이 역사의 시작이며, 인간의 시작이며, 축복의 시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일을 주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안식을 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의 비밀이고 창조의 신비입니다.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완성하신 후에 안식에 들어갑니다. 천지만물을 만드는 일은 하나님의 혼자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안식하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건물을 세우거나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안식을 얻는 일입니다. 여기에 행복이 있고 자유가 있고, 평화가 있고, 은혜가 있습니다.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안식을 얻고 누리는 것입니다.
안식은 창조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시던 일곱째 날에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 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 2:1) 그러므로 일곱째 날은 일주일에 하루가 아니라 창조가 완성된 날이요, 안식에 이른 날입니다. 천지창조의 매일매일은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는(창 1:5, 8, 13, 19, 23, 31) 하루하루로 끝맺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은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는 이라는 말이 없습니다(창2:2). 그러므로 안식일은 천지창조의 하루가 아니요 영원히 계속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인간의 영원한 날로 약속되어 있습니다.
창조의 안식일은 어느 한 날이 아니요, 영원한 날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영원한 날입니다. "하나님은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의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라"(창 2:3).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 날을 복된 날이라 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안식에 초청되어 안식에 참여하였으니 최고의 은혜를 받아 살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안식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고 이 안식을 잃어버린 것이 저주요, 불행입니다. 안식을 잃은 것이 죄입니다.
죄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등진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을 반역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 죄인데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안식을 잃어버렸고 하나님의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요, 불행이요, 인간의 심판입니다. 이것을 회복시키려고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최대의 불행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안식을 잃은 데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인간은 안식을 잃은 것입니다. 에덴에서 추방당한 인간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가 단절되었고 안식을 잃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덴을 잃은 것은 안식을 잃은 것이요, 안식을 잃은 것은 행복을 잃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생과 안식은 일치하며 안식 없는 영생은 더 큰 저주가 됩니다. 천국은 안식하는 곳이요, 지옥은 안식을 빼앗긴 곳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영원한 안식)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영원한 고통)로 나오리라"(요5:29) 하셨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그 내용에 있어서 안식이 있느냐 없느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결국 인간의 모든 불행은 안식을 잃은 것입니다.
이제 인간은 이 세계 어디를 가도 안식을 얻을 곳은 없습니다. 안식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하나님께서 안식을 거두셨기에 하나님이 안식을 주시기까지는 안식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내가 주안에서 안식을 얻기까지는 내 영혼은 안식을 얻지 못했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안식을 잃은 인간은 이 세상 무엇으로도 안식을 얻지 못하고 만족하지 못한 채 쉼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안식을 회복하여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주님은 주님의 멍에를 메고 안식을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 땅에 가면 짐승들이 멍에를 메고 밭을 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집에서 멍에를 만드는 일을 하셨습니다. 삼십년 동안 목수 요셉의 집에서 살았고 목수 일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목수의 집에서 태어나시고 목수 일을 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짐승들의 멍에를 만들어 갔습니다. 예수님은 멍에를 잘 만드는 기술자였습니다. 예수님은 멍에를 꼭 맞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만약 멍에가 안 맞으면 짐승을 일하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멍에가 잘 맞으면 밭도 잘 갈고 짐도 잘 나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창세 전에는 천지를 설계하시고 창조한 목수였습니다. 이 땅에 오셔서는 친히 인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의 멍에를 만들어 메셨습니다. 또 승천하셔서는 처소를 예비하시러 하늘나라에 가셔서 집을 지으시는 목수이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멍에를 꼭 맞게 만들어 주시는 목수이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배우라 그러면 쉼을 얻으리니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 하였습니다. `내 멍에가 쉽다`는 것은 꼭 맞는다는 뜻입니다. 꼭 맞으면 짐이 쉬어집니다. 주님이 주시는 멍에는 쉽습니다. 이 말은 좋고, 유익하고 감사할 만한 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왜 쉽습니까? 주님과 같이 메기 때문이요, 사랑으로 메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은 "이 짐은 지는 자에게 무거운 짐이 아니라 날을 수 있는 날개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들에게 은혜로운 초청을 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께로 나오십시오. 주님께 당신의 모든 짐을 맡기십시오. 주님이 주시는 멍에를 메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에 안식이 찾아올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좋은 것인 참된 안식을 누리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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