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2장

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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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계획대로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의 권면을 받아들였다. 나실인의 서약을 마친 독실한 예루살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비용을 지불했다. 나실인의 비용을 낸 사람은 경건한 사람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나실인 결례의 7일이 지날 무렵 어떤 유대인들이 바울을 보고 소동을 일으켰다. 바울이 이방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왔다는 것이다. 오해에서 비롯된 이 소동에서 유대인들은 바울을 돌로 쳐 죽이려고 했다. 바울은 로마 군대로 인해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그리고 22장에서 자신을 죽이려는 유대인 무리에게 변명, 간증하고 있다.
바울의 간증은 3-16절의 회심 사건에 대한 회고와 17-21절에 이방인 전도 사명에 대한 언급으로 이루어져 있다.
1절에 바울 사도는 ‘부형들아’라는 말로 간증을 시작한다. 이 단어가 특별한데 성경 전체에서 이 단어를 사용한 곳은 여기를 제외하곤 스데반의 설교뿐이다.
행 7:2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
스데반이 설교를 시작할 때 사용한 이 단어를 사도 바울이 쓴 데는 의미가 있다. 부형들이여는 영어로는 ‘Brothers and Fathers’이다. 대상은 모두 유대인이다. 스데반과 바울이 같은 대상을 향한 같은 마음으로 설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의 말을 듣던 유대인들은 스데반을 대적하는 자들이었다. 스데반에게 악한 감정을 가지고 거짓 증인 세워 고소하였다. 스데반은 누명을 쓰고 유대 종교 법정에 섰다. 그런데 스데반은 유대인들에게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라고 말한다. 그의 말에는 분노와 억울함이 없다. 오히려 유대인을 향한 사랑이 담겨 있다. 스데반의 마음은 스데반에 돌을 던져 죽이는 유대인들을 향한 마지막 말에 강렬하게 나타난다.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도 바울과 같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에 고소를 당하고 많은 유대인이 바울을 죽이려고 때리면서 로마 군대에 의해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런데 지금 유대인들을 향해 부형들아라고 부른다. 바울 사도는 자신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을 향한 분노와 억울함이 없다. 오히려 그들을 향한 사랑이 가득하다. 바울 사도의 말이 중간에 중단되었기에 민족을 향한 그의 마음이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지만 바울 사도는 다른 서신에서 자신의 마음을 말했다.
롬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또한 스데반과 사도 바울의 설교에 공통점이 있다. 자신이 고소당한 내용에 대한 변명이 없다는 것이다. 스데반은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했다, 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했다는 죄목으로 고소를 당했지만, 그것에 대해 변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대인들이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했고 설교했다.
바울 사도도 이방인을 성전에 들여 성전을 더럽혔다는 죄목으로 고소를 당하였다. 이에 대해 변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했다.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증언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증언했다. 유대인들도 예수님을 알고 회심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자존심이나 분노는 없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누가 나를 죽이려고 한다면. 아니 그 정도도 아니고 면전에서 욕하기만 해도 마음이 편치 않다. 그를 품고 기도하기가 힘들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스데반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어떻게 증오에 악이 받혀 자기를 죽이는 이들을 용서하고 기도할 수 있었을까?
요즘 하나님께서 은혜로 나의 내면을 비추어 주셨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나를 위한 일인 것을 보게 되었다. 평소에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어떤 계기 없이 내가 하는 일들을 돌아보게 되었고, 모든 일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일이 나를 위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내가 가장 순수한 의도로 했던 것조차도 나를 위함이라는 자기 중심성을 빼놓을 수 없었다. 나의 삶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를 보게 하셨다. 하나님 앞에 절대로 의를 말할 수 없다. 나는 죄인이구나, 예수님의 의를 의지할 수밖에 없구나. 내 안에 이 죄악을 어찌할 수 없구나. 죄악의 크기와 끝이 가늠되지 않는 이 죄를 없앨 수가 없구나. 생명의 성령의 법. 성령을 따르는 것, 그것밖에 답이 없구나. 그렇게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사도 바울과 스데반 집사를 보면서, 그렇게 쉽게 결론 낼 수 없는 일인 것을 알았다. 그저 패배자와 같이 어쩔 수 없지. 하나님이 해주시겠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했던 것처럼, 그렇게 자기를 죽이기 위해 힘써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자기중심성이 너무 분명하게 살아있으니, 나에게 해를 끼치는 상황이나 사람을 견디기 힘든 것이다. 사랑해야 하는데, 진정 감사해야 하는데, 오히려 공격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내가 제일 중요하니까. 여기서 벗어나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 사도 바울처럼 ‘나는 날마다 죽으라’ 그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같은 주님을 섬기고 있다. 같은 믿음을 받았다. 같은 삶을 살아야 하지 않는가. 여러분은 스데반처럼, 사도 바울처럼 살고 싶은 마음이 있는가? 외적인 삶의 형태가 비슷한 것이 아니라 그들과 같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 말이다. 진정으로 축복하고, 진정으로 예수님을 위해 헌신하고, 전심으로 사랑하는 그런 삶 말이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하는 믿는 자의 삶 말이다. 너무 멋있어 보인다.
천국에서는 어떤 것보다 더 멋있는 삶으로 인정될 것이다. 천국의 주인인 예수님을 닮은 삶이니 말이다. 어제 말씀을 가까이하는 것에 대해 말했다. 그것이 목적지가 아니다. 말씀 가까이하고, 많이 읽고, 읊조리고, 기도하고, 매 순간 기도하고, 그것의 목적지는 예수님을 닮는 것이다. 스데반처럼, 사도 바울처럼, 그렇게 사랑으로 넘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 말을 하는 나는 너무 부족하다. 너무 먼 이야기 같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여주셨으니 가야겠다. 처음 예수님을 따르기를 결단했을 때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르듯이, 포기하지 않으면 죽을 때쯤에는 비슷해지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지금의 신앙생활에 만족하지 마시라. 예수님을 믿는 삶은 이 정도가 아니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세상이 이해할 수도 없고, 이길 수도 없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 삶을 살아가기를 결단하고 달려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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