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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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제가 인터넷에서 본 글 중에 기억이 남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젊은 시절을 평가하는 기준은 나이가 먹고 나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글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자신이 나이가 먹고 괜찮게 살고 있으면 어떤 과거도 좋은 과거가 됩니다. 공부 밖에 모르고 살았다면 그것은 미래를 위해 열정을 다한 삶이 되는 것이고, 열심히 놀았더라면 젊은 날을 즐겼던 삶이 되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고생고생을 했더라도 그 시간을 통해 내가 성장하고 이겨냈던 자랑스러운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자신이 나이가 먹고 상황이 좋지 않으면 다를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공부 밖에 몰랐던 삶은 젊은 날에 즐길 것을 다 놓쳐버린 삶이 되고, 열심히 놀았다면 시간을 낭비한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고생고생까지 했다면 자신의 삶은 일평생 고생뿐인 불행한 삶이 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100%로 맞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동의가 되는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동의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결과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결과가 좋다면 그 과정도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도 비슷한 이야기를 말합니다. 그 결과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성경에선 열매라고 말합니다. 물론 성경이 말하는 열매는 제가 오늘 말한 세상의 결과와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결과는 부와 명예, 환경의 편안함 같은 육의 열매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결과는 사랑, 희락, 화평과 같은 영적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맺어야 할 영적 열매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
○ 육체의 행위와 대비되는 성령의 열매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성령의 열매는 육체의 행위와 대비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성령의 열매 ‘호 카르포스 투 프뉴마토스’는 앞선 19-21의 악한 육체의 행위 ‘타 에르가 테스 사르코스’와 대조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성령의 열매가 인간의 노력과 의지로 이루는 성취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육체의 행위와 다르게 성령님이 일하시는 결과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착하고 발전되고 더 나은 인간이 되어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 끊임없이 기도로 의지하는 것으로 열매를 맺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기도만하면 성령님이 자동으로 이루어주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6:8을 보겠습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이는 육체의 행위와 성령의 열매 모두 심고 거두는 과정이 같다는 것입니다. 즉,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우리는 노력하고 애써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요약하면 “매일 기도로 성령님에게 힘을 달라고 애쓰고 직접 말씀대로 살기를 힘써야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니 항상 겸손하고 감사해야 한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열매가 천국을 가는 조건, 혹은 죄가 없는 정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는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열매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지만 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연스럽게 가져야할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고 자랑할 일이 아니라 못 맺는게 이상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기억할 것은 성령의 열매는 하나만 맺는 것이 없습니다. 앞서 말한 육체의 일에서 일인 사르가는 복수입니다. 육체의 일에서 무엇은 할 수 있고 무엇은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열매에서 열매 카르포스는 단수입니다. 즉, 성령의 열매는 여러개가 아니라 9가지가 모두 하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사는 사람마다 가진게 다르지만 성령의 열매는 다릅니다. 성령의 열매는 모든 사람이 9가지 모두 맺어야 합니다.
○ 사랑(ἀγάπη)
그렇다면 가장 먼저 성령의 열매에서 사랑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기록된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여러분도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육체적인 사랑 ‘에로스’, 우정과 같은 사랑 ‘필리아’,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 이런 식으로 들어봤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은 어느 정도만 맞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선 하나님의 사랑도 아가페, 인간의 사랑도 아가페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을 우리가 실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성경에서 생각하는 모든 사랑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땅에 오신 것과 행하신 것,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의 열매로서 사랑은 곧 예수님이 사랑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의 실천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오늘 본문인 갈라디아서 5:13-14에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그렇습니다. 내 주변 사람들을 나와 같이 아끼면서 종과 같이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한 번 적어봅시다. 내가 예수님처럼 해야할 일이 무엇일까?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해서 내가 희생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 내가 어디서, 언제, 누구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적어봐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은 모든 성령의 열매의 중심입니다. 우리가 찬양했지요?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이것은 사랑이 성령의 열매 나머지 8가지를 모두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성령의 열매는 사랑을 포함하고 있어야 합니다.
○ 희락(χαρά)
두 번째로 카라 희락입니다. 일반적으로 갈라디아서가 기록될 당시 로마에선 희락은 행복을 의미합니다. 행복한 환경이나 상황 속에서 행복의 마음을 찾는 것 등 세상이 말하는 행복과 유사한 개념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희락은 그 의미가 다릅니다. 성경에서 희락은 하나님께로부터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 중에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기쁨, 행복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들과 의의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한 조건들로 인한 행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건강해서, 내가 돈이 많아서, 내가 잘생기고 이뻐서, 내가 인기가 많아서, 내가 사는 집이 좋아서 등이 아닙니다. 비록 고난 속에 있지만 기뻐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을 기대하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즉, 성경이 말하는 희락, 기쁨이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서, 미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상급을 기다리며 기뻐하는 소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 화평(εἰρήνη)
화평, 에이레네는 관계의 평안함을 가리킵니다. 즉, 누구와도 갈등을 맺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성경에서 말하는 화평은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죄를 지으며 대적하는 심판 받아야할 입장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힘 입어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다른 사람들과의 화평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화평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화평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거하여 우리의 관계 속에서 역사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평화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언 6:19에선 형제 간에 불화를 심는 것을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가증히 여기시는 일이라 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화평은 가정, 교회, 세상, 유대인과 이방인 등 서로간의 평화를 이루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평화를 이루는 것과 서로를 세우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마태복음 5:9의 예수님의 축복을 받는 길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노력해서 평안한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할 사람들을 적어봅시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우리, 사람과 사람을 화해시키신 것처럼 내가 화해시키기 위해 애쓸 것을 적어봅시다. 내가 다른 사람과 화평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처럼 내가 있는 직장, 교회를 화평하게 할 노력을 적어봅시다.
우리는 믿음, 소망, 사랑을 자주 이야기합니다. 그런 것처럼 사랑, 희락, 화평은 자주 묶여서 이야기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을 보시면 예수님은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평화’를 주시고, ‘예수님의 사랑’안에 거하기를 바라시며, ‘예수님의 기쁨’을 알기 원하십니다.
○ 오래 참음(μακροθυμία)
오래 참음, 마크로뒤미아는 박해나 화나게 하는 일에서 “확고함”, “인고” 등의 의미를 가집니다. 이 단어 역시 하나님의 속성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이 자신들의 백성들에 대한 태도로서 사용되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화를 더디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믿는 자들을 기다려주는 것도 의미하고, 회개하지 않은 자들에 대한 심판을 연기하는 것도 의미합니다.
이것이 사람에게 사용되었을 때는 ‘화냄이나 보복이 없이 잘못에 대해 끈기 있게 견딘다’는 의미입니다. 즉, 서로의 잘못에 대해 화내지 않고 복수하지 않고 회개를 기다려 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내가 화를 내거나 잘못에 대해 무엇인가 복수나 대가를 받으려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화내는 것과 보복을 할부로 나눠서 행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에 대한 심판을 연기하고 믿는 자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것처럼 우리도 오래참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내가 오래 참아야 할 사람을 적어봅시다. 그리고 내가 참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 참고 있다면서 화를 내거나 참는 대가를 받으려고 하고 있는지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이를 적어보고 나를 돌아봅시다.
○ 자비(χρηστότης)
자비, 크레스토테스는 친절하고 너그럽게 대함을 의미합니다. 자비 역시 하나님의 속성으로 우리를 인자하게 대해주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는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고, 죄의 값을 갚을 수 있는 능력도 없는 자입니다. 그런 우리를 용서하시고 친절하게 대해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비유하자면 여러분의 전재산을 불질러버린 사람을 데려왔는데 그 사람이 갚을 능력도 없는 노숙자지만 그 사람에게 친절히 너그럽게 대해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비는 로마서 2:4을 보면 죄인을 회개로 이끌기 위함이고, 로마서 11:22을 보면 믿는 자들을 인자하심 아래 머물러 있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렇기에 자비란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을 본받고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용서받고 친절히 대우 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을 대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6:35에는 이러한 자비를 본받는 자에게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될 것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비롭게 대할 사람을 적어봅시다. 그 사람이 나의 마음에 흡족하게 사과할 수 없지만 친절하게 대할 사람을 적어봅시다. 그리고 사람을 가리지 말고 인자함과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해보시길 바랍니다.
○ 양선(ἀγαθωσύνη)
양선, 아가도쉬네는 자비와 비슷한 의미입니다. 신약에선 (롬 15:14; 엡 5:9; 살후 1:11)에서만 나오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관대함’을 의미하면서 앞선 육체의 행위에서 시기와 질투와 반대되는 의미로 쓰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의미의 대비를 마태복음 20:15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0장을 보면 처음부터 일한 일꾼들이 끝날 때쯤에 온 일꾼들과 같은 돈을 받았다고 불평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처럼 양선은 다른 사람이 좋은 일에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또한 양선은 단순히 마음이 부드러운 차원을 넘어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을 뜻합니다. 즉, 남에게 유익을 끼치기 위해 적극적으로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선한 행동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내가 교회와 직장과 가족과 지역 사회의 유익을 위해 행할 일을 적어봅시다. 내가 어떠한 선한 일로 그것을 이룰 수 있을 지 결단해봅시다.
○ 충성(πίστις)
충성, 피스티스는 faithfulness. 즉, 믿을만한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고전 1:9, 10:13; 고후 1:18; 살전 5:24, 살후 3:3) 등 성경에선 하나님이 미쁘시다. 즉, 신실하시다고 여러차례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믿을만한 분이시고 이랬다 저랬다 하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변덕스럽지 않고 일관적이시며 어떤 것에 흔들리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충성도 이를 본 받는 것입니다. 변덕스럽지 않고 일관적이어야 합니다. 오늘 기분에 따라, 오늘 통장 잔고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 변함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맡은 돈을 반 만 돌려주고 어느 때는 70%만 돌려주는 은행을 누가 신뢰할만하다 느끼겠습니까? 신실하다 믿을만하다는 일관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일관성이 악해선 안됩니다. 아 저 사람은 항상 화를 내, 아 저 사람은 항상 배신해가 아니라 아 저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 되야 합니다. 그렇기에 충성의 헬라어 피스티스는 다른 말로 믿음이라고 합니다. 즉,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생각하고 사는 것에 있어서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공과금이나 카드값이 밀려도, 욕을 먹어도, 애인이랑 헤어졌어도, 갑자기 아파도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 태도를 바꾸지 않아 목숨까지 잃더라도 믿음을 고수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흔들리는지 적어봅시다. 그리고 내가 그런 상황이나 환경에서도 변하지 않고 돌변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적어봅시다.
○ 온유(πραΰτης)
온유, 파라위테스는 마음이 부드럽고 행동이 친절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소위 말하는 화도 안내는 호구를 의미하진 않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파라위테스에 대해 어떻게 말했냐면 “지나치게 화를 내는 것과 화를 내지 못함의 중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필요한 상황에서는 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즉, 외유내강 혹은 요즘 말고 기존쎄가 되야하는 것입니다.
온유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두 가지의 의미로 쓰였습니다. 그것은 먼저 야고보서 1:21에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수용”, “순종”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것과 (고전 4:21; 고후 10:1; 갈 6:1; 엡 4:2; 골 3:12; 딤후 2:25; 딛 3:2; 약 3:13; 벧전 3:15)에서 타인에 대한 “배려”, “온유”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두 번째 의미로 타인에 대해 배려해 주는 것으로 거만하고 자기 주장만 하는 마음과 태도와 반대말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정리하면 온유란 겸손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정에 휩싸여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으로 대응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처음에 말한 것처럼 모두 다 그냥 참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마태복음 11:29에 예수님은 온유하고 마음이 낮으신 분이셨지만 마가복음 3:5에 예수님은 분노하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바울은 고후 10:1에서 그리스도의 관용과 온유로 권하지만 틀린 일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지적했습니다. 즉, 온유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자기 자신의 분노를 통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시편 37:11과 마태복음 5:5의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할 것이란 이야긴 화가 가득한 사람들이 서로 공격하다 다 쓰러지고 남은 땅을 소유하게 될 것이란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항상 내 마음이 분노로 통제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언제 자꾸 분노하는지 적어보면서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해 봅시다.
○ 절제(ἐγκράτεια)
마지막 절제, 엥크라테이아는 육체적인 열정, 욕망을 통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절제는 앞선 19-21절의 육체의 일에서 “술취함”과 “흥청거림”이라는 악덕과 대조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러한 절제는 온유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온유가 분노를 통제하는 것이라면 절제는 보다 육체의 감각적 욕망, 식욕이나 성욕 등을 통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대한 바울의 좋은 설명은 고린도전서 9:25 말씀의 운동선수의 비유입니다. 운동선수가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식단 관리도 하고 여자친구를 만나고 싶어도 조절합니다. 이처럼 절제란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이루기 위해 내 육신의 감각적 욕망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결코 금욕주의를 의미하진 않습니다. 밥도 맛있는거 무조건 안먹고, 결혼도 안하고, 내가 몸으로 느끼는 즐거움을 다 금지하는 것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딤전 4:1-5을 보면 이러한 잘못된 절제를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이라고 했습니다.
정리하자면 절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그 뜻 이루기 위해 내 육체적 욕구를 조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간에는 맛있는 것도 먹고, 부부간에 좋은 시간도 보내지만 하나님의 일에 집중해야 할 때는 그런 것도 좀 참는 것입니다.
이제 절제에 대해서도 적어봅시다. 내가 어느 육체의 욕망에 약하고 어느 때에 그것을 절제해야 할 지 적어봅시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애써봅시다.
○ 이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
마지막으로 이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 율법에 걸리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가 어느 나라 법에도 걸리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의 의미는 성령의 열매는 율법의 요구를 뛰어 넘는다는 것입니다. 포도나무나 과일들이 법으로 정해져서 열매를 맺습니까? 아닙니다. 그것들은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성령의 열매도 법이 아닙니다. 지키지 못하면 천국에 못가는 규칙이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에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결론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성령의 열매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인이 맺어야 할 삶의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다른 것으로 받아들여선 안됩니다. 내가 애쓰고 노력해서 조건을 충족하는 것으로 생각해선 안됩니다. 내가 이것을 인간의 노력으로 보여줘서 난 최고등급 그리스도인에 도달했다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열심히 애쓸 뿐입니다. 그럴 때 맺어지는 것이 성령의 열매이지 결코 내 자랑이나 성취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마태복음 3:10에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지리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내 자랑거리가 아닌 그리스도인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