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920 설교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4 viewsNotes
Transcript
서로 짐을 지라
서로 짐을 지라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도 함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자리에 오신 여러분들께 주님께서 크신 은혜로 부어주시기를 소망합니다.
다들 추석 명절 잘 보내셨나요? 진짜 이번 명절은 사실 추석이라 부르기도 뭐할 정도로 많이 더웠죠. 뉴스에서는 하절이라고 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하더라구요.
그러다보니 많은 분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낸 것도 같더라구요. 저도 하루 친척들을 만난 후에는 거의 집에서 넷플릭스 보면서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달콤했던 휴식도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게 되었죠.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다시 우리가 고통의 나날들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도 될 거에요.
말그대로 짐을 이고 가는 것과 마찬가지겠죠.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이 바로 이 짐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삶에서 지고가야 할 짐들이 있죠. 이것은 초대교회의 시기에도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당시 성도들도 각자의 삶에서 행해야 할 것들이 있었을 것이고,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였겠죠.
그러면 바울은 성도들이 삶에서 지는 이 짐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우리는 과연 그것들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인 갈라디아서 육장은 사실 바로 이전 말씀인 5장의 말씀에서 이어지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번 말씀을 나눴을 때, 5장 말씀을 나눴었는데요, 혹시 기억나시는 분 계실까요? 아마 없겠죠.
그래서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갈라디아서에서 지속되는 논리구조, 믿음으로 자유함을 누려야 한다! 라는 것에서 잠시 조금은 다른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유한 것도 좋지만, 그 자유에 너무 빠져서 방종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웃사랑을 기반으로 하여 서로에게 종이 되어야 한다. 종노릇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5장에서 바울이 언급하였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그래서 이웃사랑으로 그 사랑이 나타난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알아서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고 서로에게 겸손한 모습으로 종 노릇을 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또 어떤 이야기를 하냐면, 서로 종노릇을 하지 못하고 육체의 잘못된 자유의 빠지는 자들이 어떤 모습을 보이는가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음행과 우상 숭배와 분쟁 등등.
그리고 반면에 성도들은 성령께서 주신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살아간다고 사랑 희락 화평 등을 언급합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해야 할 것을 강조하고, 그렇기에 서로 노엽게 하거나 투기하지 말라고 권면하며 5장이 마무리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인 6절에서는 무슨 이야기로 이어지냐, 만약 앞서 언급한 육체의 일로 범죄하는 일들이 일어난다면, 그때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인지를 언급합니다.
어떻게 하라고 하죠? 온유한 심령으로 그자를 바로잡고, 또한 나 자신을 살펴보면서 혹여나 내가 그렇지 않도록 두려워 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자. 그러면 바울은 범죄한 자에게 뭘 하라는 거에요? 바로잡으라고 합니다.
그래요. 1절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잘못한 자에 대해서 그것을 바로잡는 모습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말씀에서 사랑을 이야기하고, 또한 바로 이전의 말씀에서도 이웃사랑, 노엽게 하지 말라, 이런 말씀들이 나오다보니, 잘못에 대해서 쉽게 용서하고 넘어가야 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사랑의 실천인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은 분명 잘못한 죄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그것을 바로잡도록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도 그 모습은 잘 나타나구요, 신약에서도 주님은 용서를 말씀하시긴 하셨지만, 그것은 사람에 대한 용서이지, 죄를 덮어두고 넘어가라는 말씀은 전혀 하시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죄가 가진 특성 때문입니다.
주님은 죄를 뭐라고 표현하셨냐, 누룩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누룩이 뭔가요? 곡물 같은 것에 발효를 시켜서 효소를 만드는 것이죠.
당시에는 이 누룩을 사용하여 떡과 같은 것들을 만들기도 하였죠.
그런데 이 누룩의 특성이 뭐에요? 한 곳에 피어나면 조금 있으면 그것이 모든 곳으로 번져나간다는 것입니다. 곰팡이니까 당연하겠죠.
죄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어느 한 부분이 죄에 물들게 되면, 그것이 삽시간에 다른 곳까지 퍼져나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라면 어떨까요? 정말 치명적이겠죠.
그래서 발견된 죄에 대해서는 분명히 그 죄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다른 지체들에게까지 그 죄의 영향이 가지 않을 테니까요.
그래서 교회의 중요한 3 요소 중 하나가 바로 권징인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죄를 인식하고, 그것을 고치도록 교육하는 것이 교회에게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교회들에서는 이러한 모습들이 잘 보이지는 않죠. 개인적으로는 참 안타까운 현실로 여겨집니다.
이처럼 말씀은 분명 죄를 바로잡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또 중요한 것이 있죠. 바로잡는데 어떻게 바로잡아요?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으래요.
그러면 어떻게 죄를 바로잡아야 할까요? 그저 가르치듯이 꾸짖고 몰아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행하신 것처럼, 관대하게 기다려주면서 그 사람을 인도해주는 그런 모습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나타났다면, 분명히 그것이 죄라는 것을 인식시키고, 본인이 그곳에서 벗어나도록 이끌어주고, 그 벗어남의 과정에서 함께 동행하며 격려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은 결국 뭘 말하는 것일까요? 공동체가 함께 그 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요? 교회는 바로 한몸이기 때문이죠.
한번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어떤 이유로 해서 신체 일부에 상처가 났어요. 그러면 처음에는 막 아파서 계속 관심을 갖겠죠. 그러다가 그 부위에 딱지가 앉고 하면 딱지가 신경쓰이면서 확인하게 되죠. 그리고 그 딱지까지도 잘 떼어져서 아픈 부위가 말끔히 나으면 우리는 그때 그 부위가 어디였는지도 모를 정도로 잊어버리게 됩니다.
이런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에요. 우리의 한 몸이기 때문에 계속 관심을 갖고, 잘 낫도록 많은 노력을 가하고, 다 낫는다면, 그게 있었던 일인지조차 모를 정도로 잊어주는 것.
그러한 모습이 우리의 교회 공동체가운데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또 우리는 어떤 효과를 얻죠? 이어지는 말씀에 나오죠.
그 사람을 바로잡는 것 뿐만이 아니라, 나도 다시 살펴볼 수 있는거에요. 저 사람이 저렇게 죄로 인해 힘들어하고, 우리도 같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았으니, 자연스럽게 어떤 생각이 들어요? 나는 어떤가? 나도 조심해야겠다. 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겠죠.
그렇기에 우리가 죄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죄에서 벗어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나 자신에 대한 예방의 측면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모든 공동체가 한몸되어 서로를 온유함으로 바로잡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어지는 2절에 나온 것처럼 우리는 그 짐을 서로 지게 됩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짐이라는 단어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성도의 삶에서 겪게 되는 고난의 측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큰 짐을 말하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의 죄를 발견하고 그것에서 온전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많은 어려움을 견뎌내야 합니다.
자신이 이전에 행했던 행동들을 돌이키고, 그 행동에 대한 부끄러움, 그 행동으로 인해 벌어진 일들에 대한 죄책감. 이런 것들을 견뎌내야 하고, 더 나아가서는 또 같은 상황에 직면했을 때 다시금 주어지는 유혹의 순간을 견뎌내야 합니다.
어쩌면 이러한 어려움은 연약한 인간 개인이 짊어지기에는 너무나도 큰 짐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교회라는 공동체를 허락하신 것이죠. 내 마음이 죄로 인해 고통받을 때, 옆에 있는 지체들, 목자들이 마음을 위로 해주고, 다시금 힘을 불어넣어주고, 갈 바를 안내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그리스도의 법을 우리는 행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나 혼자로는 불가능하지만, 공동체가 있기에, 또한 그 공동체를 통해서 주님께서 일하시기에 우리는 그 은혜로 행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 다 행하실텐데, 굳이 짐을 서로 질 필요가 있을까요?’
이 말은 반만 맞은 이야기입니다. 물론 주님께서 우리의 고난과 고통을 아시기에 반드시 함께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함께하심은 무조건 신비한 방법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우리 곁의 사람들, 특히 교회라는 주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통해 주어진다는 것이죠.
결국 교회 공동체의 함께함이 곧 주님께서 일하시고 함께하심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 공동체 안에 있는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그 도구로서 쓰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든 공동체가 방금 말씀에서 나눈 것처럼, 각자의 어려움을 함께 한마음으로, 한몸과 같이 이겨나가는 것이 정말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렇게 반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함께함을 거절하는 것이죠.
두 가지 모습이 있을 수 있겠죠. 다른 이들이 도움을 준다는 것을 거절하는 경우. 왜 그럴까요?
도움을 받는 것을 내가 약하다는 것으로 여기는 경우라고 할 수 있겠죠. ‘나는 충분히 강해서 이정도는 혼자 할 수 있어’
다른 경우는 또 어떤 것이 있을까요. 도움을 주려 하지 않는 경우가 있겠죠. ‘내가 가진 것으로 충분한데 굳이 다른 이들에게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는가’
이 두 가지의 경우는 하나의 동일한 상황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볼 수 있겠죠. 바로 3절에 등장합니다. 내가 무언가가 된 줄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혼자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죠.
그러나 세상 속에서의 착각 속에 내가 마치 어느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착각의 결과는 무엇이라고 바울이 이야기하는거죠? 스스로를 속이는 결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어. 나 혼자만으로 충분해. 라는 이러한 착각은 내가 마치 많은 것을 가진 것으로 스스로를 속이고 공동체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내모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마치 내 창고 안에 물건들이 충분해서 혼자서 잘 살 수 있을 것처럼 보였는데, 알고보니 그 모든 물건들은 공용 물건이었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그러한 셈이 되는 것이죠.
바울은 이처럼 성도 하나하나가 서로를 살피고 하나의 공동체로서 서로를 살피며 나아갈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4절을 보면 갑자기 또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뭐라고 하죠?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래요. 그리고 또 5절에서는 뭐라고 하죠? 각각 자기의 짐을 지래요.
이건 또 무슨 이야기일까요. 왜 같은 장에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대필해주는 분이 자기 생각을 넣은 것일까요? 아니면 바울이 다중인격장애를 가져서 갑자기 다른 인격이 튀어나온 걸까요?
다 아닙니다. 언뜻 표면적으로 보면 당연히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죠. 2절은 짐을 서로 지라고 하고, 5절은 각자가 지라고 하고.
이것은 번역을 하면서 같은 짐이라고 한글로 표현을 해서 생기는 오해인데요, 사실 2절과 5절의 짐은 각각 다른 단어입니다.
2절의 짐은 헬라어로 바로스라는 단어이고, 5절의 짐은 포르티온이라는 단어입니다.
물론 둘다 짐을 뜻하기는 하지만, 그 뉘앙스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죠.
앞서 2절을 설명하면서 그 짐을 어떤 것이라고 했었죠? 죄에게서 벗어나면서 생기는 고난과 고통을 짐으로 표현했다고 했습니다.
2절에서의 짐은 이처럼 매우 크고 힘든 그러한 짐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반면에, 5절의 짐은 그보다는 가벼운 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이야기일까요. 4절과 5절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돕고 함께 짐을 지지만, 자기 성찰의 부분은 분명히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내가 할거는 내가 하자’라는 말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다른 공동체에게 떠넘기고 가만히 있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봅시다. 방금 죄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거칠 때, 분명 그 과정을 함께 나아가는 것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무것도 안하면 아무리 옆에서 도움을 준다해도 그 사람은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겁니다.
결국 나의 삶 가운데 벌어지는 죄의 문제는 ‘나의 죄’ 입니다. 내 옆의 누구의 죄가 아니라는 거에요. 그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내가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 다른 지체를 살피고 도움을 주면서도 동시에 나 자신에 대해서도 항상 살피며 더욱 죄와 싸워나가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각자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할 때에 우리는 또 다른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로 4절 하반절에 나온 것처럼, 서로를 비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비교한다는 것은, 사실은 나 자신을 잘 보지 않고, 남을 자꾸 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앞서 말했듯 모든 교회는 하나의 공동체이고, 결국 하나의 몸입니다. 그러면 저 지체가 남이 아니고, 결국 하나의 몸이고 가족인데, 왜 굳이 가족을 타자화 하고 자신과 비교를 합니까.
오히려 그럴 시간에 자신을 한번 더 바라보고 성찰을 해야, 우리는 우리를 괴롭히는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지금까지 오늘의 본문을 살펴보았는데요, 어쩌면 이 짐과 관련된 상반된 내용 때문에 조금은 헷갈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뭘 어쩌라는 것이냐?
한번 정리해볼게요. 바울은 분명 교회 공동체가 하나되어 몸된 한 지체의 짐을 함께 지라고 말합니다.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겪는 고통들을 함께 이겨내고, 그것을 잘 이겨낼 수 있도록 이끌어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죄를 온전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각자 스스로를 잘 살펴야 합니다. 내가 잘 안되어있는데, 어떻게 다른 이들을 도울 수가 있겠어요.
결국 우리는 항상 나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의 신앙생활과 우리의 모습들을 점검해야 하나, 그 과정에서 큰 고난들이 있고, 너끈히 이겨낼 수 없을 고난의 상황이 있다면, 그때 하나님께 아뢰고, 공동체의 도움을 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몸된 공동체는 그 즉시 함께 한마음이 되어 그 짐을 서로 지어줘야 한다는 것이죠.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한가지 예를 들어볼게요.
여러분들이 좋아하시지 않을 수 있지만, 군대로 예를 들자면, 군대에서 하는 여러가지 어려운 훈련들 중 하나가 바로 행군입니다.
군장에 20-30정도로 무게를 맞춰서 모든 부대가 함께 30키로 정도 걸어서 주파를 하는건데요,
사실 행군이라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아요. 그냥 걸으면 되니까. 그래서 처음에는 마치 나들이 나가는 것 마냥 신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게 10키로를 넘고 하다보면, 군장의 무게와 총의 무게, 딱딱한 군화 등등 여러가지 요소들로 인해 고통이 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중에 어떤 분들은 혼자서 그 모든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까지도 오게 됩니다.
그럴 때 지휘관들이 뭘 하냐면, 체력이 남아 보이는 전우들에게 총이나 군장을 대신 들도록 시킵니다.
그러면 그 친구는 잠시 자신을 짓누르던 무게에서 벗어나 숨을 고르고 체력을 충전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짐들을 대신 가져간 친구들이 그걸 끝까지 들고가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에는 자신의 짐은 자신이 들고 가야하는거에요.
분명 옆 사람들이 도와주기도 했고, 언제든 신경쓰면서 응원도 해주고 하겠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그 짐은 자신이 들고 골인지점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각자의 짐들은 각자가 신경을 쓰고 들고 해결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각자의 짐에 집중하고 나아가면, 나중엔 어떻게 되느냐, 다른 사람이 어떻게 들고 가는지는 보이지도 않습니다. 누가 갑자기 소리지르고 뭐라고 하면 볼 수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지금 내 짐 하나에 집중해서 열심히 목적지까지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겠죠. 행군의 목적은 모든 부대가 이동해야 할 지점까지 함께 이동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모든 부대가 하나가 되어 목적지까지 서로 짐도 져주고 하는 것이죠.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에요. 교회 공동체의 목적은 마지막 주님 오시는 때까지 세상에서 주어지는 여러 고난들을 이겨내고 함께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한 몸이 되어 모두가 함께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도록 서로를 돕고 아픔을 함께 나누고 살피는 것이죠.
하지만 동시에 그 마지막 때에는 주님께서 각자 한사람 한사람을 심판하십니다. 그 순간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우리 모습을 책임지고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하임 공동체가 그러한 모습을 지녔으면 좋겠습니다. 각자가 서로 다르다고 관심주지 않고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의 공동체라는 것을 기억하며, 서로의 어려움들을 살피고, 서로를 응원하고 함께 나아가는 모습을 지니기를 소망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나 자신을 수없이 돌아보고, 공동체를 더욱 잘 도울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먼저 다지는, 그런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되기를 또한 소망합니다.
찬양 : 우리는 주의 움직이는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