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후가 가진 반쪽자리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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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서론]
이번에 우리가 장안동쪽으로 예배당을 이전하며 교회 이름을 ‘함께걷는교회’로 바꿨습니다.
‘함께걷는다’는 것은 동행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말씀과 함께 걷고, 성령님과 함께 걷고, 이웃과 함께 걷는 교회가 되고자 하는 마음때문입니다.
말씀과 함께 걷는다는 것은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말씀을 많이 읽고 들어도 묵상하지 않는 말씀은 내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치 먹어보지 않은 음식을 그냥 쳐다보는 것과 같습니다.
먹어봐야 제 맛을 알듯 묵상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묵상에는 순종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습니다.
말씀은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습니다.
‘말씀과 함께 걷는다’는 것은 순종한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순종이 쉬운게 아닙니다.
무턱대고 순종한다고 순종하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순종이 따로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내 삶에서 하나님이 일하시게 만드는 순종이 무엇인지 깨닫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말씀과 함께 걷는 우리의 삶이 되길 소망합니다.
[본론]
북이스라엘의 왕이 된 예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후는 아합가문을 척결하기 위해 하나님이 기름부으신 새로운 왕입니다.
그는 아합왕의 아들 요람왕을 제거했고, 남유다의 아하시야왕까지 제거합니다.
아하시야왕 역시 아합가문의 영향력아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유다를 우상숭배에 빠지게 만든 장본인인 악녀 이세벨도 제거하는데 성공합니다.
더 나아가 그는 남과 북을 가리지 않고 아합가문과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을 제거합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서 그는 아합가문이 적극 후원하고 지지하던 바알숭배자들을 마지막으로 제거하려 합니다.
이런 예후의 모습은 마치 엘리야가 갈멜산에 바알과 아세라 제사장들을 모두 모아 대결을 벌인후 그들을 처단하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우상숭배자들과 정면 대결하던 방법과 달리 예후는 속임수를 사용합니다.
18절입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바알신을 아합가문보다 더 열심히 섬기겠다고 공언합니다.
더나아가 자신의 왕위 등극을 기념하는 성대한 바알 제사를 열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속임수입니다.
그는 왜 이런 속임수를 쓰는 것일까요?
이는 바알숭배자들을 모두 한 자리에 모아 몰살시키려는 계략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예후가 아합의 가문을 거의 전멸시켰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바알 숭배자들은 두려움 속에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후가 아합보다 더 열심히 바알을 섬기겠다고 공언합니다.
더 나아가 바알 제사에 참석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새로운 왕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도 이 제사에 참석하려 했을 것입니다.
예후는 이렇게 바알을 숭배하는 사람들을 싹싹 긁어모읍니다.
그러니 바알 신전에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합니다.
사람들이 모이자 예후는 그들에게 모두 제사지낼때 사용하는 예복을 입히려 합니다.
혹시라도 무기를 소지할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완전히 무방비상태로 만들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예후는 여기 있는 사람들중에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있는지 묻습니다.
바알숭배자들만 모였을텐데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일까요?
당시 많은 사람들이 한 신만 섬긴게 아닙니다.
바알신을 섬기면서도 하나님도 함께 섬겼습니다.
또한 하나님만 섬기는 사람들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숨기고 다녔습니다.
아합가문이 그런 사람들을 핍박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새로운 왕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성향이나 의도를 알길이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여호와 하나님을 숭배하지만 단지 예후에게 잘 보이려고 바알제사에 참석한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바알숭배자들은 이런 사람들을 금새 알아보았을지 모릅니다.
“여기 하나님 섬기는 사람있어요. 제가 아는데 이 사람은 하나님만 섬기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고발하는 사람들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고발은 오히려 기회입니다.
살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드러나면 그 자리에서 빠져나가 목숨을 구할수 있습니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자리에서 빠져나갔을 까요?
바알과 하나님의 관계를 돈 또는 성공과 하나님으로 치환할수 있습니다.
바알 자체가 풍요의 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까요?
돈이나 성공을 걷어차고 하나님을 선택할수 있을까요?
이것은 목숨을 거는 거창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삶에서도 비슷한 순간들을 자주 맞이합니다.
나의 이익을 위해 신앙과 타협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예를들어, 그리스도인이 세금을 안내거나 덜내려고 편법이나 불법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이익을 더 얻으려고 식당에서 좀 더 싼 식재료를 사용할수도 있습니다.
삶의 작은 순간이지만 그 순간 하나님이 아닌 바알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처럼 사탄은 우리를 속입니다.
하나님보다 내 이익을 따르면 더 잘 살수 있을 것처럼 유혹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결국 죽음의 길입니다.
내 양심을 죽이고, 내 영혼을 죽이는 길입니다.
이제 바알숭배자들이 제사를 마치자 예후가 밖에 있는 군사들에게 명령합니다.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죽입니다.
신전에 있는 우상들까지 모두 불태워 버립니다.
심지어 그곳을 똥,오줌을 배출하는 변소로 만들어 버립니다.
원래 신을 모시던 곳은 대대로 신을 모시는 곳으로 신성시 됩니다.
그런데 예후는 그곳을 변소로 만들어 두번 다시 이곳이 신전이 되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바알숭배를 완전히 멈출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거룩하게 여기던 그 장소를 제일 더러운 변소로 만들어 버리다니…
얼마나 통쾌합니까?
엘리야부터 시작된 바알숭배자들과의 대결이 이제 마침표를 찍은 것입니다.
아합왕이 물려준 죄악의 잔재들을 모두 청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개혁은 불완전한 개혁으로 남고 맙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열심이 있던 예후가 한계를 드러낸 이유가 무엇일까요?
먼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 방식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바알 우상숭배자들을 척결하는데 속임수를 썼습니다.
거짓말로 사람들을 속여 그들을 한꺼번에 죽인 것입니다.
엘리야가 정면대결한 것과는 다른 방법입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앞에서도 그는 아합과 관련된 사람들을 척결하는데 잔인한 방법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아합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지 않은 남유다 왕족들까지 산채로 구덩이에 넣어 죽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자기 방식대로 자기 성격대로 순종한 것입니다.
도가 지나쳐 악을 제거하려다가 자기 자신도 악을 저지른 것입니다.
마치 괴물잡으려다가 자신도 괴물이 된 셈입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목적이 정당하다고 해서 어떤 방법이나 사용할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목적뿐만 아니라 그 목적을 이루는 과정과 방법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목적을 위해 과정과 방법을 무시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하나님을 위한 것이 오히려 남에게 피해를 줄수 있습니다.
심지어 폭력이 될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를 무례하고 천박하다고 여깁니다.
예전에 학교에서 예배드리는 어떤 대형교회를 가본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차들이 그 곳에 들어가던지 도로가 좁은데 도로 하나를 완전히 막아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뒤에서 그냥 지나가는 차들이 빵빵대고 쌍욕을 하며 난리가 난 장면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 뿐입니까?
저는 목사님들중에 예배시간 늦었다며 신호위반, 속도위반을 아무렇지 않ㄱ 하시는 분을 본적도 있습니다.
목적이 옳을지라도 그것을 이루는 방법도 과정도 모두 옳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후가 한계를 드러낸 결정적인 장면은 따로 있습니다.
29절입니다.
예후는 솔로몬이후 남북으로 갈라질때 여로보암이 북이스라엘에 세운 금송아지 우상들을 제거하지 않았습니다.
솔로몬 이후 갈라진 북이스라엘의 최초 왕이 여로보암입니다.
그는 왕이 되자 북이스라엘의 남쪽끝과 북쪽끝인 베델과 단에금송아지를 세웠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전까지 사람들은 모두 솔로몬이 세운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것을 종교적 의무로서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남과 북으로 갈라진 것입니다.
그럼 백성들이 예배드리려면 남유다로 가야합니다.
여로보암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예배하기 위해 남유다로 가는 것을 막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을 대체하려고 세운 것이 바로 금송아지 입니다.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고 이름붙혀 사람들이 숭배하게 만든 것입니다.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후 100여년 가까이 그렇게 섬겼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금송아지를 없앤다면 어떻게 될까요?
백성들이 불만을 품고 남쪽 유다의 예루살렘성전으로 다시 갈지 모릅니다.
그럼 나라가 붕괴될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후는 두려워 금송아지를 건드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십계명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 자체가 우상숭배입니다.
광야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든 적이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자 두려워진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엄청나게 분노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똑같은 일을 여로보암이 했고, 그것이 오랜 세월동안 전통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금송아지가 아닙니다.
오래된 전통은 미화되기 쉽지만 아닌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예후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흔들릴까 두려워 그것만큼은 건들지 않은 것입니다.
그의 개혁이 반쪽짜리로 전락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후의 마음이 반쪽짜리에 불과했음을 보여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31절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지키는 일에 마음을 다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지키려 했다면 금송아지도 없앴을 것입니다.
마음이 반쪽짜리였기 때문에 바알숭배만 척결하는데 그치고 만 것입니다.
마치 우상숭배의 뿌리는 뽑지 못하고 잎과 줄기만 제거한 셈입니다.
물론 인정할건 인정해야 합니다.
그는 분명 이스라엘의 바알숭배를 완전히 척결했습니다.
그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으며 인정받을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반쪽짜리 개혁에 불과합니다.
금송아지를 제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순간 하나님의 뜻과 함께 정치적 욕심이 섞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순종은 온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의 순종의 동기는 순수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도 매우 제한적입니다.
30절입니다.
이스라엘 왕을 자기 포함해서 5대에 걸쳐서 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진을 보시죠.
하나님의 축복치고는 매우 제한적입니다.
만약 그가 금송아지까지 모두 없앴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왕조는 5대에 끝납니다.
그후 북이스라엘은 다시 우상숭배의 길을 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얼마 안돼서 멸망하고 맙니다.
결국 예후가 민심을 얻으려고 하나님의 마음에는 고개를 돌린게 단초가 된 것입니다.
예후의 마음이 반쪽짜리 였음을 보여주는 장면이 또 등장합니다.
32절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땅을 찢어내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충성의 마음이 반쪽짜리라서 땅도 반으로 찢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람왕 하사엘을 통해 요단 동편땅을 빼앗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땅을 빼앗긴다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의 순종은 어떻습니까?
순종이라고 다 순종이 아닙니다.
성경은 부분적인 순종은 불순종이라고 말합니다.
사울을 보십시오.
사울은 불순종의 예를 매우 잘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그는 삼상 13장에서 사무엘이 올때까지 기다렸다가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자기 마음대로 제사를 지내버립니다.
제사를 드린 사실은 같지만 그것은 불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목적이나 결과뿐만 아니라 그 과정과 방법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도 모든 것을 소각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사울은 자기 생각으로 일부 좋은 짐승들은 남겨두었습니다.
그는 이 짐승들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한 것입니다.
목적과 동기는 좋았지만 그것은 자기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울의 행위를 불순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부분적인 순종을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부분적인 순종은 행동 그 자체는 순종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순종의 동기도 살피십니다.
동기가 순수하지 못한 순종은 온전한 순종이 아닙니다.
또한 목적이나 결과를 얻기 위한 과정과 방법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목표한 결과를 얻었더라도 그 과정과 방법이 옳지 않다면 그것은 불순종일 뿐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예후의 이야기를 통해 부분적인 순종과 온전한 순종의 차이를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후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바알 숭배를 척결하는 큰일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지 못하고 자신의 정치적 안전을 위해 금송아지 우상을 남겨둠으로써 반쪽짜리 개혁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의 순종이 온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축복도 제한적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도 단순히 결과만을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우리의 동기,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 모두를 보십니다.
부분적인 순종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순종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순종처럼 보일지라도, 그 과정과 동기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지 않다면 그것은 결국 불순종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께 부분적으로만 순종합니까?
우리의 이익과 타협할 때,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할 때, 내 편안함을 위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전적인 순종을 미루거나 피한 적은 없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온전한 순종을 원하십니다.
그 순종은 우리의 삶 전체를 걸고, 우리의 마음 깊은 곳까지 하나님께 맡기는 순종입니다.
오늘 이 순간,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께 온전하게 순종하지 못한 영역은 무엇입니까?
혹시 하나님보다 다른 무언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며 타협한 부분이 있지는 않습니까?
예후가 정치적 두려움 때문에 금송아지를 제거하지 못한 것처럼, 우리도 어떤 이유로든 하나님 앞에서 불순종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이제 우리의 마음과 삶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온전한 순종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의 '부분적인 순종'이 아니라 '전적인 순종'입니다.
순종은 결코 쉽지 않지만, 온전한 순종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우리 삶에 진정한 평강과 축복을 가져다줍니다.
세상의 유혹과 내 안의 두려움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앞에 마음을 다해 순종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 삶 속에서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다시 한번 하나님 앞에서 결단합시다.
우리의 마음을 반쪽짜리가 아닌,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립시다.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걷는 순종의 길을 선택하는 우리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