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5: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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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기도]
기도하시겠습니다.
[찬송가1]
찬송가 96장 통 94장 예수님은 누구신
[통성기도]
우리 이시간 예배를 위해서
선포될 말씀을 위해서
우리 마음 밭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코로나 전염병과 우크라이나 이스라엘 전쟁 속히 종식시켜달라고 기도하시고
몸이 불편한 우리 산성 식구들과 장기 결석하는 식구들 위해서 우리 나라를 위해서
주여 한번 부르짖고 기도합니다.
고린도전서 15:20–34 NKRV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24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27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에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그의 아래에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28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29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30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32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34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고린도 교회가 가진 큰 문제중 하나는 교인 중에 일부가 부활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부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더불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이 없는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고, 부활을 믿지 않는 기독교는 더이상 기독교일 수 없습니다. 몸의 부활을 믿지 못한다는 것은 곧 주님의 부활을 부정하는 것이기에 그분의 대속의 죽음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여러가지 문제 중에서 ‘부활’에 관한 것은 아주 큰 문제입니다.
울은 15:1-11에서 부활이 역사적 사실임을 논증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게바에게, 열두 제자에게, 그리고 500여 명의 사람에게 일시에 나타나셨을 뿐만 아니라, 만삭이 되기도 전에 태어난 아이 같은 자신에게도 나타나셨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즉 주님의 부활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없었으리라는 것입니다. 또한 12-19절을 통해서는 주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분을 향한 믿음이 결코 헛될 수 없고, 결코 불쌍한 사람이 될 수도 없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20-28절은 주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 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20–22 NKRV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사망이 한사람 곧 아담으로부터 왔는데 죽은자의 부활도 한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삶을 영생을 얻고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도바울은 부활을 믿지 않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그 부활의 첫 열매가 주님이시고 그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삶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23–24 NKRV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24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3절에 보시면 그 부활이 차례대로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부활의 첫번째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 다음에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그리스도에게 속한자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다시 재림한다는 것과
그 재림시 부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부활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 속한자, 그리스도께 발견되어지는 자가 되어져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깨어있는 자들이 되어야합니다.
고린도교회에서 부활이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처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 있고 주님께서 재림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열처녀 비유처럼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는 자들이 되어야합니다.
기다리는 자들이 되어야 우리의 삶의 변화가 옵니다.
주님께서 우리가운데 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고 나의 모든 것들을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고 그 주님을 기다리며 주님께서 말씀하신 말씀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변화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분명하게 우리의 마음과 태도에 따라서 우리는 변화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요즘에는 페르소나라는 심리학용어로 쓰이는 단어를 씁니다. 다 각자의 직업과 위치, 지위에 따라서 가면을 쓰고 살아가야합니다. 그런데 유독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가면을 쓰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이 가면이 나쁜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을 나타내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본인의 모습이 그리스도인처럼 아주 편하게 원래 나인것처럼 살 수 있을까요? 이 죄많은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제가 가면에 빗대어서 표현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 죄많은 세상에서 가면을 쓰고 살아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가면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께 속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사는 삶과 정반대의 삶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자각하지 않고 가면쓰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로 작정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는 자들이 되어야합니다. 주님께 속한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과 생각 태도가 없다면 여러분 어떻게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될까요?
어느 누구도 어렵습니다.
이것을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부활은 중요하고 그 부활을 기다리며 주님께서 다시 오실것을 믿고 기다리는 우리가 되어야합니다.
23절의 ‘강림’은 본래 ‘황제의 행차’를 뜻하는 말입니다. 초림의 예수님은 아주 연약한 모습으로 오셔서 구유에 뉘셨습니다. 또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도 ‘말’이 아니라 ‘어린 나귀’를 타고 가셨습니다. 하지만 재림의 예수님은 통치자의 모습으로,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 오신다고 하십니다. 또한 본래 하나님의 나라였지만 타락했던 나라를 회복하셔서 하나님께 되돌려 드린다고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5:25–26 NKRV
25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그리고 영원한 왕이신 예수님은 마지막 때까지 통치하신다고 하십니다. 또한 맨 나중에 멸망 받게 될 원수는 ‘사망’이라고 하십니다. 즉 사망에게 사망선고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죄인데, 그때는 더 이상 죄라는 존재가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27–28 NKRV
27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에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그의 아래에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28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만물을 예수님의 발아래에 두지만, 하나님은 그 발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자가 성부에게 복종한다는 것은 종속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부와 성자의 역할이 다름을 밝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부활에 관해 말하다가 갑자기 심판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것은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지 않는 것과 같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부활과 만물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믿을 때 바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부활의 삶과 자기 부인
고린도전서 15:29 NKRV
29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복음이 아직 온전히 전해지지 않은 초대교회 때에, 복음에 대해서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을 위해서 대신 세례를 받아 주는 일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혹 그를 대신해서 세례를 받으면,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지 않을까 하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이런 일은 지금은 있을 수 없는 일로 받아들여지지만, 바울은 이런 관습이 옳다 그르다고는 말하지 않고, 부활을 강조하는 논증으로 인용합니다. 고린도 교회에도 이런 관습이 있었던 것입니다. 즉 “예수를 믿는 것이 좋아서 죽은 사람을 위해서 세례는 대신 받아 주면서 부활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 일이냐?”라고 질책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30 NKRV
30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바울은 주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고, 부활이 없다면 편안한 삶을 살지, 위험을 무릅쓰고 고난의 길을 걸을 필요가 있겠느냐고 반문합니다. 바울이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었는지는 고린도후서 11장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바울은 주님 때문에 형극(荊棘)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가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동일합니다. 부활이 없다면, 편하게, 욕망을 따라서, 세속적인 가치관을 추구하며 살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도 부활을 소망하기에 약간이라도 불편하게 사는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31 NKRV
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감히 단언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하신 그 일로 내가 여러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날마다 죽는데, 그것을 자랑한다고 합니다. 즉 자신이 죽는 것이 오히려 사는 것이라고 역설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32 NKRV
32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감히 단언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하신 그 일로 내가 여러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날마다 죽는데, 그것을 자랑한다고 합니다. 즉 자신이 죽는 것이 오히려 사는 것이라고 역설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33–34 NKRV
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34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인생이 이 세상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악한 친구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기에 부활을 목적 삼거나 영원한 가치를 존중하는 삶을 살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속지 말라고 하십니다. 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고린도 교회 사람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런데 4장의 당파에 대해서 말할 때는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부활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믿음의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때가 되면 우리는 이 땅에서 마지막 숨을 내어 쉬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어도, 코로나와 같은 바이러스가 만연해도,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을 살며, 소망 가운데 살 수 있는 것은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부활이 오늘 하루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설교후 마침 기도]
[찬송가2]
찬송가 161장(통 159장) 할렐루야 우리 예수
[기도제목] 후
“오늘은 특별히 박상록 권사님을 위해서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 이시간 주여 한번 더 부르짖고 각자 주신 은혜 붙잡고 기도하시다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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